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살려달라" 했는데, 요양병원 알아보는 게 현실
죽을 고비 넘기고 다리 절단까지 하게 된 엄마를 돌볼 수 없는 자식들
작년 12월 5일 오전 집 전화로 대학병원에 와 있으니 와달라는 엄마의 부탁을 받았다. 두 아이의 학교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내며 '갈 테니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오랜 기간 앓아오신 당뇨 합병증으로 신장이 망가져 이틀에 한 번씩 혈액투석을 하신다. 그날엔 팔에 있는 혈액 투석로가 막혀 혈관을 뚫기 위해 대학병원 외래로 오셨다가 너무 힘이 들어 접수조차 하기 힘들다는 하소연이었다.
쇠약해진 몸으로도 아빠 밥도 해주시며 살림을 이끌어 가시는 건 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만 늘 병원에 다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지쳐 있었는지 짜증을 내 버렸다. 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접수를 하고 순서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오기 전 혼자 해보시려 움직이다가 그만 나동그라져 어깨가 아프다고 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와달라고 전화를 했으면 기다릴 것이지 그게 아니면 처음부터 혼자 하던가... 아이들 학교 행사도 취소하고 왔는데, 넘어져 아프다는 말에 그만 짜증이 솟구쳤다.
엄마 순서가 되어 혈관 시술을 하러 들어간 후 기다리는 다른 분들을 보니 늙은 아들이 꼬부랑 할머니를 모시고 온 사람도 있었고, 어린 손자가 힘없이 앉아있는 할아버지 곁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이도 있었다.
'우리 엄마만 혼자 왔구나...'
결혼한 딸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이 있다는 이유로 늘 당당한 나였다. 다른 친정엄마는 살림도 해주고 애도 키워주며 딸이 사회 생활할 수 있게 도와주는데 우리 엄마는 뭔가 원망 아닌 원망도 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병원에 같이 가 달라거나 집에 일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하면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더라도 속으로는 불평불만이 늘어가던 나였으니 말이다.
청천벽력같은 엄마의 '심근경색'
엄마보다 나중에 들어갔던 사람들도 모두 시술 마치고 나오는데 엄마만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고 간호사가 '안에 어느 환자분이 응급이 생겨서 그렇다'는 말이 들렸지만, 엄마는 아니겠지 생각했다. 멀쩡히 걸어서 시술실로 들어가셨으니까.
한참이 지났는데도 엄마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이제 곧 나오실 거라며 바쁘게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엄마가 나왔다. 가쁘게 숨을 쉬며 코와 입에는 드라마에서 보던 산소마스크 같은 것이 끼워져 있었다. 너무 놀란 내가 다가갔는데도 딸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숨차 하셨다.
"우리 딸 어딨지. 우리 딸 어딨어요? 우리 딸..."이라고 외치시는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손을 잡고 있는데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내게 '우리 딸'을 찾고 계셨다. "엄마 나야, 엄마 딸이야"라고 손을 세게 흔들며 정신 차리라는 듯 외치자 "그래, 내가 너도 못 알아봤네. 우리 딸"이라며 내 손을 더욱더 세게 잡으셨다.
심장내과 교수님이 내려오셨고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신장 기능이 망가져 칼륨을 배출하지 못해서 심장이 안 좋아지신 것인지 다른 이유인지 일단 검사부터 해야 한다며 응급 엘리베이터를 타고 영상의학과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주치의 선생님이 나오셨고 급성 심근경색으로 심장의 혈관이 막혀 응급 처치를 했다고 하셨다. 눈앞이 노랗게 변했다. '심근경색'이라니. 엄마를 타박했던 나 자신이 미웠다. 엄마는 심근경색의 전조증상으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온 몸에 힘이 빠진 거다. 남자분들은 대부분 심장의 압박이 오지만 엄마같은 당뇨병 환자면서 여자분들은 어깨나 목 등의 통증으로 심근경색의 전조증상이 온다고 했다.
"어깨가 아프다"고 했던 엄마
엄마는 수술실에서 나와 중환자실에서 이틀을 집중 치료받고 괜찮으시면 일반실로 가신다고 했다. 다행히 의사소통 할 수 있었고 의사도 보호자는 집에 가도 된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심근경색으로 나는 다시 나긋나긋해졌다.
귀찮게 하는 엄마는 짜증이 났지만, 엄마 없는 세상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늘 엄마의 사랑과 도움을 받기만 하면서도 받지 못할 때는 투정을 부리던 어리석은 딸이 나다. 이제야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깨닫는다.
집에 도착해서 하루 동안의 긴장감이 풀리며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즈음,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가족분들은 지금 빨리 오시라고... 그리고 다른 친지분들께도 연락을 드리라고. 직감적으로 엄마에게 무슨 일인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새벽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중환자실 당직 의사는 벌써 7번의 심정지가 왔다며 자신이 자식이라면 부모님 더 힘들게 하지 않고 편히 보내드릴 거라고 했다. 내 눈치를 보며 연명 치료를 할 것인지 선택을 하라고. "싫어요, 싫어요. 선생님. 안돼요. 그럴 수 없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하며 의사 선생님께 매달린 것 같다. 그때의 내 모습이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살려달라며 울부짖은 기억 외에는.
환하게 동이 틀 무렵 엄마가 다시 안정을 찾았다며 당직 의사가 말해주었다. 하루 두 번 20분의 면회시간에 엄마를 봤을 때 말도 못 하고 의식도 없으셨고 기도삽관으로 기계 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의사 선생님은 그 모습이 안정을 찾은 거라고 했다. 손에는 많은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고 오르내리는 혈압 숫자 하나하나에 내 온몸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냥 이렇게라도 내 곁에 계셔 주셨으면.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었으면. 다시 일어나시면 여기저기 좋은 곳도 가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싶다고 대답도 없는 엄마에게 수없이 말했다. 기적이라도 일어났는지 엄마가 의식을 찾았다.
나와 예전처럼 얘기도 하고 삶은 달걀이 먹고 싶다며 식이제한 중인 중환자실에서 심통도 부리셨다. 아프다고, 배고프다고, 누워만 있는 중환자실이 갑갑하다고 짜증 내는 엄마를 보면서도 마냥 좋았다. 엄마가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이.
의식이 없으셨을 때 승압제(혈압을 올리는 약제)를 쓰면서 말초혈관이 괴사하여 발가락이 썩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담당 교수님은 그냥 두었다가는 독이 퍼져 생명이 위독해질 수 있어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하셨다. 또다시 위기가 닥쳤다. 다리가 없더라도 엄마의 생명이 중요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수술에 동의를 했고 엄마는 두 다리를 잃었다.
간병이라는 굴레
두 다리가 사라진 후 퇴원하고 집에 와서의 생활조차 암담했다. 누가 엄마를 돌볼 것인가.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실에서 다리 절단 수술을 할 때까지 두 달여를 오빠와 내가 번갈아 간호했다. 낮에는 내가 하고, 밤에는 오빠가 퇴근해서 간호했다. 약제 때문인지 오랜 기간 중환자실과 큰 수술을 겪으며 정신적인 충격으로 겪는다는 섬망(환자들이 겪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착란) 때문인지 헛소리를 시작하셨다. 그때부터 오빠와 나는 지쳐갔다.
처음 엄마가 쓰러졌을 때 이제부터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엄마에게 신경을 쓰고 일거수일투족 관심을 두자고 맹세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엄마에게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점점 지쳐가던 오빠와 나는 급기야 간병인을 쓰기로 했다. 자식들이 간병을 하니 아빠는 내심 안심을 하시고 좋아하시는 눈치셨는데 간병인을 쓴다니 실망하셨다. 그래도 가족이 해야지 남에게 맡기면 되겠냐며 계속 하기를 바라는 눈치셨지만 도저히 더 이상은 나도 오빠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결혼 생활을 하는 나는 남편도 있고 아이들도 있는데 내가 없는 동안 집은 개판이 돼버렸다. 남편이 매일 일찍 퇴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아이들은 챙겨주지 않으니 숙제도 제대로 하지 않고 시험도 엉망이었다.
간병인 아주머니는 복불복이라는데 엄마의 간병인 분은 좋은 분이었다. 운동도 시켜주셨고 간식도 챙겨주시고 말동무도 되어주시고. 그야말로 좋은 분이었다. 그리고 엄마와 같은 신씨라 언니동생하며 잘 지내주셨다.
엄마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병원에서는 퇴원을 하라고 하였다. 요양병원으로 갈 것인지 집으로 모시고 갈 것인지 정해야 했다. 그러나 선뜻 어느 하나 정해지지가 않았다. 요양병원으로 보내기엔 엄마가 너무 불쌍했고 집으로 모시고 가기엔 엄마의 상황이 누군가 24시간 붙어 있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시간이 되는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된다 한들 이제는 자신도 없었다. 처음에는 요양병원을 반대하고 집으로 모시자고 했던 오빠조차 두 달여의 병원 야간 간병을 하더니 요양병원이 전문적이고 의료진도 있으니 더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을 통해 세상밖으로 나온다.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혼자서는 절대 살아가지 못하는 아기가 기어다니고 앉고 걷고 뛴다. 유치원을 가고 학교를 가고 사회생활을 한다. 내가 내 아이를 낳아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처럼 나의 어머니도 나를 그렇게 길러 주셨다.
이제는 엄마가 아기가 되셨다. 자식인 내가 어릴 적 엄마처럼 엄마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럼에도 자식인 나는 당연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요양병원만을 검색하다 자괴감에 한숨을 짓기도 한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를 돌봐주셨던 엄마처럼 엄마가 좋아하는 봄꽃도 보여드리고 엄마가 좋아하는 잔치국수도 해 드리고 싶으면서도 자신이 없다. 두 아이를 기르는 나도 엄마인데도 말이다.
요양병원을 검색하다 읽은 어느 댓글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요즘은 요양병원에 부모님을 모시는 게 아니라 넣어두고 아주 가끔 들여다본 후 돌아가셨다 연락 오면 무덤덤하게 장례 치르는 게 무슨 공식 같다'고.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면서도 안타깝게 다가오는 오늘이다.
쇠약해진 몸으로도 아빠 밥도 해주시며 살림을 이끌어 가시는 건 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만 늘 병원에 다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지쳐 있었는지 짜증을 내 버렸다. 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접수를 하고 순서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오기 전 혼자 해보시려 움직이다가 그만 나동그라져 어깨가 아프다고 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와달라고 전화를 했으면 기다릴 것이지 그게 아니면 처음부터 혼자 하던가... 아이들 학교 행사도 취소하고 왔는데, 넘어져 아프다는 말에 그만 짜증이 솟구쳤다.
엄마 순서가 되어 혈관 시술을 하러 들어간 후 기다리는 다른 분들을 보니 늙은 아들이 꼬부랑 할머니를 모시고 온 사람도 있었고, 어린 손자가 힘없이 앉아있는 할아버지 곁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이도 있었다.
'우리 엄마만 혼자 왔구나...'
결혼한 딸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이 있다는 이유로 늘 당당한 나였다. 다른 친정엄마는 살림도 해주고 애도 키워주며 딸이 사회 생활할 수 있게 도와주는데 우리 엄마는 뭔가 원망 아닌 원망도 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병원에 같이 가 달라거나 집에 일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하면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더라도 속으로는 불평불만이 늘어가던 나였으니 말이다.
청천벽력같은 엄마의 '심근경색'
엄마보다 나중에 들어갔던 사람들도 모두 시술 마치고 나오는데 엄마만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고 간호사가 '안에 어느 환자분이 응급이 생겨서 그렇다'는 말이 들렸지만, 엄마는 아니겠지 생각했다. 멀쩡히 걸어서 시술실로 들어가셨으니까.
한참이 지났는데도 엄마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이제 곧 나오실 거라며 바쁘게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엄마가 나왔다. 가쁘게 숨을 쉬며 코와 입에는 드라마에서 보던 산소마스크 같은 것이 끼워져 있었다. 너무 놀란 내가 다가갔는데도 딸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숨차 하셨다.
"우리 딸 어딨지. 우리 딸 어딨어요? 우리 딸..."이라고 외치시는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손을 잡고 있는데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내게 '우리 딸'을 찾고 계셨다. "엄마 나야, 엄마 딸이야"라고 손을 세게 흔들며 정신 차리라는 듯 외치자 "그래, 내가 너도 못 알아봤네. 우리 딸"이라며 내 손을 더욱더 세게 잡으셨다.
심장내과 교수님이 내려오셨고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신장 기능이 망가져 칼륨을 배출하지 못해서 심장이 안 좋아지신 것인지 다른 이유인지 일단 검사부터 해야 한다며 응급 엘리베이터를 타고 영상의학과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주치의 선생님이 나오셨고 급성 심근경색으로 심장의 혈관이 막혀 응급 처치를 했다고 하셨다. 눈앞이 노랗게 변했다. '심근경색'이라니. 엄마를 타박했던 나 자신이 미웠다. 엄마는 심근경색의 전조증상으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온 몸에 힘이 빠진 거다. 남자분들은 대부분 심장의 압박이 오지만 엄마같은 당뇨병 환자면서 여자분들은 어깨나 목 등의 통증으로 심근경색의 전조증상이 온다고 했다.
"어깨가 아프다"고 했던 엄마
▲ 의식이 없으셨을 때 승압제(혈압을 올리는 약제)를 쓰면서 말초혈관이 괴사하어 발가락이 썩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 pixabay
엄마는 수술실에서 나와 중환자실에서 이틀을 집중 치료받고 괜찮으시면 일반실로 가신다고 했다. 다행히 의사소통 할 수 있었고 의사도 보호자는 집에 가도 된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심근경색으로 나는 다시 나긋나긋해졌다.
귀찮게 하는 엄마는 짜증이 났지만, 엄마 없는 세상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늘 엄마의 사랑과 도움을 받기만 하면서도 받지 못할 때는 투정을 부리던 어리석은 딸이 나다. 이제야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깨닫는다.
집에 도착해서 하루 동안의 긴장감이 풀리며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즈음,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가족분들은 지금 빨리 오시라고... 그리고 다른 친지분들께도 연락을 드리라고. 직감적으로 엄마에게 무슨 일인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새벽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중환자실 당직 의사는 벌써 7번의 심정지가 왔다며 자신이 자식이라면 부모님 더 힘들게 하지 않고 편히 보내드릴 거라고 했다. 내 눈치를 보며 연명 치료를 할 것인지 선택을 하라고. "싫어요, 싫어요. 선생님. 안돼요. 그럴 수 없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하며 의사 선생님께 매달린 것 같다. 그때의 내 모습이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살려달라며 울부짖은 기억 외에는.
환하게 동이 틀 무렵 엄마가 다시 안정을 찾았다며 당직 의사가 말해주었다. 하루 두 번 20분의 면회시간에 엄마를 봤을 때 말도 못 하고 의식도 없으셨고 기도삽관으로 기계 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의사 선생님은 그 모습이 안정을 찾은 거라고 했다. 손에는 많은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고 오르내리는 혈압 숫자 하나하나에 내 온몸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냥 이렇게라도 내 곁에 계셔 주셨으면.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었으면. 다시 일어나시면 여기저기 좋은 곳도 가고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싶다고 대답도 없는 엄마에게 수없이 말했다. 기적이라도 일어났는지 엄마가 의식을 찾았다.
나와 예전처럼 얘기도 하고 삶은 달걀이 먹고 싶다며 식이제한 중인 중환자실에서 심통도 부리셨다. 아프다고, 배고프다고, 누워만 있는 중환자실이 갑갑하다고 짜증 내는 엄마를 보면서도 마냥 좋았다. 엄마가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이.
의식이 없으셨을 때 승압제(혈압을 올리는 약제)를 쓰면서 말초혈관이 괴사하여 발가락이 썩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담당 교수님은 그냥 두었다가는 독이 퍼져 생명이 위독해질 수 있어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하셨다. 또다시 위기가 닥쳤다. 다리가 없더라도 엄마의 생명이 중요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수술에 동의를 했고 엄마는 두 다리를 잃었다.
간병이라는 굴레
▲ 두 다리가 사라진 후 퇴원하고 집에 와서의 생활조차 암담했다. 누가 엄마를 돌볼 것인가. ⓒ pixabay
두 다리가 사라진 후 퇴원하고 집에 와서의 생활조차 암담했다. 누가 엄마를 돌볼 것인가.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실에서 다리 절단 수술을 할 때까지 두 달여를 오빠와 내가 번갈아 간호했다. 낮에는 내가 하고, 밤에는 오빠가 퇴근해서 간호했다. 약제 때문인지 오랜 기간 중환자실과 큰 수술을 겪으며 정신적인 충격으로 겪는다는 섬망(환자들이 겪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착란) 때문인지 헛소리를 시작하셨다. 그때부터 오빠와 나는 지쳐갔다.
처음 엄마가 쓰러졌을 때 이제부터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엄마에게 신경을 쓰고 일거수일투족 관심을 두자고 맹세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엄마에게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점점 지쳐가던 오빠와 나는 급기야 간병인을 쓰기로 했다. 자식들이 간병을 하니 아빠는 내심 안심을 하시고 좋아하시는 눈치셨는데 간병인을 쓴다니 실망하셨다. 그래도 가족이 해야지 남에게 맡기면 되겠냐며 계속 하기를 바라는 눈치셨지만 도저히 더 이상은 나도 오빠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결혼 생활을 하는 나는 남편도 있고 아이들도 있는데 내가 없는 동안 집은 개판이 돼버렸다. 남편이 매일 일찍 퇴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아이들은 챙겨주지 않으니 숙제도 제대로 하지 않고 시험도 엉망이었다.
간병인 아주머니는 복불복이라는데 엄마의 간병인 분은 좋은 분이었다. 운동도 시켜주셨고 간식도 챙겨주시고 말동무도 되어주시고. 그야말로 좋은 분이었다. 그리고 엄마와 같은 신씨라 언니동생하며 잘 지내주셨다.
엄마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병원에서는 퇴원을 하라고 하였다. 요양병원으로 갈 것인지 집으로 모시고 갈 것인지 정해야 했다. 그러나 선뜻 어느 하나 정해지지가 않았다. 요양병원으로 보내기엔 엄마가 너무 불쌍했고 집으로 모시고 가기엔 엄마의 상황이 누군가 24시간 붙어 있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시간이 되는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된다 한들 이제는 자신도 없었다. 처음에는 요양병원을 반대하고 집으로 모시자고 했던 오빠조차 두 달여의 병원 야간 간병을 하더니 요양병원이 전문적이고 의료진도 있으니 더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을 통해 세상밖으로 나온다.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혼자서는 절대 살아가지 못하는 아기가 기어다니고 앉고 걷고 뛴다. 유치원을 가고 학교를 가고 사회생활을 한다. 내가 내 아이를 낳아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처럼 나의 어머니도 나를 그렇게 길러 주셨다.
이제는 엄마가 아기가 되셨다. 자식인 내가 어릴 적 엄마처럼 엄마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럼에도 자식인 나는 당연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요양병원만을 검색하다 자괴감에 한숨을 짓기도 한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를 돌봐주셨던 엄마처럼 엄마가 좋아하는 봄꽃도 보여드리고 엄마가 좋아하는 잔치국수도 해 드리고 싶으면서도 자신이 없다. 두 아이를 기르는 나도 엄마인데도 말이다.
요양병원을 검색하다 읽은 어느 댓글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요즘은 요양병원에 부모님을 모시는 게 아니라 넣어두고 아주 가끔 들여다본 후 돌아가셨다 연락 오면 무덤덤하게 장례 치르는 게 무슨 공식 같다'고.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면서도 안타깝게 다가오는 오늘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