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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 받고 나간 아빠가 죽었다... 대청호 아래 수장된 집단살인 사건

금융조합 창고로 부른 뒤 트럭에 실어 총살... 충북 광원마을서 벌어진 보도연맹원 학살

등록|2023.12.26 11:32 수정|2023.12.28 10:58

수몰된 뽕나무밭문의면 보도연맹원이 학살된 뽕나무밭. 지금은 대청호가 있다. ⓒ 박만순


"얼릉 갔다 올게. 잘 놀고 있어" 우천성(1912년생)은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막내 유순을 번쩍 안고 눈을 맞추었다. "아빠 어디 가는데?" "응 잠깐 면 소재지에 갔다 올 테니,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조금 전 작업복 차림으로 부리나케 집으로 와 햐얀 중의적삼으로 갈아입은 우천성은 딸 유순에게 따듯한 체온만 남긴 채 집 싸리문을 나섰다.

우천성은 괴곡리 우기미 마을 어귀에서 동생 석준(1922년생)을 만났다. 석준은 형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형님도 면 소재지에 가십니까?" 우천성·석준 형제는 부지런히 걸어 충북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문의면 소재지의 금융조합으로 갔다.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 창고에는 관내 보도연맹원 약 50명이 지서의 연락을 받고 모여들었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한여름이라 땀이 삐질삐질 흘렀지만 공기가 심상치 않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면 소재지인 미천리에 사는 김씨가 옆 사람에게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이야기했다.

"지서에 갇혀 있던 죽암리 사람 4명이 고은삼거리 방향으로 끌려갔다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먼저 모인 이들은 피반령으로 끌려갔다는데..." 훗날에야 밝혀진 일이지만 문의면 죽암리 보도연맹원 7명 중 4명은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에서 학살됐고, 문의면 1차 소집자들은 청원군 가덕면 피반령고개에서 군경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주·청원 국민보도연맹 사건', <2008년 하반기 보고서>)

"어떤 놈들이 떠드는 거야!" 경찰의 호통에 50여 개의 입이 순간적으로 봉해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들은 광목천과 철사로 뒷결박을 당한 채 트럭에 실려 문의면 덕유리 광원마을 뽕나무밭으로 이송됐다. 구금장소에서부터 '인간 사냥터'까지는 8km 거리였다.

그곳에는 전날 주민들을 동원해 파놓은 구덩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군인 간부의 지시에 따라 총구에 불이 붙자마자 보도연맹원들이 짚단 쓰러지듯 쓰러졌다. 1980년에 완공된 대청댐으로 인해 현재는 물속으로 마을이 가라앉아 그 흔적조차 알 수 없는 광원마을 뽕나무밭의 사연은 역사에서 거의 잊혀졌다.

수몰돼 푸른 강물만이 흐르는 덕유리 광원마을 비극이 발생한 것은 1950년 7월 13일 오전이었다. 뽕나무밭의 화약 냄새가 채 가라앉기도 전인 그날 오후 인민군이 청주시에 입성했다.

즉 대한민국 군경은 후퇴하기 몇 시간 전까지 '단 한 명의 보도연맹원이라도 씨를 말리겠다'는 일념으로 자신들의 악역을 맡았던 것이다.

뽕나무밭의 비극


김육현(1914년생)은 남편 우천성의 시신을 찾기 위해 광원마을 뽕나무밭으로 내달렸다. 배부른 시신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한여름이라 시신들은 급속히 부패돼 배는 부풀어 오르고 얼굴은 썩어 문드러졌다.

공동묘지로 변해버린 뽕나무밭에서 정신줄을 놓은 김육현은 몇 번이나 시신을 뒤적였으나 결국 남편을 찾지 못했다. 썩은 시신에서 나온 악취로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가 나올 것 같은 것보다는 내 남편 찾기 위해 남의 시신을 훼손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앞섰다.

우천성·석준의 형 우석범도 집안 사람들과 함께 동생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한참 만에 석준의 시신을 찾았는데, 모두가 입을 막았다. 총상으로 인해 크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유기분(1924년생)은 우석준의 시신을 수습해 문의면 괴곡리 뒷산에 묻었다. 아버지가 영원히 땅속에 묻히던 순간, 딸 순자(1946년생)는 집에 혼자 있어야만 했다. 집안 어른들이 어린 순자에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참혹한 모습으로지만 시동생은 시신을 수습했는데, 남편 우천성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김육현은 '혹시나 남편이 뽕나무밭에서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 있지나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사방팔방을 다녔다.

그런데 하루는 면 소재지에 있는 무당이 "물명당(물가 명당)에 잘 묻혔으니 찾지 마라"는 점괘를 내놓았다. 문의면 보도연맹원 학살이 저질러진 덕유리 광원마을 뽕나무밭 근처는 신탄진으로 통하는 오가리강이 있었기에, 남편도 결국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충북 청원군 문의면 괴곡리 우기미 마을 2명, 죽암리(1973년에 현도면으로 편입된) 7명을 포함해, 약 50명의 보도연맹원이 학살된 배경은 무엇인가?
 

▲ 문의면 보도연맹원 학살지 지도 ⓒ 카카오맵 캡처


글방을 운영한 사회주의자

해방 후 (전국농민회 총연맹) 문의면 농민회 회장을 맡은 이철현(가명)은 원래 가덕면 노현리(1990년에 문의면으로 재편입) 출신으로 연안이씨였다.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사회주의 활동을 했던 인물로 문의에서 글방을 운영해, 청년들에게 신사상(사회주의)을 유포시키고, 진보적인 사상을 전파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철현의 영향을 받은 문의·가덕면의 청년들은 해방 후 진보적인 농민운동·정당 활동에 앞장섰다. 마을마다 조직 책임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해방 후에는 남로당이나 농민회 가입 도장을 받으러 다녔다. 1949년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 이후로는 국민보도연맹 가입서에 도장을 받으러 다녔다.

보도연맹원 간부 중 일부는 전쟁 직후 보도연맹원 소집이 곧 죽음의 구렁텅이로 가는 것인 줄 짐작했다. 그런 연유로 소집에 응하지 않고 피신했는데, 문의면 괴곡리 이정수(가명)가 그런 경우였다.

그런데 그는 남쪽으로 피신했다가 군경 수복시 마을로 돌아왔다가 마을 사람들의 죽음을 알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남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는데,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자괴심 때문이었다.

청원군 미원면 운용리 신영우도 비슷한 경우였다. 미원지서장 김학주와 친밀했던 그는 지서장의 귀띔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으러 가는데 나만 빠질 수 없다"며 낭성면 머구미고개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혀 상반되는 경우도 있다. 청원군 가덕면 출신의 충북보도연맹 간사장 신형식은 전쟁이 일어나자 청주지검 검사장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했다. 전 청주경찰서 사찰과 형사 김동수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부산에서 권총을 차고 CIC 문관으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충북 보도연맹원 4천여 명이 죽음의 계곡으로 끌려가는 데 적지 않은 책임이 있는 이가 말이다.

전쟁과 죽음이라는 극한적 상황에서 정반대의 선택을 한 인물들의 양심이 대비되는 대목이다. 괴곡리 보도연맹원들의 죽음이 어찌 이정수의 책임일까만은 그는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불태워진 집

노현리 밤나무재 초가집에 불이 붙었다. 초가에 붙은 불은 삽시간에 가옥 전체를 불태웠다. 불을 끌 엄두도 못 내고 발만 구르는 이들은 송씨 집안 사람들이었다.

이 집 주인 송씨가 인공시절 완장을 찼다가 군경 수복시기인 1950년 9월 말 인민군을 따라 월북을 한 것 때문이었다. 이날 불태워진 초가집은 노현리에서만 3채였다.

단순히 집이 불태워진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찰들은 월북한 이의 부모들을 마을 한가운데에서 몰매를 가했다. 지서로 끌고 갈 수도 있었겠지만 주민들에게 '빨갱이 가족은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이런 일이 벌어진 데에는 인공시절 완장을 찬 이들이 부잣집의 소를 끌고 가고 토지개혁을 실시해, 지주의 토지를 뺏은 것이 그 원인이었다. 하지만 토지라는 부동산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법을 위반한 이들이 월북 등으로 마을에 없는데, 그 가족에게 죄를 묻는 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노현리 김재춘(가명)도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해방 후 문의면과 가덕면 좌익활동에 지도자 격이었던 그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그가 인공시절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군경수복시 부역혐의로 청주경찰서에 끌려가, 7년간의 형무소 생활을 해야 했다. 석방된 그는 문의·가덕면의 비문(碑文)을 대부분 쓰고, 청원군 유도협회장을 지내는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지식인으로서 사회봉사와 공적인 활동에 기여한 것이다.

아버지가 떠난 뒤
 

▲ 증언자 우유순 ⓒ 박만순


하얀 중의적삼을 입고 싸리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만이 유독 기억에 남은 우유순(1945년생)은 어릴 때 혼자 집을 지키는 것이 고통이었다. 엄마는 머리에 투가리(뚝배기의 방언)를 이고 문의면과 가덕면 일대에 팔러 다니느라 집에 없었다. 오빠들은 학교에 가고 나중에는 석회석 광산에 다니느라 집에 없었다.

문의면 괴곡리 우기미 마을은 다듬잇돌을 만드는 마을로 이름이 났다. 인근에 석회석 광산이 있고, 마을 뒷산이 돌산이라 성인 남성들은 돌을 캐고, 여성과 아이들은 마석으로 절구, 맷돌, 다듬잇돌 등을 만드는 일을 했다. 이런 연유로 우천성이 미원면 금융조합 창고로 가던 날도 산에서 돌을 캤던 것이다.

우유순이 문의국민학교(당시 초등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월사금(수업료)을 내지 못해 1학년 때 학교를 작파해야 했다. 그때부터 가사노동은 소녀 우유순의 몫이었다. 밥과 설거지, 청소는 기본이고 닭을 키우는 것도 그녀의 일이었다.

15세부터는 광산에 다녔는데, 오빠들이 모두 거쳐 간 일이었다. 17세부터는 담배 농사를 했는데, 1년 동안 고생한 결과 이웃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소녀의 큰오빠가 여동생에게 동탯국을 끓여주기 위해 한겨울에 동태를 사와 지붕에 걸어 놓았다. 다음날 아침 끓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소녀 우유순은 밤늦게 소변을 보러 가다가 뭔가 시퍼런게 있는 것을 보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도깨비다!" 때아닌 비명에 큰오빠가 나와보고 배를 잡았다. "그건 동태야."

1년 담배 농사 수입으로 송아지를 구매했다. 송아지를 키우는 일은 온전히 우유순의 몫이었다. 송아지가 어미소가 되었을 때는 소를 팔아 논을 샀다. 담배 농사에서 송아지 키우기로 이어진 일이 논을 장만하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23세에 결혼한 우유순은 저녁 때가 되면 달빛에 친정집이 보였다. 시댁은 친정인 우기미 마을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격'인 노현리 마을이었다. 친정집에 아버지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따스한 체온은 남아 있는 듯했다. 그렇게 반백 년의 세월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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