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할머니가 또렷이 기억하는 남편이 죽은 '그날'
전남 완도군의 증언자 이남금과 황인태가 겪은 한국전쟁
▲ 완도군 전경 ⓒ 완도군
"할머니, 오셨어라." "잉. 발써 와 있었구만." 방금 들어온 이에게 경로당에 앉아있던 80대 노인들이 모두 아는 체를 했다. 노인들은 의례적이지 않고 정다움이 흠뻑 묻어 있는 태도로 인사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들어온 이는 광주 서강경로당 최고참 이남금으로, 경로당 20년 지기다. 집 나이로 100세이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이남금은 100세인데도 허리도 꼿꼿하고 발음도 뚜렷하다. 또 경로당 왕고참인데도 청소와 설거지 등도 도맡아 한다. 이남금이 봉사활동을 하는 곳은 광주광역시 남구 백운1동 서당경로당이다. 이렇게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게 이남금의 건강 비결이다. 그런데 이남금에게는 공공연히 얘기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가 있다. 벌써 71년 전의 이야기다.
▲ 증언자 이남금 ⓒ 박만순
한국전쟁 초기 1950년 10월 말. 군·경이 수복한다는 소식에 전남 완도군 금일면 척치리는 호떡집에 불난 듯했다. 유엔군이 들어오면 완도가 불바다가 된다는 뜬소문이 섬에 퍼졌기 때문이다. 척치리 젊은 남성들은 피난 짐을 싸기 바빴다.
이남금의 남편 정상언(1923년생, 마을에서 부르던 이름은 정상운) 역시 마을 친구들과 함께 10월 30일에 자섬(척도)으로 몸을 피했다. 정상언이 북한군 점령기에 감투를 쓴 것도 아니었다. 마을 청년들이 모두 피난을 가기에 그도 당연히 따라 나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밀고로 자섬으로 피난 간 척치리 청년 네 명은 18일 만인 11월 17일 금일지서로 잡혀 왔다. 정상언을 비롯해 전평두, 전갑기, 천영기였다. 정상언의 할머니 천명님이 그날 밤 지서로 밥을 해 날랐다. 하지만 천명님이 만든 손주 밥은 그날 한끼에 불과했다. 다음날인 11월 18일 금일지서 경찰들은 그들 넷을 굴비 엮듯이 묶어 논길을 따라 어디론가로 데려갔다. 이들이 경찰에게 죽임을 당한 곳은 금당면 울포리 공동묘지였다. 정상언의 나이 28세였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이남금은 남편 정상언이 피난 가고, 지서에 잡혀 와 울포리 공동묘지에서 죽임을 당하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 무엇이 자신에게 불행을 강요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남금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쟁의 화살은 남동생 이남욱의 가슴에도 꽃혔다. 이남금의 친정은 전남 완도군 금일면 월송리였다. 남동생 이남욱(1915년생)은 두 달 전 지서에 끌려갔다 집에 돌아오지 못한 형 이남석의 행방을 물으려 금일지서로 갔다.
"울 형님 어떻코롬 한 거라요?" "그걸 왜 여기 와서 물어. 이 자식아!" "지서에 끌려간 후에 집에 안 왔승께 하는 소리 아닌게라." "네 형 끌려간 곳 갈쳐줄팅께 따라와"라는 지서 순경의 소리에 이남욱은 뒤따라갔다. 이남욱이 간 곳은 완도군 금일면 소랑도였는데, 그곳에는 금일지서 순경들의 총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탕탕탕" 이남금은 한국전쟁기에 남편, 오빠(이남석), 남동생(이남욱)을 잃었다. 사랑하는 가족 3명을 잃은 아픔을 안고 71년을 살아왔다.
80세까지 야간에 일해
이남금이 남편과 결혼한 때는 19세 때인 1930년이었다. 남편 정상언은 일본에 강제 징용당했다가 해방되기 한 달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시댁은 농사 거리가 별반 없어 항상 배가 고팠다. "비가 안 와 나락도 못 베고 그랬지. 아는 못 먹어 빼빼 말라 부렀지." 그때를 회고하는 이남금의 얼굴이 안쓰러웠다.
결국 친정엄마가 쌀을 몇 차례 갖다주었다. 그렇게 힘겹게 살던 남편은 좋은 세상도 보지 못하고 스물여덟의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다.
남편의 빈 자리는 컸다. 6.25 당시 미혼이던 시동생은 노름으로 집 재산을 날렸다. 간신히 재산을 되찾아오긴 했지만, 그때부터 이남금의 삶은 험난했다. 남의 집 일을 이틀 해 주어도 품앗이로 돌아온 것은 하루치였다. 이남금이 여자라고 절반만 쳐준 것이다. 품삯으로 받은 보리쌀로 죽을 끓여도 아이들 먹이기에 바빴다. 그러다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도 했다. 자식이 성장한 후에도 그녀는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일이 평생 몸에 밴 것이다.
이남금은 70대에도 야간 일을 했다. 오후 4시에 시작해 새벽 3시까지 열무 묶는 일이었는데 80세까지 이 일을 했다. 가족들은 만류했지만, 일에 매달리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6.25 때의 상처가 가슴을 후벼파는 듯해 버틸 수가 없었다.
돌림병으로 중학교 시험 못 쳐
▲ 증언자 황인태 ⓒ 박만순
"인태야! 니 집 밖에 나갈 생각 말어." "엄니, 내일 시험 보는 날이라 오늘 목포 가야쓰는디." "이 놈의 자식이 죽을라고 환장했나. 배고 버스고 모두 끊긴 것 모른다냐."
전남 완도군 신지면 월부리 황인태(1932년생)가 1946년 목포 문태중학교(당시 4년제)에 입학시험을 치러 가려다 어머니와 나눈 대화다. 완도군 신지면 신지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는 목포로 유학을 준비했으나 1946년 창궐한 콜레라로 좌절되었다.
이 콜레라는 1946년 5월부터 시작해 7개월 사이 15,644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그 중 10,181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11월에 종식되었다. 8.15 해방 후 귀환과 함께 중국의 화중 및 화남 방면으로부터 남한의 항구, 특히 부산에 콜레라가 상륙해 1946년 남한 일대에 크게 유행했다. 당시 각 도시에서는 방역선전, 예방주사, 교통차단 등을 실시했다.(박인순, 「美軍政期의 韓國保健醫療行政에 관한 硏究」)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경북이 3,980명으로 가장 피해가 컸고 전북은 1,591명, 전남은 818명이었다. 완도군 신지면에서는 면사무소가 폐쇄되고, 완도, 광주, 목포로 가는 배가 모두 끊겼다.
황인태는 당시 신지면에서 콜레라로 죽은 이들을 명사십리 해수욕장(현재 명사십리 제2주차장)에서 화장했다고 기억한다. 이 일로 황인태는 목포 유학의 꿈을 접고 완도중학교에 진학한다. 그로부터 4년 후 그에게는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일어난다.
화학산에서 총 맞아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이 수복한다는 소식에 완도군 신지면 월부리 청년들은 피난 짐을 쌌다. 황인태는 1950년 9월 말 마을 청년 4명과 월부리 선착장에서 조각배를 타고 해남 남창으로 갔다. 거기서 강진, 성전을 거쳐 풀티재를 넘은 후 유치산으로 가려다 전남 화순군 화학산으로 선회했다.
화학산에서 그는 '인민유격대' 빨치산이 아니라 살기 위해 도망 다녀야 했다. 그러다 토벌대의 총에 대퇴부를 맞은 황인태는 죽기 살기로 뛰어 간신히 포위망을 벗어났다. 화학산과 장흥군 유치면에 있던 가지산으로 피난을 간 마을 선배들은 대부분 토벌대의 총에 생을 달리했다.
상처를 치유한 황인태는 지리산으로 갔고 거기서 몇 개월을 지내다 203전투부대에 체포되었다. 산으로 올라간 지 1년 만이던 1951년 9월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순천에 주둔하던 203전투부대 기지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났다. 당시에는 산에서 잡히면 현장에서 즉결처형되거나 포로수용소에 구금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가 풀려나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203전투부대 부대장과 황인태의 외삼촌이 일본 명치대 동창이었던 것이다. 황인태 외삼촌은 부대장에게 "내 체면을 봐서 살려줘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여버려라"라고 말했다.
황인태는 풀려난 후에도 고향으로 곧바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는 전남 강진군 도암지서에서 의경으로 6개월 근무했다. 이로써 황인태는 '빨치산(?)'에서 '경찰'이 되었다. 일종의 신분 세탁이었다.
구순의 증언자들
6.25때 남편과 오빠와 남동생을 국가로부터 학살당한 이남금과 피난 갔다가 대퇴부에 총 맞은 황인태는 이제 구순의 나이다. 이남금은 집나이로 100세다. 이들에게 한국전쟁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특히 가족 세 명을 잃은 이남금은 더더욱 그렇다. 그녀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을 맞아 가족의 억울한 죽음이 70여 년 만에 밝혀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남금은 100세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하다. 특히 기억력이 좋다. 그녀의 기억력이 이토록 온전한 것이 시대의 증언자로 역할을 하라는 신의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기억하는 자만이 역사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경구를 떠올리게 하는 이남금과 황인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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