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작 <토지>, 일본에 소개해 뿌듯하다"
박경리의 <토지>, 일본어 번역판 편집자 인터뷰(상)
▲ 고단샤판 <토지> 제1권 표지 ⓒ 고단샤비씨
본 기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토지>의 연혁 및 그 세계에 관하여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1969년 9월 <현대문학>에 제 1부 연재가 시작되어 완결편 제 5부가 1994년 8월 <문화일보>에서 막을 내린 <토지>는, 장장 25년간에 걸친 집필 시간, 200자 원고지 3만1000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등의 숱한 화제를 나은 한국문학 최초이자 최장의 대하소설이다. 제 5부의 마지막 연재가 끝난 그해, S출판사를 통해 총 16권으로 완간된 바 있고, 2002년 이후 N출판을 통해 총 21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토지>의 무대, <토지>의 시대
국가 존패가 위기에 빠진 조선의 위정자는 우왕좌왕하고, 제국주의에 몸을 달군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위협에 사위를 포위당한 그야말로 혼돈의 한가운데를 걸어가야 했던 1897년의 조선 남부의 땅, 경상남도 하동군 평사리의 대지주 최참판가에서 한가위를 맞이하는 풍경 묘사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토지>는, 최참판가의 마지막 직계 후손인 주인공 '서희'가 수양딸 '양현'으로부터 이 나라의 해방 소식을 듣는 1945년8월15일의 묘사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처절하고 험난한 시대로 불리우는 조선 말 쇠퇴기부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기까지의 반세기를 담고있는 <토지>는, 하동, 진주, 지리산 일대, 경성(지금의 서울) 등, 이야기의 무대는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고 중국 동북지방과 일본의 동경까지 넓혀가며, 식민지 조선을 살아가야만 했던 사회 각층 사람들의 고뇌와 갈등, 이기와 반목 등 인간 군상들의 삶의 모습을 동시대적 긴장감과 함께 과부족함 없이 총체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토지>의 첫장이 그때까지의 이 나라의 국호인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국왕 고종(高宗)이 '황제'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한 1897년부터 그려지고는 있지만, 이 작품의 커다란 뼈대를 이루는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한 것은 1894년이며, 중요 등장인물 중의 하나인 '김환'의 생부 '김개주'가 동학농민전쟁에서 걸출한 지휘자로 활약한 '김개남'(金開南)이라는 역사상의 실존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점, 나아가 한반도 역사상 최대규모의 민란으로 기록되는 동학농민전쟁이 근대화 된 무기를 배경으로 한 일본군의 폭력앞에 무참히 패배하였고, 일본군의 관여가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토지>에 있어서의 일본의 그림자는 '한국병합'이 이루어진 1910년부터를 다룬 제2부가 아니라, 이미 제1부에서부터 드리워져 있었다고 하겠다.
'한국병합' 100년, <토지>가 일본인의 역사의식 되묻는 계기 되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중순 저녁, 편의점에서 음료수 2개를 사든 기자는 동경 분쿄구(文京區)에 위치한 코단샤비씨 사무실로 <토지>의 담당 편집자 가타부치 모리히코씨(片渕守彦, 55)를 찾았다. 정중하고 온화한 말투가 인상적인 가타부치씨는 그 자신 예전에는 '문학소년'이었단다.
이하, 가타부치씨와의 일문일답.
- <토지>는 1980년대에, 제1부에 한정되긴 하였지만, 후쿠다케서점(福武書店)에서 총 8권으로 번역출판되었다. 어찌보면 일본인에게 민감한 소설이라 할 수 있는 <토지>를 이 시점에서 번역출판한 의도는 무엇인가.
"알다시피 수 년 전부터 일본에서는 한국 드라마를 비롯하여 K-POP 등이 일본인 사이에 인기를 얻으며 한류붐이 한창이다. 하지만 일본인의 한국역사에 대한 무지나 무관심이 이전에 비하여 크게 개선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류가 일한(日韓) 간의 교류 확대에 지렛대 역할을 해준 것은 사실이며, 나 또한 물론 반기는 바이지만 한류가 한국의 전부인것처럼 수용되는 현상에는 위화감을 느끼기도 한다. 작년은 '한국병합' 100년이 되던 해로서, 일한 양국에게 있어 역사적으로 뜻깊은 해였는데, 이러한 때에 일한의 역사를 다룬 한국문학을 일본에 소개하고 싶었다."
- 후쿠다케서점판 <토지>와 비교하여 고단샤판 <토지>의 특징은 무엇인가.
"먼저, 앞서 기자가 지적한대로 후쿠다케서점판 <토지>는 총 5부로 구성된 원작의 제1부만을 번역한 것이었는데, 고단샤판 <토지>는 한국의 '자음과모음'(전신은 '이룸출판')사가 발매한 청소년판 <토지>를 저본(底本)으로 했다. 청소년판 <토지>는 독자가 청소년임을 감안하여, 원작의 분량을 6분의 1로 줄인, 말하자면 <토지>의 다이제스트판이라 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 이미 200만 부 이상이 판매되어 독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고단샤판 <토지>는 원작 <토지>의 전(全) 스토리를 일본의 독자가 통독할 수 있는 기회를 처음으로 제공하는 셈이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토지>의 주요 등장인물의 인명과 캐릭터 설명을 목록화한 책갈피를 끼워넣어 독자의 이해를 도모했으며, 일본어 번역이 불가능한 강청댁, 함안댁 등의 '댁'이나 '양반' 같은 단어에는 가타카나로 한글식 발음표기를 철저히 하여, 원작의 늬앙스를 살림과 함께 일본 독자가 읽기 싶도록 나름대로 궁리를 꾀했다는 점이다."
<토지> 번역출판, '절반'의 성공과 남겨진 과제
- 출판과정 중의 애로사항은 무엇이었나.
"원작 <토지>에는 이른바 '차별어'나 현란한 욕설이 빈출한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토지>가 쓰여진 한국의 출판문화를 고려하면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토지>가 리얼리티를 갖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도 생각하는데, 이른바 '차별어' 사용 제약이라는 일본의 출판문화때문에, 아쉽게도 원작의 맛을 일본어판에서는 충분히 살리지 못한 부분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최참판가의 재산을 탈취하는 몰락 양반 '조준구'의 아들 '병수'가 '꼽추'로 묘사되는데, 일본에서는 출판물에 있어서 '꼽추'의 일본어 사용이 곤란한지라, '장해자'란 표현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그밖에 원작의 '병신', '미친놈', '미친년' 등 도 직역 대신 완곡한 표현으로 대체하였다."
- 담당 편집자로서 원작 <토지>와 고단샤판 <토지>를 비교하자면.
"앞서도 언급했지만 고단샤판 <토지>는 한국의 청소년판 <토지>를 저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청소년판 <토지>의 한계를 그대로 이어받는 구조이다. 분량을 대폭으로 축소하다보니 청소년판 <토지>에서는 아예 등장조차 못한 캐릭터도 있다. 나 같은 경우 한국어가 서툴러 아직 원작을 읽진 못하고 있지만, 주변 관계자들의 말을 빌려 예를 들자면, 원작 제 1부에 '윤보'라는 목수가 등장한다. 그는 평사리 주민들과 함께 지리산에 입산하여 사실상 의병의 리더 역할을 하는 출중한 인물인데 전투중에 사망하여 지리산에 묻히게 된다. 제 1부를 끝으로 그는 과거의 인물이 되고 말지만, 2부 이후에도 평사리 출신의 농민들에게 회자되는 묵직한 캐릭터이다.
아마, 독자중에는 <토지> 전권(全卷)을 통틀어 가장 인상깊은 등장인물로 '윤보'를 꼽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매력적인 등장인물을 비롯, 원작자 박경리씨의 등장인물들의 예리하면서도 섬세한 심리묘사를 제대로 소개하지 못한 점과,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 반목에 이르기까지의 전개 과정을 대폭 간략화시킨 바람에 독자로 하여금 다소 생뚱맞은 인상을 갖게 했을 것이다. 이는 원작의 다이제스트판인 청소년판 <토지>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라 생각한다."
<토지>는 한국의 위대한 문학적 유산
- 담당 편집자로서 일본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토지>와 함께 원작자이신 고 박경리씨의 존재는, 이미 한국 문화의 일부가 되었고, 한국의 위대한 문학적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고단샤판 <토지>는 앞서 말한대로 여러 제약과 함께 적지 않은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이와 같은 대작을 일본의 독자에게 소개하는 일을 하게 되어 뿌듯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토지>의 의의를 일본인에게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 담당 편집자로서 안타까움도 크다.
예를 들자면, 한 15년쯤 후에 다이제스트판이 아닌 원작 <토지>를 우리 고단샤에서 과부족함 없이 번역출판할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대해본다. 한편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한류'에 심취하는 것만이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이해하는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의 독자가 <토지>를 통하여 다름아닌 일본 자신이 깊게 관여한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아픔을 알았으면 좋겠다."
인터뷰 마지막에 <토지>의 선전 광고가 미흡한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지적에 대하여 가타부치씨는 <요미우리신문> 등의 중앙일간지에도 수차례 싣었고, 자사가 발행하는 잡지에 정기적으로 광고를 게재하고 있다면서, "출판도 장사인 만큼 많이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토지>는 고인이 되신 작가가 장장 25년이란 시간을 들여 완성한 대작이니만큼 단기 승부보다는 향후 장기적으로 <토지>가 일본인에게 읽혀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1986년에 번역출판된 후쿠다케서점판 <토지> 제8권의 번역자 가마타 미츠토(鎌田光登)씨는, 번역자 후기에서 '<토지>의 구절구절에서 저자의 반일감정을 엿볼 수 있다'라는 자신의 독후감을 피력하고 있다. 이처럼 언뜻 보면 반일(反日)소설이란 '딱지'가 붙여지기 쉽상인 <토지>가, 2011년 이 시점에서 고단샤를 통해 번역출판되었다는 것은 자못 고무적인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가타부치씨와의 취재 인터뷰는 결과적으로 번역출판의 '절반'의 성공과 남겨진 과제의 의의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덧붙이는 글
* 기사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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