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손님'들이 한수면 황강리(충북 제천)에 들어섰을 때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고양이와 개도 잠든 때였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밤손님을 안내하는 이가 황강리 출신이기에 지서를 찾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지서 앞의 나지막한 능선에서 '탕' 하는 소리가 났다. 총소리를 신호로 일단의 무리들이 지서로 뛰어들었다. "꼼짝 마!" 하는 소리와 함께 밤손님이 공포를 쐈다.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순경이 화들짝 놀라 뒷문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그는 구구식 장총을 메고 강쪽으로 뛰어가 진목에서 응원병을 요청했다.
지서장 최근성은 당황하지 않고 대응 사격을 했다. 지서 안에는 최 지서장 혼자였지만 그는 훈련된 이였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화력의 열세로 지서장은 부상을 당하고 마을로 도망갔다. 어떤 이의 집 나뭇가리 속으로 숨었다.
금고 열쇠가 없어 죽어
밤손님들은 지서장 뒤쫓는 것을 그만뒀다. 지서장 한 명 죽이는 것이 그날의 주된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 타깃은 금융조합(농협의 전신)이었다.
지서 가까이에 있던 금융조합에도 숙직자 한 명밖에 없었다. 상무이사 이영호는 불시에 들이닥친 불청객 때문에 당황했다. 총을 들이댄 밤손님들이 현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금고를 열기 위해서는 열쇠 2개가 필요했다. 하나는 숙직자가 갖고 있었지만 다른 하나는 담당 직원이 갖고 있었다. 그런데 담당 직원은 이미 퇴근한 상태였다.
이영호 상무이사가 그런 사정을 하소연하자 밤손님들은 절망했다. 사실 이날 작전의 대외적 목표는 한수면 소재지를 습격해서 빨치산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즉 월악산 빨치산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속내는 금융조합 금고를 털어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금융조합을 점거했지만 10원 한 장도 건지지 못해 화가 난 빨치산들은 이영호에게 총알을 안겼다.
다음 목표는 면사무소. 하지만 면사무소에도 숙직자밖에 없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터였다. 금융조합은 현금을 털기 위한 것이었기에 누가 숙직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면장이 없는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빨치산들은 한수면장이 살고 있는 서창리로 이동했다. 이한규 면장은 불청객들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월악산 빨치산의 한수면 소재지 습격으로 면장과 금융조합 이사를 포함해 4명이 귀한 목숨을 잃었다. 1949년 1월 12일의 일이다(국사편찬위원회, '6.25를 전후한 월악산 지역의 소요', 2008).
사건의 불똥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격'으로, 빨치산들을 검거하지 못한 제천경찰서는 생뚱맞게 화풀이를 했다. 당시 서울에 살고 있던 이구영을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한 것이다.
현직 국회의원이 구명운동
'부대장에 이구영, 제1대장에 김기한, 제2대장은 윤충호', 이런 식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경찰서에서는 무조건 몽둥이찜질을 했고 과학수사라는 말은 구경도 못 했다. 이구영을 포함해 서울에 살고 있던 한수면 출신 젊은이 6~7명은 경찰의 고문에 몸이 너덜너덜해졌다.
이구영은 이틀 동안 여섯 번이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경찰은 어떻게든 자백을 받아 사건을 억지로 만들려고 물고문, 전기고문까지 동원했다. 그래도 끝까지 부인하니 "네가 눈이 너무 작아 사람을 죽이고도 안 죽였다고 한다"면서 사정없이 때렸다.
없던 사실도 시인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그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이가 있었다. 현직 국회의원 류홍렬이었다. 류홍렬은 "이구영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적극적으로 구명운동을 해줬다. 또한 공범이라고 지칭한 윤충호의 외삼촌도 구명운동을 했다. 그 역시 현직 국회의원이었다.
국회의원 2명이 각서를 써줘 윤충호가 석방됐다. 주범(?)이 풀려나니 사건은 흐지부지됐다. 이로 인해 이구영도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그렇다면 제천군 지역구 국회의원은 왜 이구영을 변호했는가? 이구영이 당시 좌익조직에 몸 담고 있는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사실 미군정은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를 했다.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때마다 제천에서 이구영이 1위를 했다. 미군정 입장에서 보면 남로당의 핵심 활동가인 이구영이 국회의원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군정은 이구영을 포함한 남로당과 중도정당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실시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좌익진영과 중도계가 설 자리는 없었다.
결국 이구영은 출마하지 못했고 일제강점기 금융조합 서기와 해방 후 청풍면장을 지낸 류홍렬이 당선됐다. 그러자 류홍렬은 이구영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 연유로 류홍렬은 이구영 구명운동에 나선 것이다(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2001).
4명에 사형 언도
"작년 10월 인민항쟁의 일환인 충주인민항쟁 검거자에 대한 특별군정재판은 거월(1947년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다음과 같은 언도가 있었다 한다. 사형: 김용환, 이정, 신재식, 유영태(이상 부평형무소 수감) 무기징역: 한기봉, 박희철, 송현기(이상은 당일 청주형무소 수감)."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의 1946년 10월 항쟁 주도자 선고공판에 관한 기사다(<민중주보> 1947.5.9.).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와 친일 경찰에 대한 반감, 독립 국가 수립이 지연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결합돼 대구에서 시작된 1946년 10월 항쟁은 대구·경북을 시발로 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땅끝마을 해남에서의 추수봉기와 충북 영동에서의 영동경찰서 습격 사건이 그것이다.
충주에서는 10월 들어 약 2주일 동안 항쟁이 계속된 것으로 보이며 도시 지역에서 시작해 면 단위로 확대됐다. 충주 10월 항쟁은 좌익계열 지식인, 활동가, 지역 명망가, 공장과 광산노동자, 지역주민이 하나가 돼 참가했다.
충주 10월 항쟁의 단초는 9월의 경찰과 우익의 테러였다. 9월 24일 우익이 좌익 진영의 간판을 모두 파괴했다. 9월 25일에는 통행금지 시간 이후 민청(조선민주청년동맹)사무소를 습격해 유리창을 파괴했고, 숙직원을 납치 구타했다.
9월 26일에는 오후 10시 반께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우익들에 대해 자위단원들이 반격하려 하자 경찰관이 나타나 자위단원만 체포했다. 경찰과 우익은 주택과 가구를 파괴하고 가족을 구타했다. 또한 좌익 동조자라는 이유로 의사 1명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10월 2일에는 장날을 이용해 독립촉성국민회 주최로 청년 궐기대회를 개최한 뒤 오후 8시 만취한 상태로 좌익에 대한 테러를 강행했다. 계속된 우익과 경찰의 테러는 10월 초 대규모 민중봉기로 폭발했고 확산됐다.
10월 8일에는 용산동 방면에서 시내로 진출하려는 시민들과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이 희락목욕탕(성내동 399번지) 부근에서 충돌하면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찰관 사망 사건 이후 경찰과 우익단체인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아래 독청)은 충주 각지에서 파괴 행위를 감행했고, 부녀자의 머리를 자르는 등 잔악한 행위를 일삼았다(전홍식, <역사도시 충주의 발자취와 기억>, 2021 / 심지연, <대구10월항쟁 연구>, 1991).
충주 10월 항쟁 주모자는 충주경찰서에 검거돼 사형과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다행히 구속한 면한 이들 중 일부가 월악산에 입산했다. 이것이 월악산 빨치산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빨치산 대장은 동학대접주의 손자
월악산 빨치산 형성의 기원은 충주에서 발생한 10월 항쟁의 가담자 중 일부가 월악산에 입산하면서다. 그런데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은 1948년 10월 여순항쟁 이후의 일이다. 제주 도민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는 군사봉기를 일으켰다.
지역민들이 이에 호응해 일어난 사건이 여순항쟁이다. 이후 토벌대에 쫓긴 군인들이 지리산을 포함한 산악지역으로 이동해 야산대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들 중 일부가 월악산까지 진출했으며, 이것이 본격적인 월악산 빨치산 활동의 계기가 됐다.
월악산에는 중석을 생산한 월악광산이 있었다. 월악광산 노동자 중에는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1946년 8월 15일부터 11월까지 있었던 전남 화순탄광 사건을 보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월악산 빨치산의 형성에는 충주의 10월 항쟁 세력, 여순항쟁 세력, 의식적인 광산노동자들의 화학적 결합이 주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 멀리 보면 일제강점기 말 이구영이 주도한 '월악동지회'가 빨치산운동의 토대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징용과 징병을 거부한 조선 청년들이 월악산으로 모이게 됐는데, 그중 일부를 한수면 북노리 출신의 이구영이 조직한 것이 '월악동지회'다.
월악산 곳곳에 있는 굴은 빨치산 아지트로 이용되기도 했다. 보덕암 근처에 있던 따백이 굴(일명 '따뱅이')도 마찬가지다. 홍택주(1936년생)는 한국전쟁 전후에 한수면 뒷산에서 우연히 빨치산 아지트를 목격했다.
"굴을 파고는 그 위에 소나무를 깔고 흙으로 덮었어요. 그곳에 숨어 있는 이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숨구멍도 만들었어요." - 정택주 증언
그의 증언은 유격 투쟁 참가자와 지도자에 관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08년도에 한수면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구술증언 자료집에 의하면 1947년도에 제천군 한수면 송계리에 들어온 서북청년회의 횡포가 마을 주민들을 빨치산으로 내몰았다고 한다.
하지만 홍택주는 송계리 청년들이 지역 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아 자발적으로 월악산에 입산한 것으로 기억한다. 젊은이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친 이들은 한수면 북로리의 이구영과 충주군(현재 충주시) 살미면 무릉리 출신의 최문용이다. 최문용은 무릉리 부잣집의 자제이자 일본에서 유학한 사람이다.
물론 이구영과 최문용이 빨치산 활동을 한 적은 없다. 이들은 해방 후에 서울에서 활동을 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지역민들에게 끼친 사상적 영향력이 매우 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월악산 빨치산 활동의 지도자는 누구였을까? 월악산 전체 지도자는 확인되지 않지만 한수면을 관할하는 대장(중대장)은 동학대접주 성두환(1840~1894)의 손자 성아무개로 증언되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 자료).
즉 동학농민운동과 구한말 의병운동의 후예가 월악산 빨치산운동의 사상적 지도자이자 실제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최초 활동은 남한만의 단독선거 저지 투쟁이었다. 봉화 시위, 삐라(선전물) 살포, 투표함 탈취 등이 주요한 투쟁방식이었다.
지서 앞의 나지막한 능선에서 '탕' 하는 소리가 났다. 총소리를 신호로 일단의 무리들이 지서로 뛰어들었다. "꼼짝 마!" 하는 소리와 함께 밤손님이 공포를 쐈다.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순경이 화들짝 놀라 뒷문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그는 구구식 장총을 메고 강쪽으로 뛰어가 진목에서 응원병을 요청했다.
금고 열쇠가 없어 죽어
▲ 열쇠. ⓒ pexels
밤손님들은 지서장 뒤쫓는 것을 그만뒀다. 지서장 한 명 죽이는 것이 그날의 주된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 타깃은 금융조합(농협의 전신)이었다.
지서 가까이에 있던 금융조합에도 숙직자 한 명밖에 없었다. 상무이사 이영호는 불시에 들이닥친 불청객 때문에 당황했다. 총을 들이댄 밤손님들이 현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금고를 열기 위해서는 열쇠 2개가 필요했다. 하나는 숙직자가 갖고 있었지만 다른 하나는 담당 직원이 갖고 있었다. 그런데 담당 직원은 이미 퇴근한 상태였다.
이영호 상무이사가 그런 사정을 하소연하자 밤손님들은 절망했다. 사실 이날 작전의 대외적 목표는 한수면 소재지를 습격해서 빨치산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즉 월악산 빨치산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속내는 금융조합 금고를 털어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금융조합을 점거했지만 10원 한 장도 건지지 못해 화가 난 빨치산들은 이영호에게 총알을 안겼다.
다음 목표는 면사무소. 하지만 면사무소에도 숙직자밖에 없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터였다. 금융조합은 현금을 털기 위한 것이었기에 누가 숙직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면장이 없는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빨치산들은 한수면장이 살고 있는 서창리로 이동했다. 이한규 면장은 불청객들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월악산 빨치산의 한수면 소재지 습격으로 면장과 금융조합 이사를 포함해 4명이 귀한 목숨을 잃었다. 1949년 1월 12일의 일이다(국사편찬위원회, '6.25를 전후한 월악산 지역의 소요', 2008).
사건의 불똥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격'으로, 빨치산들을 검거하지 못한 제천경찰서는 생뚱맞게 화풀이를 했다. 당시 서울에 살고 있던 이구영을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한 것이다.
▲ 한수면 습격사건 상황도한수면 습격사건 상황도. ⓒ 네이버지도
현직 국회의원이 구명운동
'부대장에 이구영, 제1대장에 김기한, 제2대장은 윤충호', 이런 식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경찰서에서는 무조건 몽둥이찜질을 했고 과학수사라는 말은 구경도 못 했다. 이구영을 포함해 서울에 살고 있던 한수면 출신 젊은이 6~7명은 경찰의 고문에 몸이 너덜너덜해졌다.
이구영은 이틀 동안 여섯 번이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경찰은 어떻게든 자백을 받아 사건을 억지로 만들려고 물고문, 전기고문까지 동원했다. 그래도 끝까지 부인하니 "네가 눈이 너무 작아 사람을 죽이고도 안 죽였다고 한다"면서 사정없이 때렸다.
없던 사실도 시인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그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이가 있었다. 현직 국회의원 류홍렬이었다. 류홍렬은 "이구영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적극적으로 구명운동을 해줬다. 또한 공범이라고 지칭한 윤충호의 외삼촌도 구명운동을 했다. 그 역시 현직 국회의원이었다.
국회의원 2명이 각서를 써줘 윤충호가 석방됐다. 주범(?)이 풀려나니 사건은 흐지부지됐다. 이로 인해 이구영도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그렇다면 제천군 지역구 국회의원은 왜 이구영을 변호했는가? 이구영이 당시 좌익조직에 몸 담고 있는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사실 미군정은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를 했다.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때마다 제천에서 이구영이 1위를 했다. 미군정 입장에서 보면 남로당의 핵심 활동가인 이구영이 국회의원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군정은 이구영을 포함한 남로당과 중도정당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실시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좌익진영과 중도계가 설 자리는 없었다.
결국 이구영은 출마하지 못했고 일제강점기 금융조합 서기와 해방 후 청풍면장을 지낸 류홍렬이 당선됐다. 그러자 류홍렬은 이구영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 연유로 류홍렬은 이구영 구명운동에 나선 것이다(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2001).
▲ 이구영제천 한수면 출신의 이구영. 이구영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의병운동의 지도자였다. ⓒ 오마이뉴스
4명에 사형 언도
"작년 10월 인민항쟁의 일환인 충주인민항쟁 검거자에 대한 특별군정재판은 거월(1947년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다음과 같은 언도가 있었다 한다. 사형: 김용환, 이정, 신재식, 유영태(이상 부평형무소 수감) 무기징역: 한기봉, 박희철, 송현기(이상은 당일 청주형무소 수감)."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의 1946년 10월 항쟁 주도자 선고공판에 관한 기사다(<민중주보> 1947.5.9.).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와 친일 경찰에 대한 반감, 독립 국가 수립이 지연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결합돼 대구에서 시작된 1946년 10월 항쟁은 대구·경북을 시발로 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땅끝마을 해남에서의 추수봉기와 충북 영동에서의 영동경찰서 습격 사건이 그것이다.
충주에서는 10월 들어 약 2주일 동안 항쟁이 계속된 것으로 보이며 도시 지역에서 시작해 면 단위로 확대됐다. 충주 10월 항쟁은 좌익계열 지식인, 활동가, 지역 명망가, 공장과 광산노동자, 지역주민이 하나가 돼 참가했다.
충주 10월 항쟁의 단초는 9월의 경찰과 우익의 테러였다. 9월 24일 우익이 좌익 진영의 간판을 모두 파괴했다. 9월 25일에는 통행금지 시간 이후 민청(조선민주청년동맹)사무소를 습격해 유리창을 파괴했고, 숙직원을 납치 구타했다.
9월 26일에는 오후 10시 반께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우익들에 대해 자위단원들이 반격하려 하자 경찰관이 나타나 자위단원만 체포했다. 경찰과 우익은 주택과 가구를 파괴하고 가족을 구타했다. 또한 좌익 동조자라는 이유로 의사 1명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10월 2일에는 장날을 이용해 독립촉성국민회 주최로 청년 궐기대회를 개최한 뒤 오후 8시 만취한 상태로 좌익에 대한 테러를 강행했다. 계속된 우익과 경찰의 테러는 10월 초 대규모 민중봉기로 폭발했고 확산됐다.
10월 8일에는 용산동 방면에서 시내로 진출하려는 시민들과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이 희락목욕탕(성내동 399번지) 부근에서 충돌하면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찰관 사망 사건 이후 경찰과 우익단체인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아래 독청)은 충주 각지에서 파괴 행위를 감행했고, 부녀자의 머리를 자르는 등 잔악한 행위를 일삼았다(전홍식, <역사도시 충주의 발자취와 기억>, 2021 / 심지연, <대구10월항쟁 연구>, 1991).
충주 10월 항쟁 주모자는 충주경찰서에 검거돼 사형과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다행히 구속한 면한 이들 중 일부가 월악산에 입산했다. 이것이 월악산 빨치산의 시초라 할 수 있다.
▲ 충주 10월항쟁 기사충주 10월 항쟁 기사. 민주중보 1947.5.9. ⓒ 민중주보
빨치산 대장은 동학대접주의 손자
월악산 빨치산 형성의 기원은 충주에서 발생한 10월 항쟁의 가담자 중 일부가 월악산에 입산하면서다. 그런데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은 1948년 10월 여순항쟁 이후의 일이다. 제주 도민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는 군사봉기를 일으켰다.
지역민들이 이에 호응해 일어난 사건이 여순항쟁이다. 이후 토벌대에 쫓긴 군인들이 지리산을 포함한 산악지역으로 이동해 야산대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들 중 일부가 월악산까지 진출했으며, 이것이 본격적인 월악산 빨치산 활동의 계기가 됐다.
월악산에는 중석을 생산한 월악광산이 있었다. 월악광산 노동자 중에는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1946년 8월 15일부터 11월까지 있었던 전남 화순탄광 사건을 보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월악산 빨치산의 형성에는 충주의 10월 항쟁 세력, 여순항쟁 세력, 의식적인 광산노동자들의 화학적 결합이 주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 멀리 보면 일제강점기 말 이구영이 주도한 '월악동지회'가 빨치산운동의 토대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징용과 징병을 거부한 조선 청년들이 월악산으로 모이게 됐는데, 그중 일부를 한수면 북노리 출신의 이구영이 조직한 것이 '월악동지회'다.
월악산 곳곳에 있는 굴은 빨치산 아지트로 이용되기도 했다. 보덕암 근처에 있던 따백이 굴(일명 '따뱅이')도 마찬가지다. 홍택주(1936년생)는 한국전쟁 전후에 한수면 뒷산에서 우연히 빨치산 아지트를 목격했다.
"굴을 파고는 그 위에 소나무를 깔고 흙으로 덮었어요. 그곳에 숨어 있는 이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숨구멍도 만들었어요." - 정택주 증언
그의 증언은 유격 투쟁 참가자와 지도자에 관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08년도에 한수면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구술증언 자료집에 의하면 1947년도에 제천군 한수면 송계리에 들어온 서북청년회의 횡포가 마을 주민들을 빨치산으로 내몰았다고 한다.
하지만 홍택주는 송계리 청년들이 지역 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아 자발적으로 월악산에 입산한 것으로 기억한다. 젊은이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친 이들은 한수면 북로리의 이구영과 충주군(현재 충주시) 살미면 무릉리 출신의 최문용이다. 최문용은 무릉리 부잣집의 자제이자 일본에서 유학한 사람이다.
물론 이구영과 최문용이 빨치산 활동을 한 적은 없다. 이들은 해방 후에 서울에서 활동을 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지역민들에게 끼친 사상적 영향력이 매우 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월악산 빨치산 활동의 지도자는 누구였을까? 월악산 전체 지도자는 확인되지 않지만 한수면을 관할하는 대장(중대장)은 동학대접주 성두환(1840~1894)의 손자 성아무개로 증언되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 자료).
즉 동학농민운동과 구한말 의병운동의 후예가 월악산 빨치산운동의 사상적 지도자이자 실제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최초 활동은 남한만의 단독선거 저지 투쟁이었다. 봉화 시위, 삐라(선전물) 살포, 투표함 탈취 등이 주요한 투쟁방식이었다.
▲ 국립공원 사진공모전 대상 수상 작품인 자연 수묵화(김재근. 월악산) ⓒ 환경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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