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행궁의 소중한 가치, 많이 알려지길 바랍니다
지난해 7월 개관한 시흥행궁 전시관에서 보고 느낀 것들
[기사 수정 : 20일 오후 5시 53분]
지난해 10월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행사 관람 후 시흥행궁 전시관을 가려는 계획을 미루다 최근 전시관에 들렀다. 금천구는 재현행사에 앞서 지난해 7월 시흥5동 주민센터에 전시관을 개관했다. 정조대왕이 화성 능행차 묵었던 임시궁궐 시흥행궁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는 곳이다.
시흥행궁 전시관 지난해 7월 개관
시흥행궁 전시관은 아담하게 꾸며졌다. 고증을 거쳐 행궁터를 추적하고 행궁모형을 초입에 배치했다. <화성원행반차도> 3D영상과 환어행렬을 재현한 디지털영상을 통해 행궁과 장엄한 행렬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 소재를 전시장 곳곳에 연출한 것도 인상적이다.
시흥행궁은 유감스럽게도 유적은 남아 있지 않고 그 터만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시흥행궁터는 시나 그림 등에서 그 기록이 발견되는데 특히 화성에서 서울로 귀환하는 행렬을 그린 <환어행렬도>에 잘 묘사돼 있다. 행궁의 규모가 자그마치 114칸이나 될 정도로 크다고 전해진다.
환어행렬도에는 시흥행궁을 둘러싼 지형지물과 초가, 행차 인력과 말, 각종 의식과 공연, 행렬을 구경하는 주민들과 주변에서 장사하는 상인들까지 다양한 표정들이 생생하게 그려져있다. 그러나 정조대왕 얼굴만은 유독 가려져 있다. 문해영 시흥행궁전시관 해설사는 "왕의 얼굴인 용안은 화공들이 그리지 않는 것이 관례"라 설명했다.
지금 금천구를 관통하는 시흥대로는 정조대왕의 아이디어다. 처음에는 '시흥로'라 칭했지만 1795년 을묘년 원행길을 과천에서 시흥쪽으로 바꾸면서 새로 조성됐기 때문이다. 6천여 명이 넘는 행차 인원이 이동하려면 기존의 과천길과 다른 완만하고 폭넓은 시흥길이 필요했다. 정조대왕실록에는 시흥로와 시흥행궁을 짓기까지의 자초지종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시흥행궁이 주목받는 것은 정조대왕의 유숙에만 있지 않다. 원행길은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고 국가운영 실태를 파악하는 좋은 기회였다. 신문고의 새 버전인 <격쟁(擊錚)>이 대표적이다. '징과 꽹가리를 치다'는 뜻의 격쟁의 민원은 개인의 하소연과 사회비리까지 다양했다.
정조대왕 원행길은 '소통길', 격쟁과 상언 활발
승정원일기의 김이수 격정 기록이 유명하다. 흑산도 주민들은 한지 원료인 닥나무 종이를 만들어 세금을 바쳤는데 닥나무가 바닥나 더 이상 세금 낼 길이 막막하자 종이 대신 돈 3백량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폐단이 생겼다. 이에 나주 관아에 세금 폐지를 건의했으나 묵살되자 주민 김이수가 한양에 올라가 격쟁을 벌여 정조가 사정을 파악하고 세금을 면제했다.
환어행렬도에는 행렬중에 상언(上言)을 적은 종이를 걷으러 다니는 관원을 볼 수 있다. 신하나 백성이 사사로운 일로 임금에게 글을 써 올리는 상언도 정조때 원행길에서 접수한 것만 1100건에 이른다. 정조는 금천 사는 노인을 초대해 애로를 청취하고 이들의 불만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관광'이라는 말도 원행길에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관광은 과거시험을 응시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정조대왕은 이에 뜻을 하나 추가했다. 능행차 국왕의 행렬을 주민들이 자유롭게 구경하는 것을 <관광민인(觀光民人)>이라 불렀다. 이를 보면 요즘 사용하는 관광의 의미를 정조대왕이 최초로 규정한 셈이다.
시흥행궁 전시관은 금천구가 역사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시흥행궁 복원사업의 첫걸음이다. 역사문화 콘텐츠가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금천의 대표 문화재로 육성하려는 것이다. 이에 앞서 금천구는 2016년부터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행사에 참여하고 2017년에는 행궁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서울시, 수원시, 금천구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행사를 구경하는 금천구민이 해마다 늘고 있다. 문해영 해설사는 "전시관이 생기고 행궁의 역사를 통해 금천구민의 긍지와 자부심이 커지고 있는데 주민들의 애정과 관심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시흥행궁의 소중한 가치 전파 시급해
시흥행궁터는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다. 세 군데 중 하나인 시흥5동 주민센터 앞이 유력한 행궁터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고증작업을 통해 새로운 결정적 증거가 나오면 행궁터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금천구는 추정지역 원형 고증을 위한 매장 문화재 조사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한편,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은 예상보다 적다. 금천구청 문화체육과에 따르면, 지난 한해 개관 이후 관람객은 4천여 명이다. 하루 평균 30여 명이 조금 넘는 인원인데 필자가 방문한 날 오후에는 2시간 사이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일부 관람객들도 지적하는 사항이지만 전시장이 주민센터 6층에 자리해 접근성이 취약한 결과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용하는데도 불편하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강의실, 자료실, 쉼터 등 쿠션공간이 없어 답답하다. 시흥행궁터를 조망하는 전망대가 외부에 있지만 비좁다. 전시관을 주민센터에 억지로 집어넣은 것 같은 느낌이다.
전시관에 대한 무관심은 더욱 심각하다. 금천구는 개관 이후 홈페이지에 전시관을 안내하고 관내 학교에 공문을 보내 탐방을 유도하고 있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개관 이후 매력적인 행사나 후속 프로그램 등 관람객을 유인하기 위한 방책이 필요해 보인다.
구체적으로 전시관이 관심을 끌려면 주민과의 소통과 대화가 중요하다. 관람객들이 방문할 이유와 동기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이를테면 시흥행궁 관련 자료 수집과 전시를 강화하고, 관람객들의 재방문을 유도하는 다양한 이벤트와 아이디어를 발굴해야 한다.
시흥행궁 전시관은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 재현행사와 함께 금천구를 대표하는 역사문화콘텐츠다. 특히 시흥행궁 전시관은 시흥행궁의 소중한 가치를 전파하는 구민들의 새로운 소통공간이 되도록 성원이 필요하다. 금천구의 시흥행궁 복원을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기대한다.
지난해 10월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행사 관람 후 시흥행궁 전시관을 가려는 계획을 미루다 최근 전시관에 들렀다. 금천구는 재현행사에 앞서 지난해 7월 시흥5동 주민센터에 전시관을 개관했다. 정조대왕이 화성 능행차 묵었던 임시궁궐 시흥행궁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는 곳이다.
▲ 시흥행궁 전시관 ⓒ 이혁진
시흥행궁 전시관 지난해 7월 개관
시흥행궁은 유감스럽게도 유적은 남아 있지 않고 그 터만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시흥행궁터는 시나 그림 등에서 그 기록이 발견되는데 특히 화성에서 서울로 귀환하는 행렬을 그린 <환어행렬도>에 잘 묘사돼 있다. 행궁의 규모가 자그마치 114칸이나 될 정도로 크다고 전해진다.
▲ 시흥행궁 모형 뒤에 3D 영상이 있다. ⓒ 이혁진
환어행렬도에는 시흥행궁을 둘러싼 지형지물과 초가, 행차 인력과 말, 각종 의식과 공연, 행렬을 구경하는 주민들과 주변에서 장사하는 상인들까지 다양한 표정들이 생생하게 그려져있다. 그러나 정조대왕 얼굴만은 유독 가려져 있다. 문해영 시흥행궁전시관 해설사는 "왕의 얼굴인 용안은 화공들이 그리지 않는 것이 관례"라 설명했다.
▲ 시흥행궁터를 보여주는 환어행렬도 ⓒ 이혁진
지금 금천구를 관통하는 시흥대로는 정조대왕의 아이디어다. 처음에는 '시흥로'라 칭했지만 1795년 을묘년 원행길을 과천에서 시흥쪽으로 바꾸면서 새로 조성됐기 때문이다. 6천여 명이 넘는 행차 인원이 이동하려면 기존의 과천길과 다른 완만하고 폭넓은 시흥길이 필요했다. 정조대왕실록에는 시흥로와 시흥행궁을 짓기까지의 자초지종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 시흥로를 보여주는 대동여지도 ⓒ 이혁진
시흥행궁이 주목받는 것은 정조대왕의 유숙에만 있지 않다. 원행길은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고 국가운영 실태를 파악하는 좋은 기회였다. 신문고의 새 버전인 <격쟁(擊錚)>이 대표적이다. '징과 꽹가리를 치다'는 뜻의 격쟁의 민원은 개인의 하소연과 사회비리까지 다양했다.
정조대왕 원행길은 '소통길', 격쟁과 상언 활발
승정원일기의 김이수 격정 기록이 유명하다. 흑산도 주민들은 한지 원료인 닥나무 종이를 만들어 세금을 바쳤는데 닥나무가 바닥나 더 이상 세금 낼 길이 막막하자 종이 대신 돈 3백량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폐단이 생겼다. 이에 나주 관아에 세금 폐지를 건의했으나 묵살되자 주민 김이수가 한양에 올라가 격쟁을 벌여 정조가 사정을 파악하고 세금을 면제했다.
환어행렬도에는 행렬중에 상언(上言)을 적은 종이를 걷으러 다니는 관원을 볼 수 있다. 신하나 백성이 사사로운 일로 임금에게 글을 써 올리는 상언도 정조때 원행길에서 접수한 것만 1100건에 이른다. 정조는 금천 사는 노인을 초대해 애로를 청취하고 이들의 불만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 시흥행궁 전시관, 정조대왕 을묘원행길 ⓒ 이혁진
'관광'이라는 말도 원행길에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관광은 과거시험을 응시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정조대왕은 이에 뜻을 하나 추가했다. 능행차 국왕의 행렬을 주민들이 자유롭게 구경하는 것을 <관광민인(觀光民人)>이라 불렀다. 이를 보면 요즘 사용하는 관광의 의미를 정조대왕이 최초로 규정한 셈이다.
시흥행궁 전시관은 금천구가 역사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시흥행궁 복원사업의 첫걸음이다. 역사문화 콘텐츠가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금천의 대표 문화재로 육성하려는 것이다. 이에 앞서 금천구는 2016년부터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행사에 참여하고 2017년에는 행궁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 지난해 10월 정조대왕 능행차 금천구간 재현행사 ⓒ 이혁진
서울시, 수원시, 금천구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행사를 구경하는 금천구민이 해마다 늘고 있다. 문해영 해설사는 "전시관이 생기고 행궁의 역사를 통해 금천구민의 긍지와 자부심이 커지고 있는데 주민들의 애정과 관심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시흥행궁의 소중한 가치 전파 시급해
시흥행궁터는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다. 세 군데 중 하나인 시흥5동 주민센터 앞이 유력한 행궁터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고증작업을 통해 새로운 결정적 증거가 나오면 행궁터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금천구는 추정지역 원형 고증을 위한 매장 문화재 조사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 시흥행궁 전시관 ⓒ 이혁진
한편,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은 예상보다 적다. 금천구청 문화체육과에 따르면, 지난 한해 개관 이후 관람객은 4천여 명이다. 하루 평균 30여 명이 조금 넘는 인원인데 필자가 방문한 날 오후에는 2시간 사이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일부 관람객들도 지적하는 사항이지만 전시장이 주민센터 6층에 자리해 접근성이 취약한 결과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용하는데도 불편하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강의실, 자료실, 쉼터 등 쿠션공간이 없어 답답하다. 시흥행궁터를 조망하는 전망대가 외부에 있지만 비좁다. 전시관을 주민센터에 억지로 집어넣은 것 같은 느낌이다.
▲ 시흥행궁터로 추정되는 은행나무4거리, 주민센터 전망대에서 촬영 ⓒ 이혁진
전시관에 대한 무관심은 더욱 심각하다. 금천구는 개관 이후 홈페이지에 전시관을 안내하고 관내 학교에 공문을 보내 탐방을 유도하고 있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개관 이후 매력적인 행사나 후속 프로그램 등 관람객을 유인하기 위한 방책이 필요해 보인다.
구체적으로 전시관이 관심을 끌려면 주민과의 소통과 대화가 중요하다. 관람객들이 방문할 이유와 동기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이를테면 시흥행궁 관련 자료 수집과 전시를 강화하고, 관람객들의 재방문을 유도하는 다양한 이벤트와 아이디어를 발굴해야 한다.
시흥행궁 전시관은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 재현행사와 함께 금천구를 대표하는 역사문화콘텐츠다. 특히 시흥행궁 전시관은 시흥행궁의 소중한 가치를 전파하는 구민들의 새로운 소통공간이 되도록 성원이 필요하다. 금천구의 시흥행궁 복원을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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