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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웅(63년생, 서울대 무역학과 82학번, 88년 5월26일 실종)씨는 실종된 날인 88년 5월26일 오전9시 경 새암교회 김중원(60세)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사님, 신학교 진학문제로 상담할 것이 있습니다."

 

김 목사는 반기며 오전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신자의 집에 방문할 일이 생겨 다시 안씨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미뤘다.

 

"급히 심방(목사가 신자의 집에 방문하는 것)갈 일이 있으니 오후1시 정도에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하세."

 

이후 안씨는 오전 9시가 조금 넘어 집에서 나와 집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오전 9시 30분경 나섰다. 그리고 오후 1시 김 목사와의 약속장소인 새암교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위 사실은 김중원 목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한 것이다.

 

12년의 세월 동안 새암교회는 암사동에서 고덕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5월 11일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전. 기자는 안씨가 실종 당일 만날 약속을 했었다는 김중원 목사를 찾아갔다.

 

- 안치웅씨를 언제 알게 됐는가.

 

"88년 3월 새암교회에 부임하면서부터이다. 88년 2월 이광복 목사가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내가 부임했다."

 

- 안씨는 이광복 목사와 많은 상담을 했었다는데, 김 목사와도 이야기를 많이 했는가.

 

"많은 이야기를 나눈 사이는 아니다. 주일이면 교회에서 만나 통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님이 우리 교회 집사였는데 치웅이의 마음을 잡게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당시 어머니는 정보부에서 치웅이를 미행하고 집으로 확인전화가 오곤 했었다고 말했다. 나는 안씨에게 시대가 혼란스러우니 목회자의 길로 가라고 했었다."

 

- 안씨는 신앙심이 깊었었나.

 

"안씨는 내가 부임하기 전부터 교회 고등부 교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신앙심이 깊고 마음이 잡혀 있었다."

 

- 실종 당일인 88년 5월 26일날 만나기로 했었다는데….

 

"오래 전의 일이라 시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안씨가 아침 일찍 나한테 전화해서 '목사님, 신학대 진학문제로 상담을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급히 심방할 집이 생겼다. 그래서 내가 다시 전화를 걸어 심방을 다녀온 후 만나자고 약속을 미뤘다."

 

- 안씨가 몇 시에 전화했었나.

 

"모두 다 오전 9시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오후 약속시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시정도였던 것 같다.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하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다. 오후 늦게는 아니다."

 

- 약속장소는…, 안씨가 약속시간에 나왔나.

 

"안왔다. 약속장소는 교회였다."

 

- 왜 안오는지 연락을 했었는가.

 

"그 시간 이후로는 내가 전혀 시간이 없어서…. 난 아무 연락도 없이 나오지 않아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어디 갔겠지 했다. 특별한 생각은 없었다."

 

- 실종 사실을 언제 알았나.

 

"며칠 후 어머니를 통해 들었다."

 

- 집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나.

 

"안씨의 집이 교회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교회까지 직선거리로 한 500m 정도 된다. 집은 아파트였는데, 아파트에서 교회까지도 걸어서 약 10분에서 15분 거리이다."

 

- 실종 이후 안씨를 찾아본 적은 없었는지.

 

"없었다. 우리로서는 찾아볼 곳이 없었다."

 

- 어디 기도원에 들어갔을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신학대 진학에 대해 상담을 하자고 나에게 전화했었는데 갑자기 기도원에 갔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 새암교회에 관련이 있는 기도원이 있는가.

 

"경기도 광주에 한 군데 있다. 그렇지만 그 기도원은 한 달에 한두 번씩 우리 교인들이 가기 때문에 안씨가 있으면 당연히 알게 된다."

 

- 안씨의 실종 원인을 어떻게 보는가.

 

"내용적으로 깊이 아는 것이 없어서 뭐라고 말하기 그렇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의 반영이 아닌가 한다. 당시 어머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정보부나 경찰서에서 자꾸 미행을 하고 집에 있는지 없는지 자꾸 체크했다고 들었다.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한다. 첫째는 정보부에서 조사하려고 데려가지 않았느냐이고 두번째는 간첩들이 대동월북을 하지 않았나…. 하지만 상상일 뿐이다. 어떤 근거는 없다."

 

- 안씨는 어떤 사람이었나.

 

"성격이 너무너무 조용하고 말이 없었다. 그때 듣기로 대우어패럴사건의 주범으로 (감옥에) 들어갔다는데 그런 면은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도대체 이런 사람이 어떻게 데모에 앞장섰을까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과격한 면은 전혀 없었다.

 

거짓말을 하거나 말 따로 행동 따로 할 사람이 아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고 참 신실했다. 그래서 내가 '안군, 시대가 이렇게 너무 아픈데 목회자가 되게. 그래서 다른 각도에서 인생을 설계하고 살아가게' 했었다. 안씨가 선뜻 결심을 못한 이유는 어머니가 목사가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참 아까운 인재다. 지난번에 MBC에서도 취재하고 갔었는데, 그후 사실 많이 울었다. 어려운 일에 젊은 사람들이 앞장을 섰다가 그래도 민주화가 많이 된 지금, 그 친구들이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기성세대들이 누구 하나 말 한마디 하지 않을 때, 젊은 사람들이 앞장을 섰었는데…."

덧붙이는 글 | 노진수씨,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대들을 찾아 나섭니다.
오마이뉴스는 민가협(의장 임기란, 총무 남규선)과 공동으로 그대들이 이 하늘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노진수씨(주민등록번호 620328-*******, 대구 남구 대명동 출생).
사람들은 당신이 서울대 법대 2학년에 휴학중이던 1982년 5월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서울대 앞 지하독서실에서 기거하던 중 한밤중에 방문한 세 남자와 함께 떠났다고들 합니다.

그로부터 17년, 가족과 학우들은 청와대에 탄원서까지 냈지만 그 누구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안치웅씨(주민등록번호 631017-*******, 광주 동구 산수동 출생).
사람들은 당신이 서울대 무역학과를 1988년 2월 졸업한 후인 1988년 5월 26일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2년, 가족과 선후배들은 일간지에 '사람을 찾습니다' 광고를 내봤지만 당신은 연락해오지 않았습니다.

노진수씨,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세월은 흘러 동시대를 살았던 당신의 친구들은 국회의원이 되고, 벤처기업 사장이 되고, 시민운동가가 되었습니다. 또한 아이 한둘에게 아빠 소리를 듣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대들은 정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어디로 떠난 것입니까? 

오마이뉴스는 3명의 특별취재팀, 그리고 1800여 기자회원들과 함께 당신을 찾아나섭니다. 

(노진수, 안치웅씨의 행방과 관련해 도움을 주실 분은 오마이뉴스 1면 우측에 있는 '기사제보'란을 이용해 주십시오.) 


태그:#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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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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