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머 들고 검사집 찾아간 단속반, 검사 아들 하는 말이...
[정진동 평전] 무허가 단속반의 '의로운' 행정
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 청소부 모임청소부 투쟁 주축들의 모임. 우측부터 유재향, 정진동 ⓒ 청소부 모임
잔뜩 낙심한 얼굴을 한 청주시 해고 청소노동자 유재향과 최명식이 정진동을 찾아왔다. 정진동은 순간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또 무슨 일이 터졌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작년 6월 사직동에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시작한 이후 긴장의 나날을 보냈기 때문이다.
창립 예배를 본 이후 단 한 번도 두 발 뻗지 못한 채 잠을 잤다. 청주시청 청소부 투쟁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박정희 대통령 연두 순시 기습시위 모의 사건을 기점으로 상황이 급속히 반전됐다. 자신과 유재향, 최명식이 시위 계획 후 도피하자 청주경찰서와 청주시는 벌통을 건드린 것처럼 난리가 났다.
갈림길
청소부들이 요구한 임금인상 문제는 일당 600원에서 650원까지 차등 지급하기로 했다. 휴일제도 도입과 퇴직금 문제도 원만히 해결됐다. 채O환 청주시장이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입건된 상황이라 제도적 도입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해고자 복직 문제였다. 투쟁이 장기화되자 정운탁과 이정우는 원직복직이 아닌 퇴직금 받기 운동으로 투쟁 방향을 선회했다. 하지만 유재향과 최명식은 원직복직 투쟁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데 청주시장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는지 유재향과 최명식을 복직은 시키되 원직으로는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꼼수를 쓴 것이 '무허가 단속반'으로 복직시키겠다는 것. 무허가 단속반이라면 시민들로부터 원성을 살 일만 생기는 자리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탈법과 불법으로 지은 건축물 등을 때려 부수거나 벌금을 부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재향과 최명식은 '복직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 것이다. 자기가 살자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청주시로부터 무허가 단속반으로 복직하라는 통보를 받은 유재향과 최명식이 우울한 표정으로 정진동을 찾은 이유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정진동은 잠시 고민했다. 나머지 현안이 모두 해결된 상황에서 두 사람이 복직을 거부하면 힘겨운 싸움이 될 게 분명했다. 잠시 후 정진동은 무릎을 '탁' 쳤다.
"복직하세요." "네?" 정진동의 시원스러운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유재향과 최명식이 반문했다. "일은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진동은 무허가 단속반원이라고 무조건 시민들에게 민폐를 끼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러분들이 시민을 위해서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면 오히려 그들한테 박수를 받을 겁니다." 즉 민중의 지팡이로서의 역할을 주문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두 사람은 정진동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청소부 투쟁 과정에서 정진동 목사에 대한 믿음이 확고히 형성됐기에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1974년 2월 9일 유재향과 최명식이 청주시청 무허가 단속반으로 복직됐다. 약 한 달 후인 3월 5일에 청소부 문제가 최종 타결됐다.
정진동과 청소 노동자들은 덩실덩실 춤을 췄다. 8개월여 만에 노동자들이 완전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정진동은 그간 연대의 손길을 뻗어 준 이들에게 일일이 감사 편지를 썼다.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요?"
아침 일찍 시청 정문을 지나친 유재향과 최명식은 출근부에 도장을 찍었다. 그들이 지금 가려고 하는 곳은 미적거려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상급자들이 그들의 목적지를 알면 당장 중지 명령을 내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함마(대형 쇠망치)'를 챙겨 법원, 검찰청이 위치한 수곡동으로 향했다. 제보를 받은 곳으로 갔다. 아무개 검사 집이었다. 그 집은 2층 건물이었는데, 2층을 증축하는 과정이 무허가였다. 즉 불법 건축물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청주시는 그 집이 불법 건축물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수수방관했다. 1970년대 중반에 검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였다. 사법고시를 합격해 검사, 변호사, 판사에 임용된 20, 30대 청년들에게 "영감님"이라며 허리를 90도 꺾던 시절이었다.
'텅텅' 쇠망치질 몇 번에 시멘트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쪽 벽이 무너졌다. 잠시 후 나타난 소년이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 누구예요?" "..." 유재향과 최명식은 소년의 거친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소년이 다시 고함을 쳤다.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요?"
그러자 최명식이 한마디 했다. "느(너) 아부지 쪼기서 일하잖어" 그러면서 턱을 검찰청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소년이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한테 이를 거에요." 최명식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라."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년이 전화기 수화기를 들었다. 소년이 씩씩거리고 있는데 잠시 후에 집주인이 나타났다. "당신들 뭐요? 왜 남의 집을 함부로 부수는 겁니까?" 유재향이 목에 건 신분증을 검사 앞에 들이밀었다. "청주시청 무허가 단속반입니다"
검사의 얼굴이 노래졌다. 최명식이 "2층이 불법 건축물이네요. 그래서 원상복구하는 겁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검사님~"이라며 사족을 붙였다. 맨 끝의 '검사님'은 일부러 말을 늘였다.
아무리 검사라지만 자신의 불법행위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할 말이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검사가 최명식에게 담배를 건넸다. "고생이 많소. 담배 한 대 피우슈."
담배를 건네받은 최명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양담배였기 때문이다. "야~ 물 건너온 담배네. 기념으로 가져가야겠네"라며 담배를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검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시 양담배는 규제 대상이었다. 그런 시기에 현직 검사가 양담배를 핀다는 것은 언론의 몰매를 맞을 일이었다.
더군다나 불법 건축 문제까지 공론화되면 자신의 모가지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무허가 단속반원 두 사람의 쇠망치질은 이어졌다. 쇠망치질에 날리는 것은 시멘트 가루만이 아니었다. 검사의 한숨 소리도 함께였다. 이 사건 이후 청주시청 무허가 단속반원은 각 동별로 분산 배치됐다.
부러진 대추나무
▲ 선진지 견학외국인 선교사들의 청주산선 방문. 앞줄 모자쓴 이가 최명식. 뒷줄 좌에서 4번째가 정진동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용암동 방죽 근처에 무허가 건물이 있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그런데 건물주 성이 채씨였다. 이름 석자를 끝까지 읽은 포청천 유재향, 최명식의 얼굴은 비장해졌다. 문제의 건물주가 청주시장 사촌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검사 집을 부술 때처럼 아침 일찍 서둘렀다. 현직 시장 사촌 집을 부수는 일을 어떤 상급자가 허용하겠는가?
유재향, 최명식은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시장은 고사하고 정규직 공무원들 앞에서도 얼굴을 들지 못하던 것은 흘러간 과거일 뿐. 그렇다고 그들이 거만해진 것은 아니었다. 청주시장과 가진 자들에 대한 사감(私感)과 분노로 행동하는 이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떤 권력자이든, 돈 많은 이들이든 불법행위를 저지른 자들은 엄격히 단속한다는 생각이었다. 현대판 포청천이었다. 포청천(999~1062)은 송나라 시대의 판관으로, 청백리의 표상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문제의 건축물은 40평(132㎡) 규모의 창고였다. 유재향과 최명식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쇠망치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잠시 후에 건물 모서리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계속 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소리를 질렀다. 창고가 무너지면서 옆집의 대추나무가 부러진 것이다.
"왜 남의 대추나무를 부러뜨려요. 대추나무 보상하시오"라며 삿대질을 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삿대질을 하는 이는 창고 옆의 집주인이었다. 대추나무 주인의 거친 목소리에 유재향과 최명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속 항의하자 잠시 후에 최명식이 한마디 했다.
"당신 사촌한테 가서 보상해 달라고 하슈." 대추나무 주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역시 자신의 창고가 불법 건축물 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추나무 보상 운운할 처지가 아니었다.
신선부채
▲ 최명식청소부 투쟁의 주역 최명식(우)과 조순형 전도사. 1980년대 초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가진 이들에게 한껏 엄격했던 초짜 무허가 단속반원 유재향, 최명식은 가난한 자들에게도 똑같이 했을까? 그렇지 않다. 당시 청주 시내에 유명한 신선부채, 고무줄 장수가 있었다. 그는 리어카에 극장 포스터를 갖고 다니면서 벽이나 전봇대에 붙이는 일을 했다. 또한 리어카에 각종 잡화를 갖고 다니면서 팔기도 했다. 그는 장애인으로 원호대상자였다. 그 사람의 집이 철도 밑의 움집이었는데 그 집을 부수라는 것이었다.
상급자의 지시를 받았지만 유재향과 최명식은 차마 그 일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법 집행을 무작정 거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묘안을 찾았다.
"우리가 철거하러 오면 당신이 칼부림 흉내를 내시오" 단속반원의 이야기를 들은 부채 장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움집에서 쫓겨나는 어떻게 하나?' 하는 고민으로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터였다.
다음날 쇠망치를 지참한 유재향, 최명식이 부채 장수 집에 갔다. "청주시청 무허가 단속반입니다. 불법 건축물을 부수러 왔습니다"라며 공무원증을 내밀며 눈을 꿈쩍였다.
부채 장수는 애초에 입을 맞춘 것과 같이 웃통을 벗고 식칼을 집어 들었다. "네놈들 죽이고 나도 죽을 껴"라며 소리 질렀다. 당황한 얼굴을 하며 두 사람이 달아날 때였다. 단속반을 쫓아오는 부채 장수가 고함을 질렀다. "리어카에 우리 집 살림을 전부 싣고 시장 집으로 갈 껴!" 시장 집 앞에서 노숙 농성을 하겠다는 엄포였다.
유재향과 최명식은 시청으로 돌아가 좀 전의 일을 상급자에게 보고했다. 약간의 과장을 해서이다. 상급자는 얼굴이 하얘지더니 한 마디 했다. "그냥 냅두슈."
특별 헌금 200만원
▲ 유재향청소부 투쟁의 주역 유재향(좌)은 이후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집사가 되었다.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배운 것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던 유재향은 1973~1974년 청소부 투쟁을 거치면서 엄청난 변모를 이뤘다. 사람의 의식은 단순히 가방끈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정진동과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만나면서 그의 의식은 급변했다.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며 배운 것도 컸음은 당연하다.
그는 후일 무허가 단속반으로 복직될 때 정진동의 조언을 잊을 수 없었다. 결국 커다란 권력이든 알량한 권력이든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산 체험을 통해 알았다.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다녔다. 전국 여러 곳에서 청소부 투쟁 사례 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는 죽기 전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청주산선에 200만 원을 특별헌금해라" 2011년 유재향이 눈을 감았다. 유족들은 고인의 유언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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