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지금보다 더 '팔려야' 한다, 왜냐면
[서평] 더 많은 사람이 각자의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책 <일인칭 가난>을 읽고
▲ <일인칭 가난> 안온 지음, 마티 출판 ⓒ 박순우
서점에서 잘 팔리는 책 중에 돈에 관한 책이 참 많다. 돈을 잘 모으는 법을 담은 책부터,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쓴 책, 돈이 많은 사람들의 습관을 담은 책 등 그 종류도 퍽 다양하다. 무엇을 중시하는 사회인지가 서점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가난에 대한 책은 어떨까. 돈의 정 반대편에 놓인 것만 같은 가난이라는 키워드가 담긴 책은 얼마나 쓰이고 있고, 서점에서는 얼마나 팔리고 있을까.
요즘 들어 자꾸 '가난'과 관련된 책들을 손에 쥐게 된다. 은유 작가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부터, 강지나 작가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안온 작가의 <일인칭 가난>에 이르기까지.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과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는 인터뷰 책이다.
<일인칭 가난>은 좀 더 적극적이다. 앞의 두 책과 달리 인터뷰 형식이 아닌 당사자가 직접 목소리를 냈다. 제목 그대로 일인칭의 시점으로 가난을 통과한 이야기를 써내려 간 것이다. 저자는 20여 년 동안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왔다. 멸균 우유, 주공아파트 등 가난을 상징하는 수많은 이름들을 거치며 어른이 되었다.
그가 겪은 가난은 불친절했다. 멸균 우유는 학교에서 공개적으로 번호를 불려 받아야 했고(얼마 전부터 배달 형태로 바뀌었다고 한다), 행정복지센터는 부모가 정말 장애가 있는지, 지급 받은 쌀을 진짜 본인이 먹었는지를 캐물었다. 가난을 공개하고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수급자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작은 자동차 하나 가질 수 없고, 돈을 더 벌어서도 안 된다. 이런저런 국가 지원을 받으려면 '우수한 학업 성적'은 필수다.
정치인들은 약속도 하지 않고 찾아와 머리를 쓰다듬는다. 빈곤의 진짜 이유를 들여다 보지는 않고 조건부 지원과 전시용 가난만이 남은 사회인 것. 누구를 위한 행정이고 누구를 위한 정치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가난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갑자기 병을 얻어 시각장애인이 된 뒤 알코올중독이 되었고,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무릎부상을 입은 뒤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만약 갑자기 장애를 얻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재활 시스템이 있었다면. 여성의 경력이 단절되지 않고 저임금이 아니었다면. 술에 대해 좀 더 엄격한 제도와 문화가 있었다면. 가난해도 고기를 사서 제사상에 올려야만 하는 가부장제가 없었다면. 가정폭력을 가정만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일인칭의 시점으로 가난의 실체를 들여다 보니 수많은 '만약'이 뒤따른다. 우리는 언제까지 '만약'의 늪에서 허우적대야 할까. 언제까지 가난을 게으름의 결과로 치부하고, 개인의 능력 부족 탓으로 돌리고,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납작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 저자는 이런 세상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가족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게 됐지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가족이 아니라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과 세트였다.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었)다."
레프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불행은 결코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난을 불행과 동의어로 생각하는 순간, 모든 문제의 근원은 가난 아래에 처참히 짓밟힌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단순한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이 문제를 풀 수 없다. 마치 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저출생 문제처럼 말이다.
솔직히 말해 가난을 담은 책에는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가난과 불행을 동의어로 취급하는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내 마음이 지옥이면 이런 책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다. 내 마음에 여유가 생겨야 비로소 이런 책들에 손을 뻗게 된다. 아픔을 예감하며 넘겨야 하는 책이니까.
하지만 용기 내어 책을 펼치고 나면 그 이후의 나는 이전의 나와는 조금 달라진다. 더 소유하는 것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가난이라는 두 글자를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치거나 마주한, 저마다의 가난
바야흐로 상대적 가난의 시대다. <일인칭 가난>처럼 절대적인 가난도 존재하지만 상대적인 가난에 빠져, 높은 연봉과 생활 수준에도 결코 만족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이 참 많다. 절대적 가난이든 상대적 가난이든, 그 어떤 가난의 형상이라도 좋으니 가난이 더 쓰이고 더 팔리기를 바란다. 쓰인 글들이 산처럼 쌓여, 그 누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를 소망한다.
이왕이면 현란한 표지와 날렵한 제목을 더해서, 누구라도 사서 손에 쥐고 싶을 만큼 탐나게 멋지게 똑소리 나게 가난을 팔아먹었으면 좋겠다. 마치 돈과 부자에 관한 책이 그러한 것처럼. 독립출판과 인터넷 세상이 활발해진 지금, 가난한 이들이 망설이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다. 안온 작가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일갈한 것처럼.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책을 쓰고 팔고 사는데, 가난이라고 못 팔아먹을까. 더 쓰이고 더 팔려야 할 것은 가난이다."
"가난의 이야기가 두꺼워지길, 다른 가난의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이고 뭉치길,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알아가길 바라면서."
▲ 우리가 마주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가난인지도 모른다(자료사진). ⓒ 픽사베이
<일인칭 가난>은 학교 보호자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책이었다. 서늘한 봄밤, 돌봄노동을 잠시 내려두고 혈혈단신 모인 보호자들은 저마다의 가난을 꺼내 보였다. 각자가 경험한 가난, 각자가 목격한 가난, 각자가 외면한 가난까지. 이 책은 놀랍게도 모두의 기억 한 자락과 맞닿아 있었다. 절대적 가난이든, 상대적 가난이든, 우리는 모두 가난을 스치거나 마주한 사람이었으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가난인지도 모른다. 가난은 한 인간의 가장 아픈 곳일 가능성이 크다.
서로의 아픔이 더 이야기되고, 더 활자화되길. 더 많은 가난의 이야기가 흘러 넘쳐 강물처럼 흐르길. 그 강물에 모두 발을 담그고 가난 아래 어지럽게 얽힌 문제의 돌멩이들을 직접 매만질 수 있기를. 사랑도 가난도 말해야 알 수 있다. 알아야 해결할 수 있고.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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