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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은 '슈퍼 갑'의 놀이문화 때문?

[서평] 가정, 직장, 국가의 위험한 성정치학 다룬 <섹슈얼리티는 장치학이다>

등록|2014.10.02 16:00 수정|2014.10.02 16:00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는 말이 있다. 한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 작은 일이 다른 편에서는 목숨까지 위협 당하는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리라. 성폭력·성상납·성희롱·성추행 등에서 이런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갑(남성·권력·상사)의 일방적인 놀이문화가 을(여성·하위직)의 죽음(혹은 매장)을 야기하는 예가 우리 사회에 적지 않다.

성을 공공연히 논한다는 게 쉽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여성학자 이성은은 <섹슈얼리티는 정치학이다>(서해문집 펴냄)에서 성의 일방적인 슈퍼 갑(남성·권력)에 대하여 을(여성·하위직)의 억울함과 함께 왜곡되고 잘못된 섹슈얼리티 담론을 분석한다.

저자는 책에서 "한국 사회의 성정치(권력관계로써의 성) 문화는 결혼제도에서 비롯되었다"며, 성에 있어 갑의 입장인 남성, 직장 상사와 권력에 대하여 상세하게 파헤친다. 직장 내에서 여성은 항상 남성위주의 놀이문화의 희생자이며, 정치·사회 권력도 성정치의 슈퍼 갑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가장 정치적인 합법적 섹슈얼리티

▲ <섹슈얼리티는 정치학이다> 표지 ⓒ 서해문집

우리나라에서 가장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섹슈얼리티는 결혼제도 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저자는 "가장 합법적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성관계가 가장 정치적이지 않을까?"라고 질문한다. 실제로 성인 14명을 인터뷰하고 결혼제도 하의 섹슈얼리티를 이야기한다.

부부의 성에 대한 생각은 천차만별이다. 결혼생활에 있어 남성은 여성에 비해 성적 쾌락을 우선시하는 게 맞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남자는 사랑하는 감정에 상관없이 아무나와 성관계가 가능하다"는 기존의 통념도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게 아니다. 만족스런 성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이혼 사유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스킨십이나 만족한 성생활이 행복도의 측청 기준이 되는 사람도 있지만, '섹스리스'이면서도 부부관계에 별다른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섹스리스 부부라도 결혼관계를 유지하려면 혼외정사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들은 아내에게 만족할 수 없을 때, 아니면 우리 사회의 왜곡된 회식문화 때문에 혼외정사를 즐기기도 한다.

한국 남성 한 명당 평균 한해 성매매 비용으로 31만 3000원을 지출하며, 성매매를 '조직 내 패거리 문화'로 여긴다. 인터뷰한 남성 7명 중 4명이 성매매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최초의 아시아 여성 대통령이 나온 나라지만, 성평등지수는 136개국 중 111위로 OECD국가 중에는 꼴찌다.

성을 둘러싼 이중 잣대가 합법적 섹슈얼리티를 정치적으로 만든다. '부부간의 성관계만이 합법적'이라는 규범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관계에 있어 약자인 아내가 만족스럽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결혼관계"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야말로 가장 섹슈얼리티가 위험하고 정치적인 데가 가정이다.

슈퍼 갑 권력의 위험한 섹슈얼리티

저자는 직장생활 경험을 가진 28명을 인터뷰하고 기업문화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위험한 섹슈얼리티를 조명한다. 또 조직이나 공무원 사회에서의 슈퍼 갑들이 벌이는 위험한 성적 유희를 점검한다. 2013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미국을 순방하는 중에 대통령을 수행했던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미대사관 인턴직원 성희롱 사건은 그 대표적 케이스다.

"권력을 가진 고위공직자 남성이 권력 없는 비정규직 여성을 성희롱한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위계적인 조직문화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중략) 한국의 조직에서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주로 성희롱 피해자가 되는 것처럼, 유사한 맥락에서 대사관의 비정규직 여직원이었기에 피해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81족)

비교적 평등하다는 기업에서조차도 회식문화는 여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 직원들에 의해 '노리개'쯤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국회직원들은 한결같이 "대한민국 국회가 위계적·보수적·권위적인 조직문화"라고 입을 모은다는 점이다. 이런 국회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입법을 실현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게 한다.

로즈마리 프링글의 표현처럼, '오피스 와이프'의 기능을 요구받는 여성차별은 임금격차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남성에 비해 37% 낮은 임금을 받고, 관리자는 10.9%밖에는 안 된다. 여성은 대부분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채용에서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데 뚱뚱한 체형의 여성은 아예 취직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박근혜 정부의 '시간제 일자리창출 정책'은 "신자유주의 동력은 더 많은 여성들을 비정규직"으로 내몰고 있다는 점을 반증한다. 비정규직 여성들이 직장이나 조직의 상사로부터 성적 학대(성희롱, 성상납, 성폭행 등)를 견뎌내기 힘들다. 자신이 당한 성적 모욕을 항의하면 일자리를 잃거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1993년 서울대 조교 성희롱사건 이후 20여년 동안 조직내 성폭력문제에 저항해보기도 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법체계도 만들고,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바꾸고 미리 예방하자는 취지에서 성희롱예방 교육도 실시해 왔지만, 여전히 슈퍼 갑이 휘두르는 성희롱·성상납·성매매라는 위험한 섹슈얼리티의 피해로 울부짖는 피해자 을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만난다."(161쪽)

슈퍼 갑의 횡포는 1992년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을 필두로 사회에 부각되었다. 14년 후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대사관 인턴직원 성희롱 사건은 다시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군대나 국회, 정부기관 등에서 공직자들의 성희롱 사건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 강용석 전 의원,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여성비하발언, 최연희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성추행 파문, 우근민 전 제주도지사의 성희롱 사건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최근에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캐디 성추행 사건도 벌어졌다. 운창중과 박희태 성추행 사건을 두고 임창용 인제대 교수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인턴과 골프장 캐디에게 성추행을 시도한 권력형 성범죄자 유형"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두고 "슈퍼 갑의 위력 덕분"이라고 말한다.

고 장자연 사건은 슈퍼 갑의 위험한 놀이문화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노리개>(2012, 최승호 감독)로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배우였던 장자연이 2009년 3월 7일, 영화감독, PD 등의 슈퍼 갑들의 성상납 강요를 참지 못해 자살한 사건이다.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끝났지만 사회적 파장은 컸다.

박근혜 정부는 사회의 4대악(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불량식품) 근절을 외쳤다. 그러나 김학의 전 차관의 특수강간사건조차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제 2, 3의 윤창중, 김학의, 박희태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란 법이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대한민국은 슈퍼 갑들의 위험한 섹슈얼리티에 속수무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섹슈얼리티는 정치학이다>(이성은 지음 / 2014. 9. / 서해문집 펴냄 / 1만5천원 /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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