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구인광고 보고 면접비까지 낸 630명, 허탈한 사기극

[정진동 평전] "6개월간 노동 하세요" 도시산업선교 노동 체험 그리고 1970년대식 취업 사기

등록|2024.10.23 09:32 수정|2024.10.23 09:32
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기자말]

영등포산업선교회정진동이 도시산업선교 실무자교육을 받은 영등포산업선교회 ⓒ 영등포산업선교회


"강사가 조지송 목사네!"라며 환한 웃음을 지은 정진동은 11년 전의 기억을 소환했다. 장로교 신학대학(아래 장신대)에서 만난 그는 자기와는 성격이 정반대였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그는 매사에 논리정연했다. 성질이 급하고 감성적인 자신과는 달리 말이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그에게서 정이 묻어났다. 자신과 나이가 같은 황해도 황주 출신의 조지송(1933년생)은 순수 그 자체였다. 진천 덕산교회 청년들의 문제 제기로 편입학한 장신대에서 그와 깊게 사귈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별과(別科)로 입학한 정진동은 1961년, 1년 만에 졸업을 했다.

대한신학교 졸업(1958년)과 동시에 그는 농촌선교의 부푼 꿈을 안고 고향인 호죽교회로 향했다. 호죽교회(1958~1960)와 뒤이은 덕산교회(1961~1972년 봄)에서 '농민이 예수다'라는 마음으로 농촌선교를 했다. 배움의 기회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공민학교를 세웠고, 농촌부흥운동을 했다.

정신없이 사는 사이에 농촌선교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장신대 졸업한 지 11년 동안 조지송을 만난 적도 없었다.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하던 차에 예수교장로회 충북노회에서 조지송 특강을 마련한 것이다.

덕산교회서 아침부터 부리나케 서둘렀지만 정진동이 특강 장소에 도착한 것은 조지송이 마이크를 막 잡았을 때였다. 깔끔한 외모의 그가 신학교 졸업 직후 강원도 태백의 장성탄광에서의 노동 체험을 이야기했다.

"탄가루와 땀이 범벅이 돼서 얼굴은 진흙 팩을 한 꼴이야... 흰 눈동자만 보이지. 침을 뱉으면 탄가루가 섞인 시커먼 침이 나왔어. 점심때가 돼 도시락을 찾아 먹어야 하는데 탄가루가 내려앉아 어디가 도시락인지 구분돼야지. (…) 손으로 쓸어서 먹었어."(서덕석, <조지송 평전>, 2022)

전태일 시대

정진동은 자신이 탄광에서 일해본 경험은 없지만 조지송의 말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농촌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자신보다 큰 지게를 지고 들로 산으로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연장에 앉아 있는 대부분 목사와 참석자들은 강사를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다른 나라 이야기 같아서다. 그런데 이어진 이야기에 정진동은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청년 전태일이 '나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몸을 불사른 것이 재작년입니다." "작년에는 한영섬유의 김진수가 노조 탈퇴 요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사측의 정OO한테 드라이버로 머리가 찍혀 사망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전태일(1948~1970)과 김진수(1949~1971) 모두 갓 스물이 넘는 나이에 산업화 시대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탄광지역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서는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정진동이 도심 한복판에 지옥이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이들이 동료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죽었다는 것이 믿겨 지지 않았다. '예수가 현세에 있다면 전태일과 김진수가 예수일 것이다'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조지송의 마지막 이야기가 정진동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앞으로는 산업화 시대입니다. 공장과 산업지대에 가서 선교를 해야 합니다" 도시산업선교의 필요성을 주장한 군더더기 없는 설교였다. 한국 사회는 1950, 1960년대의 농경사회에서 1970년대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걸맞는 산업선교를 제기한 조지송은 1963년 한국 최초로 '산업전도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장신대 졸업 후 농촌선교와 산업선교에서 각각 10여 년간 활동한 정진동과 조지송이 만난 것은 1972년 초 청주에서였다.

그 시절의 취업 사기

▲ 직장을 구하는 사람. ⓒ freepik


정든 덕산교회를 떠난다고 하자 희비가 엇갈렸다. 덕산교회 교인들은 눈시울을 흘렸다. 염광고등국민학교 학생들은 아버지와 생이별하는 것처럼 엉엉 울어댔다. 정진동의 가르침에 따라 앙고라토끼와 닭을 분양받으며 집안 살림을 펴보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초상집 분위기에서 가슴이 들뜬 이가 있었다. 정진동의 아내 조정숙이었다. 학교가 불에 타 교인과 학부모, 학생들이 직접 블로크(시멘트 벽돌)를 찍을 때, 그녀는 매일 보리밥 한 솥을 공사 현장으로 가져왔다. 앙고라토끼 키우기에도 누구보다 열성이었다. 목사 배우자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진천군 덕산면의 친근한 이웃집 아줌마이자 엄마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조정숙의 가슴 한 켠에는 아쉬움과 서운함이 있었다. 남편이 덕산교회로 부임할 때만 하더라도 면 소재지 목사이면 면장과 지서주임(파출소장)과 같은 대우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즉 지역의 기관장과 어깨를 맞대고 유지행세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정진동이 선택한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생활을 하다가 남편이 도시(청주)로 나간다니 기쁠 수밖에... 이렇게 희비가 엇갈리며 덕산을 떠난 정진동이 산업선교 실무자 교육을 받기 위해 1972년 4월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찾았다.

▲ 책 <조지송 평전> 표지. ⓒ 서해문집


"6개월간 노동 체험을 하세요." 부드러운 얼굴을 한 호랑이 목사 조지송의 엄명(?)이었다. 당시 조지송은 예수교장로회 전도부 내 도시산업선교 훈련원장을 맡고 있었다. 신학교(장신대) 동기이고 친구이지만 도시산업선교와 관련해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일 뿐이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지만 막막했다. 대한신학교 다닐 때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편지 200통을 써서 공장과 가게 우편함에 꽃을 때가 생각났다. 1953년도인 그때와 19년이 지난 1972년도의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막노동 일자리조차 구할 수 없는 시대였다. 새벽 역전이나 시장에 손님 짐을 나르기 위해 지게를 진 이들이 수십 명씩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런데 길거리를 걷다가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것을 발견했다. 전봇대에 '숙식 제공, 월수 3만 원 보장'이라고 적힌 구인 광고였다. 쪽지 아래에는 회사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었다. 영등포의 한 허름한 건물을 찾아갔다. 2층 사무실로 가서 면접을 봤다. 면접비가 3000원이었다. 당시 3000원은 노동자 사흘 치 임금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최소 30만 원 꼴이다.

직장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이던 시절이기에 하루에 70명 정도가 면접을 봤다. 면접 결과는 열흘 뒤에 알려준다고 했다. 정진동이 다시 면접 장소로 갔을 때는 책상과 의자, 전화기가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것이다. 하루에 70명이 면접비 3000원씩 내고 아흐레간 면접을 봤으니, 면접비만 약 190만 원이다. 요즘 화폐 가치로는 2억 원 가까이 되는 돈이다.

유령회사

정진동은 사기를 당하고 나서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눈 감으면 코베어간다'더니 서울이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일자리 소개업체나 OO기업 면접팀이라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1953년도 경험을 살려 영등포역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사람을 구하는 곳은 없었다. 기찻길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용산역에 다다랐을 때였다. 'OO물산 주식회사'라는 번듯한 간판이 있는 공장을 발견했다.

그곳은 석고로 인형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노동 체험을 할 수 있는 직장을 구했다는 기쁨에 정진동은 앞뒤 돌아보지 않고 구슬땀을 흘리며 일만 했다. 2개월 동안 월급 없이 일하면 각 지역 출장소장으로 발령해 준다는 조건이었다.

정진동은 일을 한다는 기쁨만이 있었다. '월급을 왜 주지 않느냐?'는 항의나 작업과 관련해 동료들과 불평을 나누지도 않았다. 불만이 없어서가 아니라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 훈련의 기본 지침 때문이었다.

노동 체험을 할 때 "그저 묵묵히 일만 해라"는 원칙 때문이었다. 즉 일하는 동료 노동자들에게 가르치려 들거나 그들을 선동(?)해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노동쟁의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조건 일만 해서 노동자의 삶을 몸에 익히라는 뜻이다. 정진동은 이런 훈련 지침에 충실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을 향한 '올가미에 목을 내민 격' 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고된 노동 중에 점심은 기껏 짜장면 한 그릇이 전부였다. 작업은 박정희 대통령 흉상을 석고로 만드는 일이었다. 금색을 입힌 흉상을 전국의 관공서에 납품한다는 계획이었다. 노동자들은 당시가 유신시대 이기에 전도유망한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네다섯 명의 노동자들은 부푼 꿈에 젖어 죽어라 일만 했다. 하루에 네다섯 개의 흉상이 제작됐다. 한 달 정도 일을 했을 때이다. 회사 사장이 정부와 납품 계약이 체결됐다면서 도·시·군 출장소(대리점)를 모집했다. 출장소 지원자들에게 완성품을 보여주면서 "이것을 관공서에 갖다주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증금 30만 원씩을 납부하라고 했다.

취업 면접료 사기 사건을 경험한 정진동이 '이것도 사기이겠구나'라고 느낀 것은 출장소 지원자들의 항의가 있기 직전이었다. 한 무리의 양복쟁이들이 "이 사기꾼아!"라며 들이닥쳤을 때 사장은 온데간데 없었다.

정진동도 공범으로 몰려 맞아 죽을 뻔했다. 월급 한 푼 못 받은 그는 화장실 간다는 핑계를 대고 줄행랑을 쳤다. 유령회사 사장은 한 달여 만에 약 500만 원을 벌었다.

'삥땅'

▲ 버스에서 일을 하는 버스 안내양(자료사진).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우여곡절 끝에 정진동이 다시 찾은 일자리는 버스 계수원이었다. 숙식 제공에 월급 2만8000원 보장이라는 구인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이 '마진운수'였다. 당시는 시내버스에 안내양이 있을 때였다, 계수원은 운전기사와 안내양이 짜고 요금을 삥땅(남의 돈을 착복함)하는 것을 적발하는 일을 했다.

그렇기에 계수원은 버스 승차 인원을 정확히 기록해야 한다. 정릉과 영등포의 우신극장을 오가는 버스를 세 차례 승차했다. 한 번 운행에 3시간이 소요됐다. 그런데 계수원이 졸거나 승차 인원을 정확히 기록하지 못하면 임금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3탕무탕'이란 말이다. 종일 일하고 급여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허탕치는 일보다 괴로운 것은 안내양을 몰래 감시한다는 죄책감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고 감시하는 일을 하는 것을 죽어도 못 할 일이었다. 또한 기숙사는 불결함 그 자체였다. 40여 명의 계수원들이 잠자는 그곳에는 사람의 숫자보다 수백 배나 되는 것이 우글거렸다. 이(劙)였다. 잠자리 주변에 있는 신문지는 이의 피로 얼룩져 있었다.

취업 사기를 당하고 유령회사를 거쳐 버스 회사에서 이와의 전쟁을 벌인 정진동은 6개월간의 노동 체험을 마치고 본격적인 실무교육을 받기 위해 영등포산업선교회로 발걸음을 향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