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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방망이로 공놀이하던 '서청'이 저지른 횡포

한국전쟁 전후 충북 제천 등지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 생명의 존엄성은 어디에

등록|2024.08.30 13:26 수정|2024.08.30 13:26
한쪽 다리를 번쩍 들은 투수가 힘차게 공을 던졌다. 타자가 배트를 휘둘러 공이 포물선을 그렸다. 홈런을 친 것 같아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으로 뛰던 타자는 1루로 가기 전에 멈췄다. 투수가 뜬공으로 잡아냈기 때문이다.

사실 타자가 친 공은 짚으로 둥글게 만든 것이기에 멀리 나갈 수가 없었다. 또한 배트라는 것은 빨래방망이에 불과했다. 유치한 것 같지만 당시에 야구라는 것은 시골 사람들이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다. 기껏 돼지 오줌보를 차며 노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서북청년회원들이 짚 뭉치와 빨래방망이로 야구 놀이를 할 때였다. 우연히도 지게를 진 마을 청년 정철수(가명)가 그곳을 지나가게 됐다. "야. 이리 와!" "왜요?" "잔말이 많아!"

야구를 하던 이들은 일시에 정철수에게 달려들어 몰매를 가했다. 지게가 부서지고 정철수의 이가 부러진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흙담 너머로 이를 지켜보던 석아무개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감히 어떤 싸움판이라고 끼어들겠는가.

무소불위의 서북청년회

▲ 1948년 5월 31일 국회 개원식 날 국회의사당 앞에서 서북청년회가 소련 철수를 주장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 ⓒ NARA/박도


서청(서북청년회) 사람들이 누구이길래 제천군(현재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서 행패를 부렸는가? 소련의 힘을 등에 업은 김일성은 북조선에서의 개혁정책을 폈다. 특히 1946년도에 시행한 무상몰수에 의한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은 농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친일파 청산도 남조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철저하게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지주와 친일 관료·경찰 출신 공무원, 기독교인들이 남하했다. 이들은 대부분 미군정이 통치하고 있던 남조선을 택했다. 이들은 빈 몸으로 3.8선을 내려와 연고가 없는 남조선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흔히들 이들은 '3.8 따라지'로 불렸다.

결국 돈도 없고 '빽(권력 기반)'도 없는 이들이 비빌 언덕이라고는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뭉치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만의 조직을 만든 것이 서북청년회다.

1946년 11월 30일 서울 종로 YMCA 대강당에서 창립식을 한 서북청년회는 본격적으로 반공 전선의 최일선에 섰다. 1947년 전국 각지로 회원들을 파견해 테러를 일삼았다. 이들은 충북 영동군의 영동읍뿐만 아니라 황간면에도 파견돼 적산(일제강점기 시기 일본인 건물과 재산)을 무단점거해 사무실로 사용했다.

부역혐의자 학살 터한수면 송계리 주민들이 경찰에게 부역혐의로 학살된 터. ⓒ 박만순


제천 한수면도 마찬가지였다. 한수면 소재지인 황강리뿐만 아니라 면내에서 두 번째로 큰 마을인 송계리에도 진출했다. 송계리에 파견된 서청회원 5명은 신화준의 사랑방에 거주하면서 마을 젊은이에 대한 무차별적 구타를 가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실시한 구술자료에 의하면 송계리에 파견된 서청회원이 18명이라고 한다.

어쨌든 송계리에 파견된 서청회원들은 무위도식하면서 송계리 청장년들에 대한 행패를 일삼았다. 그들의 식사는 마을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제공했다.

사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식사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불청객들이 "닭 내놔라, 돼지 놰나라"고 강요한 것이다. 심지어 여성을 성폭행하기도 했다. 당시를 회상하는 지역 주민들은 한결같이 서청을 끔찍한 대상으로 기억하며 몸을 떨었다(국사편찬위원회, '6.25를 전후한 월악산 지역의 소요', 2008 / 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2001).

사실 1948년 4.3 제주도민항쟁에 파견됐던 서청회원들이 경찰 계급장을 달고 제주도민을 무차별로 학살한 것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또 이들은 태극기와 이승만 초상화를 강매하기도 해 제주도민들에게 원성을 샀다. 송계리에서의 서청 횡포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의인' 최근성

"네. 네. 알겠습니다." 지서장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방금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제천경찰서장이 "보도연맹원들을 전부 소집해 경찰서로 보내라"고 한 것이었다.

'전쟁이 터졌는데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를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들을 제거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전시(戰時)에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즉결 처형감이었다.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

"각자 마을로 흩어져서 보도연맹원들에게 보리쌀 두 말씩 갖고 지서로 오라고 하시오." 차석을 포함한 순경들이 송계리, 서창리, 한천리 등지로 자전거를 몰았다. 자루에 보리쌀을 담은 이들이 하나, 둘 지서로 모였다. 이들은 도착하는 즉시 유치장과 지서 창고에 구금됐다.

제천경찰서에서 오기로 한 트럭이 감감무소식이었다. 하필 면소재지 앞의 남한강물이 장마로 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을 제천으로 못 보낼 일도 아니었다. 시간이 약간 지체될 뿐이었다. 최근성 지서장은 더이상 결정을 미룰 수 없었다. 누구랑 상의할 일은 더군다나 아니었다.

"이제 집으로 가도 좋소. 쓸데없이 다른 곳으로 갈 생각 말고 빨리 집으로 가시오." 보도연맹원들이 혹여나 제천 방향으로 갈까봐 걱정이 돼서였다. 영문을 모르는 보도연맹원들은 농번기에 오라 가라 하는 지서장의 지시에 툴툴거리며 발걸음을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이후 알려진 일이었지만 인근 충주군(현재 충북 충주시) 살미면에서는 충주경찰서로 간 보도연맹원 70여 명이 돌아올 수 없는 골짜기로 끌려갔다. 그런데 제천 한수면에서는 보도연맹원 희생자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순전히 최근성 지서장 덕분이었다.

혹시나 최지서장은 보도연맹원들을 살려줄 만한 특별한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그렇기는커녕 최 지서장은 좌익들과 안 좋은 경험이 있었다. 1년 반 전인 1949년 1월 12일 한수면 소재지를 습격한 빨치산들에게 죽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부상으로 그쳤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최 지서장은 그 일과 이번 일은 별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당시 일은 빨치산이 한 것뿐이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초록이 동색'이라고 빨치산과 보도연맹원들을 같은 세력으로 생각했을 텐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최근성은 충주군 살미면 문화리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강제징병으로 남양군도까지 갔다 온 일이 있었다. 해방 후 경찰에 입문한 그는 제천의 쉰들러, 제천의 의인이었다.

동학대접주 며느리가 강으로 끌려가

▲ 인공시절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된 송계국민학교 터. ⓒ 박만순


홍승섭·홍재모 부자가 송계국민학교로 끌려간 것은 1950년 9월 초였다. 며칠 전 석수천이 청주의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연행되는 모습을 구경했다는 이유였다.

송계리 이장이었던 석수천은 제헌의회 선거 때 목숨을 걸고 투표함을 지켰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지서장으로 특채됐었다. 이런 그가 한국전쟁 직후 문경으로 도피했다가 붙잡혀 오는데 구경한 것이 석수천을 동정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던 송계국민학교로 끌려간 홍재섭·홍재모 부자는 모진 수모를 당했다. 완장 찬 이들의 가족에 의해서였다. 이 사건이 발발한 지 한 달쯤 지나서였다. 이번에는 세상이 180도 달라졌다.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대한민국 군경이 제천과 한수면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인민위원회 시절 감투 쓴 이들은 다시 월악산에 입산했다. 그중 리더격 이었던 이들은 3.8선을 넘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세상이 조만간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월악산 동굴에 은신했다. 문제는 완장 찬 이들의 가족이었다. 마을에는 여성과 노인, 아이들뿐이었다.

송계국민학교로 송아무개의 어머니가 뒷결박을 당한 채 끌려왔다. 빨치산 중대장의 어머니이자 동학대접주 성두환의 며느리였다. 그녀의 죄는 빨치산 중대장의 어머니라는 이유뿐이었다. 나머지 10여 명도 비슷한 이유였다.

이들은 송계국민학교 옆 강가에서 경찰에 의해 공개 처형됐다. 시신들이 마을 사람들에 의해 실려 가는 것을 당시 소년 홍택주(1936년생)는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숯검댕이 칠한 여성들

"아가, 가만 있어 봐라"라며 미주(가명) 어머니는 딸의 얼굴에 숯검댕이를 칠했다. 곱던 딸의 얼굴이 며칠은 굶주린 걸인의 모습이 됐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 어머니는 남편에게 눈빛을 건넸다.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미주 아버지는 딸에게 말했다.

"야야. 쫌 답답하더라도 낮에는 여기 들어가 있어라." 아버지가 딸에게 들어가 있으라고 한 곳은 김치독이었다. 국군 제8사단이 보무도 당당하게 한수면에 입성한 1950년 가을이었다.

그해 가을 송계리 5명의 여성이 군인들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다. 군인들은 예쁜 여성만 보면 가만 두지 않았다. 그러자 딸을 둔 송계리 사람들은 딸의 고운 얼굴에 숯검댕이를 칠하고 김치독에 숨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일은 송계리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인근 충주 살미면과 엄정면, 제천 수한면 등지에서도 숱하게 일어났다.

이듬해 봄에는 또 한 차례의 홍역이 송계리 주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경토벌대가 월악산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소개령을 내렸다. 군사작전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로 피난 가라고 한 것이었다. 새롭게 이주하는 곳에 그들이 발 뻗고 누울 공간을 준비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더군다나 소개령에 의해 사람들이 떠난 송계리는 다음날 불바다가 됐다. 군인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불을 지른 것이다. 1951년 봄 월악산 인근지역 산간 마을은 초가집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른바 군인들의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송계리를 불바다로 만든 것은 견벽청야 작전이 아닌 그저 '싹쓸이 작전'에 불과했다.

사람의 목숨과 재산의 존엄성

충북 충주군 살미면 무릉리 최문용 집안은 5000석 지기로 근방에 소문난 부잣집이었다. 그런 이유로 최문용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가 해방 후 서울에서 활동할 때 살던 집은 대궐 같았다고 한다. 고향에 있는 그의 집은 빨갱이의 집이라고 해, 독립촉성국민회의 청년대가 와서 때려부쉈다.

그런데 무릉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수면 북로리 이구영 집의 상황은 달랐다. 독립촉성국민회 청년대가 몰려와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차마 집을 불태울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구영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와 숙부 때문이었다.

이구영의 아버지 이주승과 숙부 이조승은 구한말 의병운동에 참여한 이였다. 비록 이주승이 1947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집안은 해방과 한국전쟁 시기에 제천에서 애국자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좌·우 갈등이 치열했던 시기라 하지만 우익 돌격대도 차마 그의 집을 해코지할 수는 없었다.

의병운동을 한 집안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의 목숨과 재산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풍토가 제천 한수면과 대한민국 곳곳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역사적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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