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만들다 시력 잃은 여성, 박정희에 편지 보낸 목사
[정진동 평전] 청주연초제조창 여성노동자 박씨 이야기
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네. 그렇습니다"
"목사님 이셔유?"
하얀 한복을 입은 할머니는 젊은 여성의 손을 잡고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문을 열었다. 머리칼이 반백인 노인은 광대뼈가 툭 불거질 정도로 야위었다. 묻지 않아도 무슨 근심거리가 있음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잔주름이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고,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파의 손에 이끌려 온 젊은 여성도 특이했다. 앞이 안 보이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진단서 분실
▲ 1960년대 청주 연초제조창의 모습. ⓒ 김운기 제공=충북인뉴스
노파의 딸 박OO(아래 박씨)는 19세인 1953년도에 청주연초제조창에 입사했다. 1946년에 문을 연 14만㎡(약 4만2000평) 규모의 연초제조창은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매년 100억 개비 이상의 담배를 생산해, 17개국으로 수출하던 공장이었다. 대농이 만들어지기 전 청주 최대 규모의 공장이었다.
국가의 전매사업을 담당하는 청주연초제조창 노동자는 공무원 신분이었다. 수차례 모범공무원상을 받기도 한 박씨에게 고난이 찾아온 것은 1971년. 1960년대 초반부터 눈이 심하게 아프면서 앞이 흐릿하게 보이던 것이 1971년도에는 양쪽 눈 모두 시력을 잃었다.
박씨가 중앙의료원을 찾은 것은 1965년. 진단 결과 박충 의사의 소견은 '니코틴 함유로 인한 시신경염'이 발병했다는 것. 당시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직업병이었다. 박씨는 당시 국립의료원인 중앙의료원에 자비(自費)로 2개월간 입원하면서 진단과 치료를 받았다.
퇴원 후에도 머리가 어지럽고 앞이 잘 안 보이기는 했지만 박씨는 성실하게 근무했다. 그런 탓에 1960년대 후반에는 3년 개근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1년에 양쪽 눈이 완전히 실명되면서 공장 측으로부터 강제 휴직을 당했다.
박씨는 공무원법 71조 1항에 근거해 요양을 하게 됐다. 하지만 월급은 대폭 줄어들었다. 1974년 당시 월급이 3만900원이었는데 휴직 기간에는 7000원밖에 받지 못했다. 월급의 약 23%밖에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1974년 3월 5일에는 강제퇴직을 당했다(기독공보 1975.1.18.). 강제퇴직 당하면 실업자 신세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청주연초제조창이 박씨의 진단서를 분실했다는 크리스챤 1975.6.26 기사. ⓒ 크리스챤신문
박씨의 사연을 들은 정진동은 당사자 박씨에게 물었다. "그러면 1965년도 의사 진단서(소견서)를 회사에 제출하면 되잖습니까?" 병원 진단서를 근거로 노동으로 인한 직업병으로 인정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박씨는 한숨부터 쉬었다. "왜 안 했겠어요. 그런데 총무과에서 진단서를 분실했다고 하네요." 박씨의 이야기를 들은 정진동은 기가 막혔다. 보상을 해주지 않을 요량으로 회사가 거짓말을 한 것이다. 박씨가 총무과에 진단서를 물은 것은 강제 휴직 기간이었다.
그가 휴직 기간에 병원에서 다시 진단서를 끊은 결과, 의사의 소견서는 '과로와 영양실조'였다. 1965년 진단서와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과로와 영양실조'라는 진단 결과로 직업병을 인정받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 없었다.
노파와 딸 박씨가 기가 막힌 사연 보따리를 들고 정진동을 찾은 것은 1974년 4월이었다. 청주시청 청소부 문제를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가 도와줘 원만히 해결됐다는 소문을 듣고서였다.
"박정희 각하께"
정진동은 매주 금요일 가던 청주연초제조창 내 예배소에 발을 끊었다. 1973년 6월 22일부터 매주 금요일 점심 예배를 주관하던 일이었다. 당시 연초제조창 내에 예배소가 있었는데, 제조창은 정진동에게 설교를 맡겼었다. 그런데 제초창의 위와 같은 비리 사실을 들은 정진동은 연초제조창 예배를 더이상 주관할 수 없었다.
정진동은 신민당 김영삼 총재에게 진정서를 냈다. 청주연초제조창 박OO씨의 부당해고(강제퇴직)를 시정하고 적절한 보상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 문제는 전매청과 중앙정부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정진동은 다급한 심정으로 여론형성을 위해 당시 야당인 신민당에 SOS를 친 것이다.
사실 김영삼 총재에게 진정서를 보냈지만, 정진동은 그 진정서 한 통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다음 진정서의 수신 대상은 정일권 국회의장이었다. 육군참모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일권은 당시 국회의장(1973.3.12.~1979.3.11.)으로 박정희 대통령 다음의 실질적 제2인자였다.
김영삼과 정일권에게 보낸 진정서(각각 1975.9.22.과 11.4. 발송)에 대한 답변은 오리무중이 됐다.
정진동은 그들의 무신경에 좌절하지 않았다. 다음 타깃은 박정희였다. 유신 정권 시기의 독재자이지만 상관이 없었다. 상대방이 누구이든 정진동은 가난한 자, 어려운 자, 고난을 받는 자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누구이든 대화를 하고, 도움을 청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대통령 각하'로 시작되는 편지를 썼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불철주야 국정을 운영하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중략) 청주연초제조창 박OO양이 20년간 근무한 직장에서 억울하게 쫓겨났습니다. 그것도 일을 하다 눈이 멀었는데 말입니다. 각하께서 실상을 정확히 파악해 보시고 관계기관에 시정 명령을 내려 주시길 앙망하나이다(부탁합니다).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 드림
기대하지 않았던 박정희의 답변 편지가 왔다. '존경하는 정진동 목사님께'로 시작된 편지는 팥소 없는 찐빵이었다. "주무관청인 전매청에 원만한 해결을 지시했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와 공무원들의 지극히 형식적인 답변에 불과했다. 박정희 답신은 1975년 11월 12일에 있었다.
YMCA, YWCA, CCC, 청주제일교회
▲ 노동절 기념예배청주연초제조창 문제 해결과 노동절(근로자의 날) 기념 예배. 1975.3.11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청주의 8개 기독교 단체가 모였다. 정진동이 입을 열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박OO씨 문제가 심각합니다. 우리 기독교 단체가 공동으로 서명을 받아 연초제조창에 진정서를 낼 것을 제안합니다."
정진동의 제안 설명에 이의를 제기하는 단체는 없었다. 박씨의 건강 상태와 최근 심경을 묻는 정도였다. 질의응답 이후에 진정서의 내용이 정리됐다. "연초제조창은 국립의료원에서 발급한 박씨의 8년 전 진단서를 찾아내라. 이를 근거로 재해보상과 원호연금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해달라."
참석자 전원이 진정서에 서명을 했다. 자신들이 속한 단체에서 회원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기로 했다. 1975년 7월 5일 모인 이 단체들은 청주의 기독교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참석한 단체는 다음과 같다.
청주제일교회(기독교장로회), 청주YMCA, 청주YWCA,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한국기독교산업선교연합회, 예장(예수교장로회) 충북노회 성직자, 기장(기독교장로회) 충북노회 성직자, 청주대학생선교회(청주 CCC)(크리스챤신문. 1975.7.19.)
청주연초제조창 박씨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진정서 작성과 서명운동이 1975년 7월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청주제일교회는 1974년 12월부터, 청주YWCA는 1975년 1월부터 받기 시작했다. 또한 1975년 2월 25일에는 청주CCC, YMCA, YWCA, 청년관(감리교), 청주도시산업선교회가 1차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즉 1975년 7월 8개 단체의 연합 서명운동은 2차인 것이다.
정진동이 발품을 팔아 기독교 단체에 호소하고 설득한 결과였다. 그는 어떤 문제가 발생해 해결해야겠다고 판단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었다. 한편으로는 청주시장, 야당 총재, 국회의장,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단체를 총망라한 서명을 받았다.
그 결과 충청일보와 지역 라디오방송, 기독공보, 크리스챤신문에 보도됐다. 청주뿐만 아니라 전국의 핫이슈로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진동은 청주연초제조창 박씨 문제에 왜 이렇게 열심이었을까?
물론 정진동이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찾아온 노동자들이 호소하는 문제를 단 한 건도 무성의하게 처리한 것은 없다. 다만 박씨 문제에 더욱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그가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 노동자였다는 점이다.
즉 박씨 문제가 단지 그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 노동자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봤다. 박씨는 20년간이나 근무한 직장에서 직업병이 걸리고도 일방적으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박씨는 가정경제를 책임지느라 나이가 40이 되도록 미혼이었다. 여동생 교육과 결혼을 뒷바라지하고 노모를 모시며 가정경제를 책임졌기 때문이다. 당시 5남매를 둔 정진동 목사가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유다.
오해와 누명 사이
정진동의 집요한 활동과 여러 기독교 단체의 연대활동 그리고 언론보도로 박씨 문제의 해결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다. 새로 부임한 청주연초제조창 김윤O 창장이 1975년 4월 2일 피해자 박씨, 정진동 목사, 연초제조창 관리과장을 한 자리에 불렀다. 김창장은 이 자리에서 "박씨는 공상(公傷)으로 인정하고 1급 재해 임금을 받도록 최선을 다해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박씨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합의였다.
▲ 1급 재해연금 받기로박씨가 1급 재해연금 받기로 됐다는 기독공보 1975.4.12 기사 ⓒ 기독공보
그런데 얼마 후 오해 아닌 오해, 아니 누명이 발생했다. 노사합의가 된 후 박씨가 정진동을 찾아왔다. 정진동은 박씨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진동에 대한 박씨의 프러포즈였다. 당시 미혼이었던 박씨가 1년여간 진행된 자신의 보상금 투쟁을 거치면서 정진동 목사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뛰어넘어 연정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정진동은 "내가 박양의 문제를 도와준 것은 박양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로 당신의 문제를 우리 사회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모든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박양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박씨는 정진동의 이야기를 듣고 순순히 물러갔다. 며칠 후 그녀는 정진동에게 프러프즈 문제에 대해 사과했다. 그렇게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다음 만남에서 박씨의 감정이 극단적으로 표출됐다. 박씨가 "정진동 목사는 어용이다. 눈먼 나를 이용했다"면서 악담을 퍼부었다. 마치 정진동을 사기꾼 취급한 것이다.
자신의 프러포즈를 거부한 정진동에 대한 섭섭함이 증오(?)로 비화한 것이다. 정진동은 "강자에게 욕을 먹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약자에게 욕을 먹으니 안타깝다"고 했다. 그날부로 정진동은 박씨 문제를 이태영 변호사에게 일임했다. 정진동의 선비같은 곧은 정신을 보여주는 일화다.
▲ 박씨(우측)와 노모박씨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박씨와 노모. 1975.3.11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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