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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가 만약 '경제'에 눈을 돌렸다면...

[서평] 김정훈 교수의 <왜 노무현은 성공했는데 안철수는 실패했을까?>

등록|2015.02.08 15:52 수정|2015.02.08 15:53
"아침에 갤럭시 알람에 깨어나 삼성 전자렌지에 햇반을 데우고, 지펠에서 스팸을 꺼내 삼성 가스렌지에 굽는다. 아침을 먹으며 삼성 스마트 TV를 켜 검색을 하면서 배달된 중앙일보를 읽는다.

나의 애마 SM3를 타 시동을 걸면서 허각의 노래를 들으며, 오늘의 첫 번째 행선지 성균관대 도서관으로 가 자료를 찾아, 삼성복사기에 한솔종이로 프린트를 한다.

다행히 일이 일찍 끝나 약속 장소인 삼성타운에서 친구를 제 시간에 태우고, 가까운 VIPS에서 점심을 먹는다. 지난주에 갔던 에버랜드 이야기, 이번 주 삼성라이온즈와 수원 삼성의 성적 이야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CGV에서 영화를 보기로 한다.

신세계에 들러 친구 생일선물로 빈폴을 사주고, 이마트에 들러 다음 주 일용할 양식을 사니 벌써 하루해가 넘어가고 있다.

집에 가려는데 갤럭시가 울리고, 친구가 늦게 알려 미안하다면서 부친상을 알려온다. 오늘밖에 시간이 없어 차에 둔 로가디스 검은 색 정장으로 상의만 갈아입고 차를 돌려 삼성병원 장례식장에 잠깐 들리고 나의 집, 래미안으로 돌아온다."

'삼성공화국'을 넘어 '민주공화국'으로

▲ <왜 노무현은 성공했는데 안철수는 실패했을까?> 표지 ⓒ 글바당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인 사회학자 김정훈이 <왜 노무현은 성공했는데 안철수는 실패했는가?>라는 책에서 재벌의 나라에서 하루의 일과를 그럴 듯하게 그린 내용이다(본문 187~188쪽).

우리는 재벌의 나라, 족벌의 나라에서 산다. '삼성공화국'의 지배에 놓여있다. 아니라고 몸부림치며 부인해도 어느새 그 '공화국'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 안락해한다.

'창조적 경제'라는 그럴 듯한 프레임에 걸려들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나라의 자화상이 이렇다. 신자유주의는 그 뜻의 이해를 넘어 '삼성공화국'으로 대별되는 재벌체제의 해체능력도 의지도 없다. 애플은 햄버거 장사를 하지 않는데, 삼성은 IT의 대부로써는 체면이 서지 않는 골목상권까지 점령하려고 들고 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재벌은 불공정거래를 통해 몸집을 불렸다. 그것은 대부분 내부자 거래라는 아이템으로 시작된다. 공정과 불공정의 싸움, 신자유주의와 반신자유주의의 싸움이 우리의 경제 분야에 존재한다. 이 싸움에서 반신자유주의가, 공정이 승리할 때 기어이 경제에도 '민주공화국'이 수립되는 것이다.

저자의 이와 같은 논리에 모두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재벌은 유례가 없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해체 역시 어렵다. 실은 민주화의 물결을 주도한 두 전직 대통령, 김대중·노무현 시대에도 다루지 못했다. 아니 노무현 시대는 '삼성공화국' 전성기였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현 '삼성공화국' 시대는 양극화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양극화가 일탈로 가면 '묻지 마 범죄'가 양산될 수 있다. 극빈층은 자살이라는 극단을 선택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상대적 빈곤층인 노인층 자살률 세계 1위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보수정당을 지지한다. 저자는 이를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본다.

안철수, 경제적 진보성 보이지 못했다

막연한 보수에의 동정이나 향수가 그 배후에 있다. 이른바 박정희 향수다. 독재였을지는 모르지만 경제부흥을 이뤘다는. '창조경제론'이란 어울리지 않는 이슈를 들고 나와 당선됐을지는 모르지만, 박근혜는 박정희의 연장선상에 있다. 저자는 이를 진정한 보수라기보다 보수를 가장한 반공주의·친미주의·친일주의라고 말한다.

역설적인 것은 가난한 노인들이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점이다. 가난한 사람은 태생적으로 진보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율배반적으로 노인층과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를 지지한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 연구소장은 한국의 노인 자살률이나 빈곤율이 OECD 최고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노인 세대는 박정희 시대를 경험했다. 보릿고개를 없애는 일은 이승만은 물론 병자호란 이후 300여 년간 조선의 집권세력이었던 노론도 못한 일이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에 이것이 바뀌었다. 철들 무렵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당시 경험이 평생을 간다."(<시사IN> 2015년 2월 4일 치)

이철희나 저자 김정훈은 이런 면에서 맥이 같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저자의 논리대로 상식이 아닌 것이다. 저자는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보수는 비상식적이라고 꼬집는다. 박근혜가 '창조적 경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그렇다. '창조적 진보세대'와는 어울리지도 않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주역이 '창조경제'란 용어를 쓴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창조적 진보세대'는 상식·합리성·다양성·창조성 그리고 공정경쟁과 보편적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이미 세대는 보수와 진보를 넘어 '창조적 진보세대'에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이들에게 '창조경제'는 그럴 듯한 단어다. 하지만 그것을 이룰 능력이 박근혜 정부에는 없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안철수가 실패한 요인도 이런 면에서 찾는다. '새 정치'는 '새 경제'여야 했다. 그러나 안철수에게는 그게 없다. 노무현과 안철수는 상식의 대변자였다. 2002년 노무현은 상식과 탈권위주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2012년 안철수는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경제적 진보성이 필요했다.

안타깝게도 안철수에겐 그게 없었다. 창조적 진보세대는 의원 정족수 축소나 지방선거 무공천과 같은 정치제도개혁이 아니라 경제적 진보의 정체성을 드러냈어야 했다. 저자는 정치는 서툴지만 경제 분야에서는 성공한 안철수가 경제 분야의 민주화를 들고 나왔다면 성공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다소 논리적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박근혜가 '창조경제'란 단어만으로도 먹힌 걸 보면 그냥 넘길 논리만은 아니다.

보수는 염치가 없고 진보는 눈치가 없다

저자는 이미 세상은 변했다고 한다. 정치가 변할 차례라고 한다. 부정적 정치담론을 긍정적 정치담론으로 이끌고 간다. 절망 속에서 자라나는 희망의 근거가 '창조적 진보세대'의 탄생이라고 한다. 2040세대로 우리 사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라고 본다. 보수세력이 이들을 '종북' 혹은 '좌파'라고 밀어붙이지만, 엄연히 현 사회의 주도세력이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의 세대갈등, 이념논쟁, 정치개혁, 정보화 문제, 갑을문제 등을 기존의 시각을 끌어안으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정치·사회의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보수는 이런 세대변화를 모르고 염치없게도 '낡음'에 머물러 있다. 진보 또한 이런 세대변화에 눈치를 못 채고 있다.

저자는 엄밀한 의미로 우리나라 여당은 극우일 뿐이고, 야당은 보수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그러니까 진정한 '창조적 진보세대'를 공유할 정당이 없는 것이다. 정치가 '공감의 정치' '생활 정치'를 하지 못하는 이유의 설명으로는 공감이 간다. 이제 세대가 변한만큼 과거의 정치 프레임에서 벗어나 보수는 염치를, 진보는 눈치를 채야 한다.
덧붙이는 글 <왜 노무현은 성공했는데 안철수는 실패했을까?>(김정훈 지음 / 글바당 펴냄 / 2015. 1 /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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