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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째 해로하신 부모님... 그 시작에 대한 글입니다

[부부의 날] 아버지 구순기념 가족문집을 만들며 생각해 본 부부의 의미

등록|2022.05.20 22:04 수정|2022.05.20 22:04
"엄마, 아버지 제일 좋은 점이 뭐예요?"

얼마 전 아버지 '구순기념 가족문집'을 만들면서 엄마와 짧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88세에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게 된 엄마는 내 첫 질문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아버지는 평생 변함이 없어."

몇 가지 질문을 하며 나는 두 분의 결혼 이야기를 듣게 됐다. 60년도 훨씬 지난 이야기를 엄마는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의 결혼 이야기
 

▲ 1959년 2월 2일 혼인한 엄마 아버지는 64년째 해로하고 계시다. ⓒ 오안라


엄마, 아버지는 1959년 2월 2일 혼인하셨다. 2월 2일은 아버지가 정하셨는데 그 날이 가톨릭의 '봉헌축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억하기 좋은 날짜라고만 생각했는데 신앙심이 깊은 아버지는 혼인이 갖는 의미를 숙고하셔서 배우자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는 봉헌의 결심으로 날짜를 잡으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직장도 잡기 전에 군을 제대하자마자 이루어진 결혼은 아버지 표현대로 "온전히 할아버지 오춘식의 은덕"이었다. 엄마의 아버지(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는 오랜 친구 관계였다.

엄마를 만나면 집에 데려가 밥해 주고 귀한 토마토를 몇 개씩 따 주던 증조할아버지는 일찌감치 엄마를 손주며느리로 점찍었다. 수시로 친구 집에 들러 술상을 마주하고 사돈 맺자고 친구를 졸랐다. 가족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막내딸인 엄마에게 시누이감을 보내 차근차근 선을 보였다.

"그날 니네 엄마가 얼마나 이쁘던지 자세히 보니 발뒤꿈치까지도 이쁘더라."

언젠가 고모가 엄마 선 본 이야기를 했는데 우물가에서 빼꼼이 본 엄마가 얼마나 맘에 들었는지, 고모는 당장 엄마가 신었던 보라색 양말을 사 신었다는 말도 들었다.

본격적인 결혼 이야기는 아내와 사별하고 서울 아들네로 이사 가게 된 할아버지를 모시러 온 신랑감을 외할아버지가 보고 나서였다. 외할아버지 입에서 자꾸 시집 가란 소리가 나왔고 얼마 후 군복 입고 군인 모자 쓴 그 손주가 엄마를 선보러 왔다.

"방에 모두 우르르 들어오더니 나랑 네 아버지랑만 남겨 두고 나가데. 서로 할 말이 있어야지. 그냥 둘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지. 키도 작고 군복 입고 그저 그랬어."

'5남매 맏이라 고생해서 안 된다'는 말에도, '잘 생기기를 했나, 키가 큰가, 재산이 있기를 하나,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라는 식구들의 말에도 외할아버지는 '아들 넷을 장가 들이고 딸이 하나 있는데, 딸을 누구를 주나 해서 잠이 안 온다'라는 말로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1년 후 제대를 하자마자 신랑 쪽에서 결혼 날짜를 잡아왔다. 신붓감이 다른 데로 시집갈까 봐 서둘러 날짜를 잡았다고 했다.

"신랑은 직장도 없다는데 결혼부터 하자고 했어. 그런데 막상 날짜를 잡아 보내오니까 결혼이 막 서둘러지더라. 그렇게 해서 제대 3개월 만에 결혼이 이루어진 거지. 결혼하고 드라이브 가는 차 안에서 니 아부지가 이 말부터 하더라. '내가 얘기 못한 게 있는데... 낳은 지 한 달 된 동생이 있어요'라고. 니 아버지하고 선 볼 때는 5남매 장손이었는데 결혼하고 보니 6남매 장손이 되어 있는 거야. 손주 며느리로 데려오지 못할까 봐 어른들이 이야기를 못하게 했다는데 니네 아버지는 그게 마음에 걸렸던 거야."

엄마는 남편이 된 아버지 마음이 바로 이해가 된 거 같았다. 나는 엄마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 했다.

"엄마, 아버지랑 살면서 언제가 제일 좋았어요?"
"... 글쎄...."


이 질문에 엄마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일 좋았던 게 언제였는지 생각 하는 거 숙제예요. 다시 물어 볼게요"라며 나는 이날 인터뷰를 마쳤다. 다음 날 도착한 구순기념 가족문집에 들어갈 아버지의 글에는 부분 부분 엄마와의 결혼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나는 요샛말로 무일푼 총각, 직장이라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런 나를 보고 짝을 이루어준 사랑하는 최영순은 얼마나 고마운고. 지금은 63세까지도 정년을 두는데, 나는 새파란 젊은 나이 55세에 정년을 맞았으니 이후의 인생은 오로지 아내의 몫이었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래도 여기까지 우리 가족들을 함께 이끌고 보살펴 왔으니, 아내 데레사의 내조가 큰 힘이 되었네."

엄마에게 '언제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은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의 글 안에서 엄마의 대답을 보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결혼한 '키 작고, 가진 것도 없고, 잘 생기지도 않았던 아버지'가 평생 엄마에게 고마워했던 그 마음의 시간이 엄마에게는 제일 좋았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결심이다

엄마 아버지의 결혼 이야기를 들으며 기억이 난 문구가 있다. '사랑은 결심이다'라는 문장이다. 오래전 남편과 나는 부부대화를 중심으로 한 부부관계 개선 교육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우리 부부는 '부부의 계절'로 보자면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웃음 짓던 봄의 계절을 지나 작렬하는 태양만큼이나 치열하게 다투는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당시 교육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 또렷한 것은 교육장에 걸렸던 현수막의 내용이었다.

'사랑은 결심이다.'

이 문구가 기억난 것은 엄마 아버지의 혼인에서처럼 부부관계의 시작은 다름 아닌 '결심'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결혼식장에서 정신없이 했던 혼인서약이 바로 '사랑은 결심'이라는 현수막의 내용이었다.

60년 넘게 엄마가 지어준 밥을 드셨던 아버지는 이젠 밥상을 차리는 남편이 되었다. 55세 정년까지 성실한 직장인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던 아버지를 이어 엄마가 묵묵히 생계를 맡기도 하셨다.

누군가는 "부부는 결혼 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살펴보고, 결혼 후에는 눈을 반쯤만 뜨고 보라"고 했는데 엄마 아버지는 결혼 전에도 후에도 늘 같은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살아오신 듯하다. '사랑은 결심'이라는 마음의 온도를 유지하셨기에 가능한 시선이었을 것이다.

결혼생활 64년째인 두 분에게도, 34년째인 우리 부부에게도 언젠가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귀천하여 서로를 떠나야 할 부부의 겨울이 올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스산한 바람이 분다. 엄마 아버지에게도 엄연히 존재할 그 시간을 준비하며 삶의 가장 좋은 반려자로 풍성하게 가을을 만들고 계신 두 분 부모님의 결혼 생활에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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