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더미 속, 아비는 발가락만 보고 아들의 시신을 찾았다
오창창고 학살사건... 구천을 떠도는 자와 살아남은 자의 끝없는 고통
오창창고 학살사건이 발생하고 2~3일 후부터 보도연맹 유가족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국군이 완전히 후퇴하고 인민군이 오창과 청주에 왔다는 소문을 들은 터였다.
당시 창고 안 바닥에는 피가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로 고여 있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약 400명의 보도연맹원이 국군의 총탄과 수류탄 세례를 받고 심지어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받았으니 말이다.
살이 찢기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복부가 터진 자리에서 피가 쿨렁쿨렁하며 쏟아졌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이들도 대부분 총상을 입고 피를 쏟아냈다.
사건이 발생한 지 2~3일밖에 안 되었지만, 시신은 한여름 날씨로 인해 급속히 부패했다. 그러다 보니 유가족들은 피해자의 신체적 특징이나 집에서 나갈 때 옷차림새 등을 보고 찾아야 했다. 당시 아버지 홍복남(38세. 오창면 기암리)의 시신 수습 과정에 대해 아들 홍충의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아침에 아버지에게 아침밥을 드리러 창고에 가보니 창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어 있었고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사람들이 그륵그륵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창고 안은 피가 발목까지 차 있었고 피비린내가 진동했습니다.
아버지는 머리에 총을 맞은 상태로 돌아가셨는데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어 알아볼 수가 없어서 손톱과 (입고 있는 옷의) 바느질한 모양을 보고 신원을 확인했습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원 오창창고 보도연맹 사건, 2007)
발가락 보고 시신 찾아
서은석(1949년생)의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들 서정안(1923년생. 진천면 사석리 석박마을)이 오창창고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순간 정신을 놓았다. 잠시 후 가족과 친지들을 이끌고 오창면 장대리로 향했다. 오창국민학교 옆에 있는 창고에 가니 입이 딱 벌어질 만한 상황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폭격으로 창고의 지붕과 벽체는 모두 없고 나무 기둥만 있는 상태에서 찢긴 시신들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창고 안에는 찾아가지 않은 시신들이 100여 구 있었다.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해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고 목이 따가웠지만, 아들을 찾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런데 시신들의 복수가 차오르고 얼굴은 퉁퉁 부어, 아들을 어떻게 찾을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러던 차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같이 간 가족들에게 얘기했다. "새끼발가락만 살펴봐라." 그렇다. 서정안은 새끼발가락에 뼈가 없어 평소 생활하
는 데 곤란함을 겪었다.
가족들은 각자 흩어져서 시신들의 신발을 벗겨내 새끼발가락만 관찰했다. "여기 찾았어요"라는 외침이 터졌다. 새끼발가락에 뼈가 없어 물렁물렁한 시신이 있었다. 시신은 인근 공동묘지에 가매장했다가 며칠 후 이장을 했다.
서정안의 아버지와 달리 많은 이가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진천면 문봉리 박찬영(1949년생)도 아버지 박원종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경우다.
피의 살육제가 벌어진 후, 오창면 학소리에 살던 박찬영의 이모가 1차로 현장에 가 제부 박원종의 시신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2차로 박찬영의 어머니 공기순이 갔으나 역시 허사였다. 사실 박원종은 1차 집단사살(7월 11일 새벽 4시경)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고 한다.
1차 총질 후 같은 마을 김재현이 그에게 '나가자'고 했으나 창고 안에서 "물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이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물을 떠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김재현의 증언에 의하면 박원종은 창고 안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1950년 7월 11일 아침 8시 30분경, 미군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오창 양곡창고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 중 가족의 품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이들이 약 100명에 이른다.
어깨 총상에 머큐로크롬만 발라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는 사람은 살려 주겠다."
몇 사람이 일어서자 군인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었다. 총을 맞고 신음하는 이와 예상치 못했던 군인들의 반응에 그때까지 살아 있던 이들의 분노, 허탈, 절망의 한숨 소리가 뒤섞였다.
그 와중에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오창면 각리 김창석(1929년생)은 죽기 살기로 탈출을 결심했다.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상태라 창고 뒤쪽으로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총소리가 잠잠해지자 그는 창고 뒤편의 녹슨 골함석을 부상을 입지 않은 어깨로 밀쳤다.
창고에서 탈출한 그는 미호천 옆 수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웅덩이 물을 먹으며 여천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가 당시 일본식 이름으로 불린 도라야마산 초입에 있던 금방앗간(광산방앗간)에 도착할 때까지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방앗간에서 고의적삼으로 갈아입은 그는 오창면 탑리 집 근처의 땅굴에 은신했다. 마침 청주대학교 근처에 살던 매형이 처가로 피난을 와, 굴을 파 몸을 피하고 있었다.
김창석이 굴에서 가족들의 도움으로 있는데, 상처 부위가 이미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인민군이 민간인들을 치료해 준다는 소문을 듣고 1950년 7월 12일 오근장을 경유해 청주 시내로 나왔다. 하지만 찾아간 곳에서는 일명 '빨간약'라 불린 머큐로크롬만 발라 줄 뿐이었다.
평생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
다음날 그는 피난 와 있는 청주연초제조창(현재의 문화제조창) 의무관을 찾아가 한 시간에 걸쳐 어깨 수술을 받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깨가 쑤셨다. 하지만 어깨 통증보다는 양곡창고에서의 4일 동안의 공포가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특히 국가를 수호한다는 군인이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면 살려주겠다'라고 공언한 후 일어난 이들에게 총질을 가한 것은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오창 양곡창고에서 살아난 이들이 92명이라고 진실규명했다. 그렇다면 그 92명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김창석을 포함해 생존자 모두가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다. 2005년 오창유족회가 결성된 날, 오창면사무소에서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었다. 그때 공개 증언을 했던 한 생존자는 55년 전의 악몽이 떠올라 집을 나갔다. 그를 찾기 위해 가족들은 동분서주했다.
진천면 문봉리 김재현(1925년생)도 2006년 오창창고 사건을 증언하는 과정에서 연신 불안과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심지어 경찰과 군인이 자신을 붙잡으러 오지 않을까 불안해했다.
이러한 불안과 공포, 분노, 절망의 감정들이 몇몇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92명의 생존자 모두에게 있었던 일이다. 군대에서 제대한 대한민국 남성들이 다시 입대하는 꿈을 30~40대까지 꾼다고 하는데, 죽음의 창고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창고에 갇히고, 총 맞고, 죽은 이의 피를 마시는 꿈을 수백 차례 꾸지 않았겠는가.
쌀 열 짝을 빼앗겨
진천면 상계리 신순철(1931년생)은 사석지서 김재옥, 나세찬 순경이 마을로 와 '아군을 위해 방공호를 파야 하니 삽과 괭이를 들고 지서로 오라'고 해, 동네 사람 30여 명과 함께 지서로 향했다.
신순철은 대한청년단 진천면 상계리 반장을 맡고 있었다. 동시에 보도연맹원이기도 했다. 그는 사실 좌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같은 마을 청년들이 "여기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품앗이가 일절 없을 줄 알아"라고 겁박해 민애청에 가입했다. 이 일로 인해 진천경찰서에서 며칠간 조사를 받은 그는 후일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지면서 자동으로 연맹원이 되었다.
전쟁 발발 후 방공호를 판다는 명분으로 마을 주민들이 사석지서로 소집되었을 때, 보도연맹원에 대한 심사, 분류가 있었다. 그는 평소의 활동과 대한청년단 상계리 반장이라는 직책이 감안돼 방앗간에 구금되지 않았다. 다음날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1950년 가을 사석지서 김아무개 순경과 군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소 한 마리와 쌀 열 짝을 빼앗아 갔다. 보도연맹원이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또한 신순철이 군에서 총기 오발 사고를 냈는데 상급자들은 그를 사상범으로 몰았다. 특별 휴가 한 달이 있었는데 취소되었고, 군 복무기간은 한정 없이 늘어져 6년 만에야 제대할 수 있었다.
1958년도에 진천경찰서에 갔는데 수사과장 책상 고무판 아래에 보도연맹원 명단이 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충북대책위원회, 기억여행, 2006) 국민보도연맹원은 '같은 국민으로서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닌 영원한 주홍 글씨에 불과함을 실감했다.
밥 많이 먹는다고 구박해
남편 박원종을 잃은 공기순에게 인공시절은 또 하나의 지옥이었다. 인민군이 점령하던 시절, 진천면 문봉리 용소마을(용소백이) 김민정(가명)은 집마다 방문하여 여성들에게 여맹(여성동맹)에 가입하라고 했다.
1차 가입 대상은 한국전쟁 초기 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었다. 그렇기에 공기순도 여러 차례 김민정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김민정은 자위대원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공기순이 가족들을 데리고 뒷산으로 피신해 있던 날, 김민정은 공기순 집의 장독대를 부수고 죽창으로 가재도구를 쑤셨다. 김민정은 비단 공기순 집에만 들이닥친 것이 아니라 마을 여러 집을 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인공시절,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용소마을 주민들은 인공시절이 유쾌하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군경 수복 후 김민정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받았다. 후유증으로 김민정은 오래 살지 못했다.
박찬영은 어릴 때 그리 어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 진천면에서 부유하기로 소문난 외삼촌의 존재 때문이었었다. 소 장사를 하던 외삼촌 공덕근은 진천면에서 부유하게 살았기에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은 조카와 남편을 잃은 여동생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특히 조카 박찬영이 진천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자기 집에서 생활하게 했다. 하지만 외삼촌의 아낌없는 사랑과 달리 외숙모의 태도는 냉랭하기만 했다.
"왜 이렇게 밥을 많이 먹냐"고 구박받은 날 소년 박찬영은 밥상머리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무 말 없이 일어난 소년은 책가방을 들고 시골인 문봉리 용소마을로 무작정 걸었다. 4km 넘는 길을 걷는데 비는 추적추적 내렸다. 그 비를 다 맞고 3일을 앓아누웠다. 아버지 없는 설움은 소년 박찬영에게 평생의 아픔으로 남았다.
당시 창고 안 바닥에는 피가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로 고여 있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약 400명의 보도연맹원이 국군의 총탄과 수류탄 세례를 받고 심지어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받았으니 말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2~3일밖에 안 되었지만, 시신은 한여름 날씨로 인해 급속히 부패했다. 그러다 보니 유가족들은 피해자의 신체적 특징이나 집에서 나갈 때 옷차림새 등을 보고 찾아야 했다. 당시 아버지 홍복남(38세. 오창면 기암리)의 시신 수습 과정에 대해 아들 홍충의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아침에 아버지에게 아침밥을 드리러 창고에 가보니 창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죽어 있었고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사람들이 그륵그륵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창고 안은 피가 발목까지 차 있었고 피비린내가 진동했습니다.
아버지는 머리에 총을 맞은 상태로 돌아가셨는데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어 알아볼 수가 없어서 손톱과 (입고 있는 옷의) 바느질한 모양을 보고 신원을 확인했습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원 오창창고 보도연맹 사건, 2007)
발가락 보고 시신 찾아
▲ 서정안새끼발가락에 뼈가 없었던 희생자 서정안 ⓒ 박만순
서은석(1949년생)의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들 서정안(1923년생. 진천면 사석리 석박마을)이 오창창고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순간 정신을 놓았다. 잠시 후 가족과 친지들을 이끌고 오창면 장대리로 향했다. 오창국민학교 옆에 있는 창고에 가니 입이 딱 벌어질 만한 상황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폭격으로 창고의 지붕과 벽체는 모두 없고 나무 기둥만 있는 상태에서 찢긴 시신들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창고 안에는 찾아가지 않은 시신들이 100여 구 있었다.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해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고 목이 따가웠지만, 아들을 찾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런데 시신들의 복수가 차오르고 얼굴은 퉁퉁 부어, 아들을 어떻게 찾을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러던 차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같이 간 가족들에게 얘기했다. "새끼발가락만 살펴봐라." 그렇다. 서정안은 새끼발가락에 뼈가 없어 평소 생활하
는 데 곤란함을 겪었다.
가족들은 각자 흩어져서 시신들의 신발을 벗겨내 새끼발가락만 관찰했다. "여기 찾았어요"라는 외침이 터졌다. 새끼발가락에 뼈가 없어 물렁물렁한 시신이 있었다. 시신은 인근 공동묘지에 가매장했다가 며칠 후 이장을 했다.
서정안의 아버지와 달리 많은 이가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진천면 문봉리 박찬영(1949년생)도 아버지 박원종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경우다.
피의 살육제가 벌어진 후, 오창면 학소리에 살던 박찬영의 이모가 1차로 현장에 가 제부 박원종의 시신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2차로 박찬영의 어머니 공기순이 갔으나 역시 허사였다. 사실 박원종은 1차 집단사살(7월 11일 새벽 4시경)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고 한다.
1차 총질 후 같은 마을 김재현이 그에게 '나가자'고 했으나 창고 안에서 "물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이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물을 떠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김재현의 증언에 의하면 박원종은 창고 안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1950년 7월 11일 아침 8시 30분경, 미군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오창 양곡창고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 중 가족의 품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이들이 약 100명에 이른다.
▲ 박찬영증언자 박찬영 ⓒ 박만순
어깨 총상에 머큐로크롬만 발라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는 사람은 살려 주겠다."
몇 사람이 일어서자 군인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었다. 총을 맞고 신음하는 이와 예상치 못했던 군인들의 반응에 그때까지 살아 있던 이들의 분노, 허탈, 절망의 한숨 소리가 뒤섞였다.
그 와중에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오창면 각리 김창석(1929년생)은 죽기 살기로 탈출을 결심했다.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상태라 창고 뒤쪽으로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총소리가 잠잠해지자 그는 창고 뒤편의 녹슨 골함석을 부상을 입지 않은 어깨로 밀쳤다.
창고에서 탈출한 그는 미호천 옆 수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웅덩이 물을 먹으며 여천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가 당시 일본식 이름으로 불린 도라야마산 초입에 있던 금방앗간(광산방앗간)에 도착할 때까지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방앗간에서 고의적삼으로 갈아입은 그는 오창면 탑리 집 근처의 땅굴에 은신했다. 마침 청주대학교 근처에 살던 매형이 처가로 피난을 와, 굴을 파 몸을 피하고 있었다.
김창석이 굴에서 가족들의 도움으로 있는데, 상처 부위가 이미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인민군이 민간인들을 치료해 준다는 소문을 듣고 1950년 7월 12일 오근장을 경유해 청주 시내로 나왔다. 하지만 찾아간 곳에서는 일명 '빨간약'라 불린 머큐로크롬만 발라 줄 뿐이었다.
평생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
다음날 그는 피난 와 있는 청주연초제조창(현재의 문화제조창) 의무관을 찾아가 한 시간에 걸쳐 어깨 수술을 받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깨가 쑤셨다. 하지만 어깨 통증보다는 양곡창고에서의 4일 동안의 공포가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특히 국가를 수호한다는 군인이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면 살려주겠다'라고 공언한 후 일어난 이들에게 총질을 가한 것은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오창 양곡창고에서 살아난 이들이 92명이라고 진실규명했다. 그렇다면 그 92명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김창석을 포함해 생존자 모두가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다. 2005년 오창유족회가 결성된 날, 오창면사무소에서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었다. 그때 공개 증언을 했던 한 생존자는 55년 전의 악몽이 떠올라 집을 나갔다. 그를 찾기 위해 가족들은 동분서주했다.
진천면 문봉리 김재현(1925년생)도 2006년 오창창고 사건을 증언하는 과정에서 연신 불안과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심지어 경찰과 군인이 자신을 붙잡으러 오지 않을까 불안해했다.
이러한 불안과 공포, 분노, 절망의 감정들이 몇몇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92명의 생존자 모두에게 있었던 일이다. 군대에서 제대한 대한민국 남성들이 다시 입대하는 꿈을 30~40대까지 꾼다고 하는데, 죽음의 창고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창고에 갇히고, 총 맞고, 죽은 이의 피를 마시는 꿈을 수백 차례 꾸지 않았겠는가.
▲ 위령비오창 창고 현장 주변에 세워진 위령비 ⓒ 박만순
쌀 열 짝을 빼앗겨
진천면 상계리 신순철(1931년생)은 사석지서 김재옥, 나세찬 순경이 마을로 와 '아군을 위해 방공호를 파야 하니 삽과 괭이를 들고 지서로 오라'고 해, 동네 사람 30여 명과 함께 지서로 향했다.
신순철은 대한청년단 진천면 상계리 반장을 맡고 있었다. 동시에 보도연맹원이기도 했다. 그는 사실 좌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같은 마을 청년들이 "여기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품앗이가 일절 없을 줄 알아"라고 겁박해 민애청에 가입했다. 이 일로 인해 진천경찰서에서 며칠간 조사를 받은 그는 후일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지면서 자동으로 연맹원이 되었다.
전쟁 발발 후 방공호를 판다는 명분으로 마을 주민들이 사석지서로 소집되었을 때, 보도연맹원에 대한 심사, 분류가 있었다. 그는 평소의 활동과 대한청년단 상계리 반장이라는 직책이 감안돼 방앗간에 구금되지 않았다. 다음날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1950년 가을 사석지서 김아무개 순경과 군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소 한 마리와 쌀 열 짝을 빼앗아 갔다. 보도연맹원이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또한 신순철이 군에서 총기 오발 사고를 냈는데 상급자들은 그를 사상범으로 몰았다. 특별 휴가 한 달이 있었는데 취소되었고, 군 복무기간은 한정 없이 늘어져 6년 만에야 제대할 수 있었다.
1958년도에 진천경찰서에 갔는데 수사과장 책상 고무판 아래에 보도연맹원 명단이 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충북대책위원회, 기억여행, 2006) 국민보도연맹원은 '같은 국민으로서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닌 영원한 주홍 글씨에 불과함을 실감했다.
밥 많이 먹는다고 구박해
남편 박원종을 잃은 공기순에게 인공시절은 또 하나의 지옥이었다. 인민군이 점령하던 시절, 진천면 문봉리 용소마을(용소백이) 김민정(가명)은 집마다 방문하여 여성들에게 여맹(여성동맹)에 가입하라고 했다.
1차 가입 대상은 한국전쟁 초기 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었다. 그렇기에 공기순도 여러 차례 김민정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김민정은 자위대원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공기순이 가족들을 데리고 뒷산으로 피신해 있던 날, 김민정은 공기순 집의 장독대를 부수고 죽창으로 가재도구를 쑤셨다. 김민정은 비단 공기순 집에만 들이닥친 것이 아니라 마을 여러 집을 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인공시절,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용소마을 주민들은 인공시절이 유쾌하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군경 수복 후 김민정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받았다. 후유증으로 김민정은 오래 살지 못했다.
박찬영은 어릴 때 그리 어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 진천면에서 부유하기로 소문난 외삼촌의 존재 때문이었었다. 소 장사를 하던 외삼촌 공덕근은 진천면에서 부유하게 살았기에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은 조카와 남편을 잃은 여동생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특히 조카 박찬영이 진천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자기 집에서 생활하게 했다. 하지만 외삼촌의 아낌없는 사랑과 달리 외숙모의 태도는 냉랭하기만 했다.
"왜 이렇게 밥을 많이 먹냐"고 구박받은 날 소년 박찬영은 밥상머리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무 말 없이 일어난 소년은 책가방을 들고 시골인 문봉리 용소마을로 무작정 걸었다. 4km 넘는 길을 걷는데 비는 추적추적 내렸다. 그 비를 다 맞고 3일을 앓아누웠다. 아버지 없는 설움은 소년 박찬영에게 평생의 아픔으로 남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