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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만난 4.3유족의 불신... 태영호에게 묻는다

제주도 출신이 본 '4.3김일성 지시' 발언... 가해자 지우는 왜곡, 대한민국 과연 변했나

등록|2023.02.15 11:47 수정|2023.02.15 11:47

오사카 통국사에서 진행된 4.3 위령제 (2019년)2019년 4.3 위령제에는 총련과 민단 양측을 비롯해 주오사카대한민국 영사 등이 참석해 4.3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 박광홍


오사카는 식민통치기와 4.3사건을 기점으로 다수의 제주도민들이 도일하여 정착한 지역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오사카는 외국이라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4.3희생자 유족과 그 후손을 중심으로 4.3진상규명 운동이 활발이 전개돼 왔다. 제주도 출신의 유학생인 나는 4년여 간 오사카에서 지내며 4.3사건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마주해왔다. 그 중 단연 인상에 남는 것은 일부 유족들 사이로 여전히 견고하게 뿌리내린 '대한민국 정부 불신'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7년 '삼일절 발포사건'에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금족령 해제'에 이르는 4.3사건 기간 동안 도민들을 상대로 폭력을 자행한 가해 주체 중 하나다. 정당한 법적 절차도 없이 국가공권력에 의해 살해, 납치, 고문, 강간, 투옥된 피해자들의 규모는 지금도 정확히 헤아려지지 않는다.

부정할 수 없는 이 가해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 치하에서 4.3사건에 관한 기억은 억압됐다. 4.3생존자의 고통을 그린 <순이 삼촌>의 저자 현기영이 보안사로 끌려가 고문당했던 사례는 4.3 기억 억압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렇듯 4.3에 관해 말하고 쓰는 것은 금기시됐고 살아남은 도민들과 그 후손들에게는 연좌제의 굴레가 씌어졌다.

일본에 머무는 4.3유족들의 한국 정부 불신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비록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처음으로 국가공권력의 범죄에 대한 사죄가 이뤄지고 박근혜 정부 때는 '국가추념일' 지정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국가에 의한 폭력과 억압의 기억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변했다'... 이 말이 부끄럽다 
 

섯알오름 학살터1950년 8월 27일 새벽, 모슬포경찰서에 예비검속된 252명이 해병대 모슬포 주둔군 3대대에 의해 재판없이 총살되었다. 계엄군은 유족에게 시신 인도를 거부하고 해당 학살터를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하였다. ⓒ 박광홍


제주도민이자 한국인 유학생으로서, 4.3에 관한 기억으로 대한민국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일부 동포들을 마주하는 나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 없다. 4.3사건 당시 학살이 자행됐던 산과 폭포들에서 뛰놀며 자랐던 나 또한, 성장하고 나서 4.3의 진실을 알게 되고는 큰 충격을 받았던 바 있다. 자유롭고 정의롭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이, 무고한 민중의 피 위에서 세워졌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때의 대한민국과 다르다고 믿는 것으로 나는 일말의 애국심을 지켜왔다. 나는 일본에서 만난 4.3유족들을 향해 대한민국은 민주화 이후 변해왔노라고, 4.3에 대한 국가책임은 부정할 수 없는 명제로 자리잡았노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럼에도, 그분들은 대한민국이 변했다는 나의 말을 쉽사리 수긍하지 못하는 듯했다. 결국 나는 겉도는 이야기에 지쳐 그분들의 사고가 과거에 머물러있다고 단정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오늘, 뜻밖의 기사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된다. 집권여당의 국회의원이자 최고위원 후보인 인물이 제주도민들의 수난을 기리는 평화공원을 참배하고는 그 책임자로 '김일성'과 '북한'을 언급했다는 소식에, '대한민국은 변했다'고 강변하던 나의 혀가 부끄러워졌다.

남로당 계열 무장대 역시 폭력의 주체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단순 양비론으로 당시를 평가하기에 군경 토벌대에 의한 범죄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규모다. 4.3중앙위원회에 신고된 피해 사례들을 들여다보아도, 토벌대 학살에 의한 사망자는 86.1퍼센트에 달한다. 국가의 책임을 가리키는 이 명백한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는 이들이 대한민국의 정치사회 영역에 건재하다는 현실 앞에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6.25가 아니라 4.3이었습니다"
 

▲ 국민의힘 최고위원 후보인 태영호 의원이 13일 '제주 4·3 평화공원'을 찾아 추모비에 참배하고 있다. ⓒ 태영호 의원 페이스북


끔찍한 수난을 당하고도 그 아픔을 호소하지 못하던 제주도민들의 현대사는 학술적 접근을 통해서도 그 윤곽이 드러난다. 가령, 안자이 마사히로(安西正宏)가 쓴 <'제주 4·3'을 둘러싼 기억투쟁과 제주도민 2, 4세대의 제주 4·3에 대한 반응> (「済州4・3」をめぐる記憶闘争と済州島民2,4世代の「済州4・3」に対する「反応」)이라는 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등장한다.
 
중학생 때인가 초등학생 때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셨어요. 6.25에 대해서 알아보고 오라고요. 하지만 선생님은 잘못된 과제를 내신 셈이죠. 제주도에 6.25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할머니께 가서 6.25에 대한 얘기를 들으러 갔는데, 할머니가 그때 당시에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셨는데 몇 년이 지나서 돌이켜보니 그건 6.25가 아니라 4.3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왜냐하면, 여기 제주도에는 6.25가 내려오지 않았잖아요. 저는 6.25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줄 알고 있었는데, 6.25가 아니라 4.3이었습니다. (52세 여성)

4.3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도 없었던 시대상이 그대로 묻어나는 위의 사례는 깊은 시사점을 남긴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죄 주체를 지목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는, 급기야 '체험세대'로부터 '자식세대'로 왜곡된 형태의 기억계승이 행해지는 사태마저 야기했다. 그리고, 국가의 사죄가 이뤄진 오늘날에조차, 제주도민과 피해유족들은 가해자의 존재를 지우는 왜곡된 기억을 또다시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자유의 가치에 대해 거듭 강조해왔던 태영호 의원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생각이 다르거나 다르다고 의심된다는 이유로 상대를 죽이고 빼앗는 것은 자유의 가치에 부합하는지. 아픈 과거를 그대로 이야기하고 기억조차 할 수 없었던 사회적 조건은 자유의 가치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현지에서 피해당사자의 기억을 부정하며 자유를 논하는 스스로의 언행은 자유의 가치에 부합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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