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피난민 수백 명에 네이팜탄 폭격, 곡계굴의 비극

[박만순의 기억전쟁] 마지막 생존자 조봉원의 '단양 곡계굴 사건' 증언

등록|2018.03.03 11:20 수정|2018.03.03 11:20

곡계굴 입구곡계굴 입구에 선 조병규 회장 ⓒ 박만순


투두둑... 한두 방울 내리던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비는 이내 추륵추륵 쏟아졌다. "오매 뭔 놈의 봄비가 한여름 장마비처럼 쏟아진댜" 평년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쏟아진 1951년 4월 이날의 봄비는 영춘면 상2리에 있는 곡계굴을 가득 채웠다. 굴 입구에는 '쿨럭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빗물이 굴 안으로 쉼 없이 쏟아져 들어갔다.

몇 시간 후 빗물이 굴을 가득 채우자 거꾸로 굴 안에 있던 빗물이 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물만 나오더니 이윽고 숟가락, 그릇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타다 남은 이불 쪼가리를 비롯한 가재도구가 나왔다. 사람이 과음으로 토해서 이물질이 나오듯이 굴이 온갖 물건과 쓰레기들을 토해냈다. 물건들은 곡계굴 앞의 또랑을 통해 마을 주변으로 쏟아졌다.

동네 개들이 신이 났다. 오랜만에 봄비가 오니까 자기들 세상을 만난 양 뛰어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뛰어다니는 개의 입에 뭔가 커다란 물건이 물려 있었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쳤다. 그런데 한 마리의 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마리의 개가 입에 무언가를 물고 다니며 뛰어다니기 바빴다. 여러 마리 개가 그렇게 다니자 마을 사람들은 개들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조봉원(당시 17세) 역시 개가 물고 다니는 것이 궁금해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조봉우는 '악'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개가 물고 다닌 것은 '당숙모'의 머리였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 상황은 비단 조봉우에게만 닥치지 않았다. 상2리 마을 사람 몇몇은 개가 물고 다니는 것이 자신들의 어머니 머리임을 확인하고 기절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합심해서 한나절 동안 개들을 쫓아다녀 개 입에서 사람 시신을 빼앗았다.

서울에서 온 여고생도 있어

굴 입구에 있던 밭은 수 백 명의 주민과 피난민이 드나들어 반질반질했다. 조봉원은 허리를 숙여 굴로 들어갔다. 앞이 캄캄해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어둠이 눈에 익어 앞으로 향하니 시커먼 물체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굴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치 기차 안 의자에 길게 앉아 있는 듯 했다. 중간 중간 호롱불이 그림자를 형성하며 켜져 있었다. 바닥에는 멍석과 보리 짚으로 엮은 자리 등이 깔려 있었다.

또한 피난 온 주민들이 가져 온 이불도 보였다. 이외에도 솥이며 냄비 등이 바닥 곳곳에 널려 있었다. 조봉규는 1951년 1월 19일 이 굴에 첫발을 디뎠지만 일찌감치 피난 온 이들은 벌써 열흘째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곡계굴은 마치 천연요새 같았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은 원래 단양에서도 오지였고, 특히 상2리에 있는 곡계굴은 외지인들이 거의 모르는 곳이었다. 석회암굴인 이 곳의 입구는 협소하지만, 안은 매우 넓어 수 백 명이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이유로 겨울 난리 때인 1951년 1월 중공군의 남하소식에 따라 주민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했다.

이 굴에는 영춘면 상리 주민들뿐만 아니라 영월과 평창에서 온 피난민들로 꽉 차 있었다. 조봉원이 굴 안으로 갔을 때 초등학교 동창을 보았고, 서울에서 온 여고생도 보였다.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지슬>에 보면 비슷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제주 4.3사건 때 한국군이 폭도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주민 약 120명은 안덕면 동광리에 소재한 '큰넓궤(큰 동굴이라는 뜻의 제주어)'에서 1948년 11월부터 50~60일간 숨어 있었다. 감자(지슬)를 먹고 연명하다 국군에 의해 전원 몰살한 비극의 현장이 '큰넓궤'였다. 곡계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불에 번진 네이팜탄으로 300여 명이 목숨을 잃어

네이팜탄 부상자네이팜탄으로 부상을 입은 여인들. 1951년 4월 수원(출처: 박도 사진집) ⓒ


곡계굴에는 중공군의 남하소식에 피난 온 사람들 300여 명이 있었다. 이들은 이 굴이 안전한 피난처일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 더 남쪽으로 피난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조봉원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다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에서 미군에 의해 저지를 당한 것이다. 미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피난민들을 일일이 조사해, 군·경 가족이거나 공무원이 아니면 통과시키지 않았다. 피난민중에 오열(간첩)이 끼어 있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공무원, 경찰 방위대원 등은 무사통과였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보고서-단양 곡계굴 미군폭격사건>)

미 제7사단 17연대는 육·공군 합동작전으로 영춘면과 곡계굴 일대를 초토화시키기로 결정했다. 북한군이 영춘면 산악지대와 곡계굴에 은닉해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진실로 오인한 것이다. 1951년 1월 20일 미군은 13대의 폭격기를 이용해 영춘면과 곡계굴에 집중 폭격했다. 네이팜탄이 집중 투하되었으며, 특히 굴 입구는 기총소사를 하기도 했다. 상2리 50호가 한 집을 제외하고는 전소되었다. 굴 입구는 네이팜탄의 투하로 인해 불바다가 일렁거렸다. 불바다는 바람을 타고 굴 안으로 진군했다. 불바다는 굴 입구에 있던 이불과 멍석, 보리 짚에 닿자 시커면 연기를 내며 굴 안을 모두 태우기 시작했다.

굴 입구에 있던 사람 일부가 굴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굴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불은 급속히 번졌고, 시커먼 연기는 바람 따라 굴 안을 휘저었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나고, '콜록 콜록'하는 기침소리가 났다.

조봉원은  순간적으로 굴 밖으로 나가야 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연기로 인해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엉금엉금 기어서 움직였다. 그런데 이미 바닥에는 불에 타고 연기에 질식해 죽기 직전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나는 가요", "하느님 아버지 시원한 공기 한 모금만 주세요"라고 울부짖고 기도했다. 수 백 명의 울부짖음을 뒤로 하고 굴 밖으로 나왔을 때 조봉원은 기진맥진해 정신을 잃었다.

이날 미군 폭격과 기총소사로 목숨을 잃은 이는 약 300여명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곳에서 최소 167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주민들이 주장하는 숫자와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타지에서 피난 온 주민들이 모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엄한원 가족 피해현황엄한원씨 가족의 피해현황 ⓒ 박만순


김○○ 조○○ 윤○○ 

곡계굴 입구에는 '통한의 곡계굴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위령비 뒷면에는 당시 억울하게 죽은 167명의 사망자 명단이 실려 있다. 167명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피해자로 인정한 이들이다. 그런데 이 비석에 김○○, 조○○, 윤○○이 있다. 이들은 사망 당시 나이가 1~3세로 이름이 없었던 아기들이다. 당시에는 영아사망률이 높아 보통 3~4세 이전까지는 이름을 짓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영춘면 상리는 쑥대밭이 되었다. 한 집에서 3~4명이 죽은 것은 보통이고, 엄한원씨의 경우처럼 10명이 죽은 집도 있었다. 엄한원(1935년생. 2014년 작고)씨는 당시 사건으로 어머니 윤옥란과 누나 엄재순, 매형 신경환을 잃었다. 또한 이름도 없는 조카 2명(3세, 1세)이 불에 타 죽었다.

굴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조봉원(84세. 제천시)씨는 "아버지 조부동, 여동생 조순자, 조카 조병인, 수양동생 신용집이 죽었어요. 아버지는 다리가 모두 타버려 상체만 남았었죠. 나는 굴에서 살아나왔지만 평생을 병치레하고 있습니다"라 한다. 조봉원은 기관지염과 천식으로 80평생 고생을 하고 있고, 사건 이후 술, 담배를 일절 하지 않고 있다.

조봉원증언자 조봉원 ⓒ 박만순


호적 정리와 보상이 향후 과제

곡계굴 사건은 2008년 정부에 의해 조사되었고, 피해자 167명의 명단도 나왔다. 이후 단양군에 의해 사건현장에 위령비가 세워졌고, 조만간 추모공원도 세워질 예정이다.

그런데 커다란 문제가 있다. '노근리사건'을 포함해 미군이 한국전쟁 때 저지른 민간인학살사건 모두가 보상 대상에서 빠져버린 것이다.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 '평화공원'이 만들어지고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공식 사과했지만, '미군 사건'은 전혀 보상되지 못했다. 즉 노근리는 집단보상(추모비 및 기념공원) 되었지만 유족에 대한 '개별보상'은 되지 못한 것이다.

곡계굴 사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곡계굴사건과 관련해서는 개별 보상 이전에 풀어야할 숙제가 있다. 바로 '호적정리' 문제다. 6.25 당시 미군 폭격으로 상2리 마을이 전소될 때 면사무소도 불에 타 버렸다. 이때 주민들의 호적장부도 불에 타 버린 것이다. 이후 일부 주민들의 경우 사실대로 사망 장소와 년도가 기록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기록되었다. 즉 호적 정리가 되지 못한다면, 보상에 혼란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단양곡계굴유족회 조병규(72세. 단양군 영춘면) 회장은 "첫째 호적정리가 시급합니다. 둘째 개별보상이 이루어져야 하고요. 마지막으로는 곡계굴 보상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하는데, 보상과 관련한 공소시효(소멸시효)가 없어져야 합니다"라고 주장한다.

67년 전 미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약 300명이 죽은 곡계굴 사건은 아직도 온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미군의 전쟁범죄는 전국에 곡계굴 사건을 포함해 170여 건이 존재한다. 이 많은 사건들이 진실화해위원회 말기에 대부분 '진실규명 불능'으로 처리되었다. 미군사건으로 인해 '개죽음'을 당한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은 언제나 이루어질까?

위령비통한의 곡계굴 위령비 ⓒ 박만순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