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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시장 땅콩장수가 늘 '한 줌 더' 얹어주는 이유

매주 '화요일 땅콩' 먹은 지 벌써 2년, 그의 인생이야기 들으며 삶을 배웁니다

등록|2024.08.30 11:55 수정|2024.08.30 12:02

▲ 이동차량은 땅콩을 비롯해 아몬드, 호두, 검은콩 등 다양한 견과류를 판다. 하지만 고객 대부분 땅콩을 사간다. ⓒ 이혁진


내가 사는 동네 시장 뒷골목엔 땅콩장수 이아무개씨가 있다. 40대 중반이라는 그는 매주 화요일 나타나 소형트럭에서 땅콩을 팔고 있다. 아몬드와 호두 등 다른 견과류도 취급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땅콩을 사간다. 나도 단골고객 중 하나다.

차에서 직접 굽는 따끈한 땅콩 냄새는 오가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 때문인지, 나도 들를 때마다 다른 땅콩 사는 사람들 한 두 명씩은 꼭 있다. 이쯤 되면 그 집 땅콩은 품질과 맛에서 이미 검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도 줄 선 사람들 따라 땅콩을 사 먹기 시작했다.

먹어보니 역시나, 오도독 깨무니 고소하고 달기도 한 게 맛이 있다. 치아 건강에도, 뇌 건강에도 좋다고 해 자주 먹기 시작했고, 특히 이 40대 땅콩장수의 그것만 찾았다. 이렇게 '화요일 땅콩'을 사 먹은 지도 벌써 2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정말로 '심심풀이 땅콩', 땅콩마니아가 됐다

뭔가 입이 허전하면 땅콩을 찾는다. '심심풀이 땅콩'이 답이다. 땅콩이 없다면 일주일을 어떻게 보낼까 괜한 걱정을 할 정도로 '땅콩 마니아'가 됐다. 글 쓰는 지금도 한 켠엔 고소한 땅콩 생각 뿐이다.

지난해 언젠가 아버지가 시장에서 땅콩을 사 오셨다. 아버지도 오래전부터 견과류를 잘 챙겨 드시는 편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온 땅콩은 흔히 보던 땅콩보다 작고, 맛이 좀 달랐다. 무엇보다 땅콩 특유의 고소한 향기가 없다.

그 땅콩은 중국산. 아버지는 땅콩이 중국산인지 모르고 사신 것이다. 그러니 역시 손이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드린 땅콩을 자시곤 엄지를 치켜들었다. 중국 땅콩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8월 초 쯤으로 기억한다. 평소처럼 땅콩장수를 찾아갔는데, 왜인지 차량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뜨거운 여름이니 휴가를 갔겠지 짐작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날은 주차단속 때문에 잠시 자리를 피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만난 그는 "단속을 피해 가며 장사를 한다"며 웃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과 표정에는 구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일주일에 한 번 물건 구입날 외엔 거의 매일 돌아다니며 장사하는데, 이게 재밌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직업이 됐다"고 말했다.

땅콩장수는 서울 금천구 우리 동네 뿐 아니라 관악구와 동작구 등 다른 지역 시장 근처에도 매주 정해진 날 찾아간단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도 간단다. 다소 멀지만 그곳에 의외로 자신의 단골이 많다고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길(실은 고소한 땅콩을) 기다리는 손님들 때문에 간다고 했다.

주섬주섬 전하는 그의 인생, 어찌보면 '역마살 인생'이 새삼 평범하면서도 행복해 보였다.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람이 도처에 많다는 말에 나는 새삼 부러움마저 느꼈다.

▲ 땅콩봉지견본, 5천원짜리와 만원짜리가 있다. 차에서 직접 구운 국산땅콩을 판다. ⓒ 이혁진


그런데 그는 장사를 하면서 자리를 비울 때도 많다고 한다. 급히 화장실을 갈 때도 있지만 시장 주변을 돌면서 지루함을 해소하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량에는 '식사 중'이라는 팻말이 늘 놓여있다. 팻말의 숨은 뜻은? 일단 차 주변에 있긴 하지만, 다른 일로 자리를 잠시 비웠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조그만 차에서 종일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차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는데 손님이 되레 그를 깨우기도 한단다. 그럴 땐 무안해서 '한 줌 더' 서비스를 준다고.

'서비스 많이 드린다'며 웃는 저 얼굴

지난 화요일 들르며, 왜 자리 비웠었냐고 푸념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봉지에 한 줌땅콩을 더 담는다. '오늘은 노마진(이득을 안 남기겠다는 뜻)' 하는 날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항상 비슷한 멘트를 하는 그지만 웃음 띤 저 얼굴이 싫지 않다.

그가 전하는 영업 노하우 중 하나는 모든 손님한테 땅콩 한 줌 더 얹어주는 것이다. 시식용 땅콩보다 조금 더 담아주는 것이 고객들 유치와 관리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단골들은 시식용 땅콩에 손대는 법이 별로 없단다. 나도 그렇다. 이미 그 땅콩의 맛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내 역시 내가 사는 '국산 땅콩'만 좋아한다. 그래도 아내는 현미경을 들이댄다. 뭔가 했더니 얼마 전 땅콩에서 약간 군내가 난다는 것이다.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봤다. 그런가, 멈칫하면서도 나는 땅콩장수의 진심을 의심하진 않는다. 설령 산패한 땅콩이 혹시 섞여 있을지 몰라도 그동안엔 탈 없이 먹었기 때문이다.

내게 땅콩은 단순한 주전부리 이상이다. 땅콩은 노년의 치아를 챙기는데도 안성맞춤이다. 적당히 무른 땅콩은 치아 건강에도 좋은 것 같다.

땅콩장수가 말하는 땅콩 맛있게 먹는 팁 하나. 요즘처럼 습한 날씨에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으면 오래 먹을 수 있단다. 땅콩 특유의 그 고소한 맛도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맛도 맛이지만, 땅콩을 생각하면 그의 즐거운 표정과 넉넉한 인심이 떠오른다. 독자들 중에 땅콩장수 예찬이 지나치다고 할지 모르겠다. 실은 나도 얼마 전까지 저런 친절은 그저 장삿속일 거라 치부했었다.

하지만 암 투병 때문일까, 이제는 그냥 스쳐 지나는 듯한 인연도 다르게 보이고 소중하다는 걸 알겠다. 생각해 보면 작은 일에도 행복해 하는 땅콩장수를 보면서, 그로부터 나 또한 다시금 삶의 여유와 영감을 얻고 있는지 모른다.

요즘 들어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이참에 땅콩장수처럼 나를 기다려준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러 찾아 나설 계획이다. 행복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라 하지 않던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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