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네이터 씨앗'을 아십니까?
[책 뒤안길] 종자 주권과 생물 다양성 다룬 <씨앗을 부탁해>
농사꾼은 아니지만 농촌에 살다 보니 빈 땅이 있으면 무엇이든 심고 싶어진다. 어느 해 힘겹게 아내와 둘이 마당 한 귀퉁이를 삽으로 갈아 채소를 심어 먹었다. 그때부터 이 빈터는 우리 집 공식 터앝이 되었다.
이 밭 아닌 밭을 갈아 주는 너른 맘씨의 이웃이 생기고부터다. 이웃은 자기 밭을 갈 때 곁들여 우리 집 빈터를 갈아준다. 올해는 이웃이 비닐까지 씌워줘 우리 집 작은 터앝에서 고구마와 가지, 고추 그리고 토마토가 튼실하게 여물어가고 있다. 고구마야 줄기를 사다 꽂아놓으면 되고 가지, 고추, 토마토는 모종을 사다 심었으니 씨앗으로 시작한 작물은 없다.
종자가 못 되는 씨앗, 종묘회사들의 음모
하지만 이 빈터에 무와 배추를 심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씨앗을 종묘상에서 사다 심었다. 그런데 알타리무도 그렇고 얼갈이배추도 그렇고 씨앗이 희한하다. 고운 하늘색 빛깔이 너무 아름다웠다. 내가 어렸을 적 보았던 무씨나 배추씨가 아니라서 종묘상 주인에게 물었다.
"이게 왜 이래요? 무씨와 배추씨 맞아요? 제가 아는 씨앗 색깔이 아닌데요?"
"네, 맞아요. 요샌 다 그렇게 나와요. 뭔 처리를 했다고 하던데. 농약이 묻어서 그런 색깔이 나는 거예요. 약품 처리를 했기 때문에 병충해에도 강하고 맛도 좋아요."
그때는 병충해에도 강하고 맛도 좋다는 말이 그렇게 은혜롭게 들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씨앗은 발아할 수 있는 종자가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자고로 씨앗을 땅에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 꽃을 피워야 한다. 하지만 종묘회사에서 조작한 씨앗은 한해살이만 가능하다. 씨앗을 받을 수도 없고 혹 씨앗을 받았다 해도 발아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 어머니의 농사법은 달랐다. 무를 가을 내 놔두면 쫑이 나고 꽃이 핀 후 알알이 씨앗을 맺었다. 그 씨앗을 받아 고이 싸두었다가 오는 봄에 땅에 뿌렸다. 그렇게 순무랑 배추 등을 키워 먹었다. 지금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 모든 씨앗은 종묘상이 아니면 구하기 힘들다. 종묘상의 씨앗은 약 처리를 해 다음해를 기약할 수 없다.
여기에 글로벌 기업인 대형종묘사의 음모가 있다. <씨앗을 부탁해>는 농부의 농사법을 완전히 갈아치운 대형종묘회사들의 음모를 알려준다. 몬산토, 카길 등 대형종묘회사들은 더 이상 식물에서 씨앗을 채취할 수 없게 만들고, 씨앗을 사다 심는 시스템을 통하여 폭리를 취한다.
다산 정약용은 <이담속찬>에 '농부는 굶어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고 썼다. 하지만 현대의 농부는 베고 죽을 씨앗도 없다. 모든 씨앗은 씨앗을 독점한 종묘회사들의 창고에만 있다. 종자 주권을 상실한 채 농사를 짓는 게 현대 농부의 현실이다.
'금값'이란 말이 있다. 배추가 흉년인 해는 '배추가 금값'이라고들 떠든다. 하지만 금값보다 더 비싼 씨앗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다. 금 한 돈(3.75g)은 18만 원 정도다. 그런데 파프리카 씨앗은 금 한 돈 무게인 3.75g에 최대 45만 원이나 한다. 금 두세 배가 되는 꼴이다.
종자가 산업 논리에 묻혀 사라지고 있다
파프리카는 토종이 아니니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토종인 청양고추는 좀 다르다. 하지만 청양고추나 토마토 등 토종들이 이미 외국 회사의 손아귀에 넘어간 상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물이라고 여기는 청양고추 씨앗도 미국 종묘회사인 몬산토에서 해마다 로열티를 내고 사오고 있어요. 그 씨앗을 처음 개발했던 중앙종묘라는 회사가 몬산토에 팔려 버렸기 때문이지요. (중략) 로열티는 어느덧 200억 원이 넘는다고 해요. 2001년에 5억 원 정도이던 것이 2020년 무렵이 되면 3000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요."- 본문 29, 30쪽
예전에는 우리나라에도 작은 종묘회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글로벌 자본에 거의 잠식된 상태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토종인 농산물을 외국 기업에서 사오는 사태가 벌어지고, 토종을 심고도 로열티를 지불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하루아침에 씨앗이 '상품'으로 둔갑한 것이다. 더군다나 많은 토종 작물들이 씨앗을 남기지 못한 채 하나 둘씩 잊히거나 사라져 가고 있다.
'터미네이터 씨앗'이란 말을 들어 보았는가. 영화 <터미네이터>(1984, 제임스 카메론 외)에서 기계인간 터미네이터는 사람을 위협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스스로 용광로로 들어가 사라지게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F1 씨앗'이라고 해서 1대 잡종씨앗으로만 존재하고 2대는 생산할 수 없게 만든 씨앗을 '터미네이터 씨앗'이라고 한다.
종묘회사는 왜 아예 씨앗을 싹조차 틔우지 못하게 만들까. 당연히 돈 때문이다. 한 씨앗으로 2세대, 3세대가 나온다면 돈벌이가 안 된다. 자연의 이치가 경제논리,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참극이 바로 종묘산업의 현주소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의 농사는 종묘회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씨앗을 부탁해>는 '왜 우리 씨앗을 외국 회사에서 사야 할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책은 우리의 농사가 외국회사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무얼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종자 주권의 현실이 기가 막히지만 우리는 생물종 다양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토종 씨앗이 지닌 참 가치를 발견하고 보존해야 한다. 현재의 비극은 생물 다양성을 무시한 결과다.
단일 품종 위주의 농사를 지양하고,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위험성을 감지해야 한다. 불암배추나 관동무 같은 토종 씨앗들이 하루아침에 외국 기업에 종속된 '상품'이 되어 버렸다. 지금이라도 식물군을 다양화하고 손쉬운 농법을 따르기보다 재래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토종을 지켜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책은 단일종을 키우다가 전염병으로 사라진 아일랜드의 감자를 예로 들며, 멸종 위기에 처한 캐번디시 바나나, 통일벼의 흉년으로 인해 당했던 우리나라의 경제위기 등을 짚어주고 있다. 반대로 종자를 모아 보존하다 굶어죽었던 러시아의 바빌로프 연구소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농부는 굶어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는 정약용의 말을 상기시킨다.
책은 바빌로프 연구소 사람들이나 토종 씨앗 살리기인 '나브다냐 운동'을 벌였던 인도의 반다나 시바를 통해 농업의 방향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씨앗에서 씨앗으로, 농부로부터 농부에게'라는 슬로건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책을 다 읽고 보니, 무씨와 배추씨가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내 무지가 몹시 부끄러웠다.
이 밭 아닌 밭을 갈아 주는 너른 맘씨의 이웃이 생기고부터다. 이웃은 자기 밭을 갈 때 곁들여 우리 집 빈터를 갈아준다. 올해는 이웃이 비닐까지 씌워줘 우리 집 작은 터앝에서 고구마와 가지, 고추 그리고 토마토가 튼실하게 여물어가고 있다. 고구마야 줄기를 사다 꽂아놓으면 되고 가지, 고추, 토마토는 모종을 사다 심었으니 씨앗으로 시작한 작물은 없다.
종자가 못 되는 씨앗, 종묘회사들의 음모
▲ <씨앗을 부탁해> (김은식 글 / 임종길 그림 / 나무야 펴냄 / 2016. 5 / 157쪽 / 1만2000 원) ⓒ 나무야
"이게 왜 이래요? 무씨와 배추씨 맞아요? 제가 아는 씨앗 색깔이 아닌데요?"
"네, 맞아요. 요샌 다 그렇게 나와요. 뭔 처리를 했다고 하던데. 농약이 묻어서 그런 색깔이 나는 거예요. 약품 처리를 했기 때문에 병충해에도 강하고 맛도 좋아요."
그때는 병충해에도 강하고 맛도 좋다는 말이 그렇게 은혜롭게 들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씨앗은 발아할 수 있는 종자가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자고로 씨앗을 땅에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 꽃을 피워야 한다. 하지만 종묘회사에서 조작한 씨앗은 한해살이만 가능하다. 씨앗을 받을 수도 없고 혹 씨앗을 받았다 해도 발아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 어머니의 농사법은 달랐다. 무를 가을 내 놔두면 쫑이 나고 꽃이 핀 후 알알이 씨앗을 맺었다. 그 씨앗을 받아 고이 싸두었다가 오는 봄에 땅에 뿌렸다. 그렇게 순무랑 배추 등을 키워 먹었다. 지금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 모든 씨앗은 종묘상이 아니면 구하기 힘들다. 종묘상의 씨앗은 약 처리를 해 다음해를 기약할 수 없다.
여기에 글로벌 기업인 대형종묘사의 음모가 있다. <씨앗을 부탁해>는 농부의 농사법을 완전히 갈아치운 대형종묘회사들의 음모를 알려준다. 몬산토, 카길 등 대형종묘회사들은 더 이상 식물에서 씨앗을 채취할 수 없게 만들고, 씨앗을 사다 심는 시스템을 통하여 폭리를 취한다.
다산 정약용은 <이담속찬>에 '농부는 굶어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고 썼다. 하지만 현대의 농부는 베고 죽을 씨앗도 없다. 모든 씨앗은 씨앗을 독점한 종묘회사들의 창고에만 있다. 종자 주권을 상실한 채 농사를 짓는 게 현대 농부의 현실이다.
'금값'이란 말이 있다. 배추가 흉년인 해는 '배추가 금값'이라고들 떠든다. 하지만 금값보다 더 비싼 씨앗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다. 금 한 돈(3.75g)은 18만 원 정도다. 그런데 파프리카 씨앗은 금 한 돈 무게인 3.75g에 최대 45만 원이나 한다. 금 두세 배가 되는 꼴이다.
종자가 산업 논리에 묻혀 사라지고 있다
파프리카는 토종이 아니니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토종인 청양고추는 좀 다르다. 하지만 청양고추나 토마토 등 토종들이 이미 외국 회사의 손아귀에 넘어간 상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물이라고 여기는 청양고추 씨앗도 미국 종묘회사인 몬산토에서 해마다 로열티를 내고 사오고 있어요. 그 씨앗을 처음 개발했던 중앙종묘라는 회사가 몬산토에 팔려 버렸기 때문이지요. (중략) 로열티는 어느덧 200억 원이 넘는다고 해요. 2001년에 5억 원 정도이던 것이 2020년 무렵이 되면 3000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요."- 본문 29, 30쪽
예전에는 우리나라에도 작은 종묘회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글로벌 자본에 거의 잠식된 상태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토종인 농산물을 외국 기업에서 사오는 사태가 벌어지고, 토종을 심고도 로열티를 지불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하루아침에 씨앗이 '상품'으로 둔갑한 것이다. 더군다나 많은 토종 작물들이 씨앗을 남기지 못한 채 하나 둘씩 잊히거나 사라져 가고 있다.
'터미네이터 씨앗'이란 말을 들어 보았는가. 영화 <터미네이터>(1984, 제임스 카메론 외)에서 기계인간 터미네이터는 사람을 위협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스스로 용광로로 들어가 사라지게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F1 씨앗'이라고 해서 1대 잡종씨앗으로만 존재하고 2대는 생산할 수 없게 만든 씨앗을 '터미네이터 씨앗'이라고 한다.
▲ 약 처리를 한 알타리무의 씨앗이 연한 하늘색을 띠며 아름다워 보인다. ⓒ 김학현
종묘회사는 왜 아예 씨앗을 싹조차 틔우지 못하게 만들까. 당연히 돈 때문이다. 한 씨앗으로 2세대, 3세대가 나온다면 돈벌이가 안 된다. 자연의 이치가 경제논리,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참극이 바로 종묘산업의 현주소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의 농사는 종묘회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씨앗을 부탁해>는 '왜 우리 씨앗을 외국 회사에서 사야 할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책은 우리의 농사가 외국회사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무얼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종자 주권의 현실이 기가 막히지만 우리는 생물종 다양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토종 씨앗이 지닌 참 가치를 발견하고 보존해야 한다. 현재의 비극은 생물 다양성을 무시한 결과다.
단일 품종 위주의 농사를 지양하고,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위험성을 감지해야 한다. 불암배추나 관동무 같은 토종 씨앗들이 하루아침에 외국 기업에 종속된 '상품'이 되어 버렸다. 지금이라도 식물군을 다양화하고 손쉬운 농법을 따르기보다 재래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토종을 지켜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책은 단일종을 키우다가 전염병으로 사라진 아일랜드의 감자를 예로 들며, 멸종 위기에 처한 캐번디시 바나나, 통일벼의 흉년으로 인해 당했던 우리나라의 경제위기 등을 짚어주고 있다. 반대로 종자를 모아 보존하다 굶어죽었던 러시아의 바빌로프 연구소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농부는 굶어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는 정약용의 말을 상기시킨다.
책은 바빌로프 연구소 사람들이나 토종 씨앗 살리기인 '나브다냐 운동'을 벌였던 인도의 반다나 시바를 통해 농업의 방향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씨앗에서 씨앗으로, 농부로부터 농부에게'라는 슬로건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책을 다 읽고 보니, 무씨와 배추씨가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내 무지가 몹시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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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