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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소년은 50년 넘게 입을 닫았다

충주 살미면의 한국전쟁 그리고 최조태씨의 이야기

등록|2024.11.05 14:36 수정|2024.11.05 14:36
"보도연맹원들을 싹 다 죽였대요!" "뭐여! 어디서? 누가 그랴?"

옆집 아줌마 이야기에 최조태의 할머니 이정용은 숨넘어 가듯 질문을 퍼부었다. "옆 마을 길룡(가명)이 할매가 그러던데요." 이정용은 그 애기를 듣자마자 구들장을 박차고 일어났다.

"아가. 가자" 손주 최조태에게 앞장을 서라고 했다. 밤이 이슥한 시간이었기에 소년 최조태(당시 11세)가 등불을 들고 앞장섰다. 할머니 이정용과 옆집 아줌마가 뒤따랐다.

충북 충주군(현 충주시) 살미면 문화리 벌말에 사는 소년 최조태는 할머니와 함께 이웃 개론마을로 갔다. 아버지와 삼촌이 충주 읍내 싸리재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1950년 7월 중순이었다.

재오개로 마중 나간 소년 상주

▲ 죽음의 골짜리 끌려가는 충주 보도연맹원. 박건웅, <어늘 물푸레나무의 기억> 저자의 동의아래 저자가 이미지 파일을 제공함. ⓒ 박건웅


다음날 이정용은 싸리재까지 부리나케 걸었다. 한여름 비지땀을 흘리며 충주 읍에 도착했을 때는 땀으로 온몸을 목욕한 듯했다. 속옷까지 다 젖었지만 남의 눈을 의식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정용과 문화리 사람들은 싸리재로 향했다.

싸리재로 들어선 순간 하늘에 버섯구름이 높게 떠 있었다. "저게 뭣이여?" "..." 그 소리에 앞만 보고 걷던 이들이 잠시 하늘을 보았다. 하지만 버섯구름의 의미를 몰랐던 이들은 다시 발걸음을 부지런히 놀렸다. 조금 더 가니 악취가 코를 찔렀다.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자식과 남편, 아버지의 시신이 숲 안에 있을 거라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악!" 그들은 마주한 장면에 입을 딱 벌렸다.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죽어 있는 시신들은 배가 남산 같았다. 총독(銃毒)에 살과 내장이 썩어 배가 부풀어 오른 것이다. 이정용이 입술을 꽉 깨물고 시신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한참을 다니니 큰아들이 있었다. 선뜻 아들을 찾은 것은 아니다. 시신의 얼굴이 모두 뭉크러졌기에 얼굴을 보고 찾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정용은 무조건 시신의 신발만 봤다. 큰아들 최규용(당시 40세)이 폐타이어로 만든 신발을 신었기 때문이다. 집안사람이 일제강점기에 경성방직에 다녔는데, 그곳에서 가져온 폐타이어로 신발을 만들어 신었던 탓이다.

작은아들 시신은 쉽게 찾았다. 최달용(당시 25세)은 왼쪽 손이 뼈가 다 드러날 정도의 장애가 있었다. 경성방직에 다닐 때 산업재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정용은 집안사람의 도움을 받아 우선은 싸리재 부근에 두 아들의 시신을 가매장했다. 며칠 후 집안사람들과 함께 이정용은 죽음의 고개, 싸리재를 다시 찾았다. 두 아들을 염한 후에 지게에 얹었다.

지게를 진 이들이 충주 읍에서 살미면 발티재를 넘어 재오개마을에 다다랐을 때였다. "아이고오" 하는 곡소리와 함께 상주 조태와 옥순(17세)의 눈물 콧물 한 모습이 눈 안에 들어왔다. 상복을 입은 어린 상주들이 저 세상 사람이 된 아버지를 마중 나온 것이다.

지게를 진 이들이 싸리재에서 발티재를 넘어 문화리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녹초가 됐다. 20리(8km) 길의 강행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대로변으로 왔으면 50리(20km) 길이었는데, 지름길로 왔기에 빨리 올 수 있었다.

발티재는 경상도나 인근 지역에서 충주 읍내로 통행할 때 예전부터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구간이었다. 소를 팔러 가거나 볼일을 보기 위해 통행하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1896년 을미의병들이 넘던 고개였다. 경상도 사람들과 충주 살미면, 제천 한수, 살미, 덕산, 수산 사람들의 통행이 활발했던 곳이다(전홍식, <역사도시 충주의 발자취와 기억>, 2021).

▲ 싸리재에서의 학살. 박건웅,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 박건웅


"아부지 가지 마셔유"라는 아이의 말

"여기 도장 찍으면 비료를 공짜로 준댜~."
"가입 안 하면 품앗이도 없어유~."

땅만 파먹고 사는 이들에게 품앗이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도장을 찍지 않으면 품앗이를 안 한다니, 마을에서 내쫓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최규용 형제는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었다. 더군다나 강릉최씨 집성촌인 문화리와 옆 마을 무릉리 사람 대부분이 도장을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였다. 해방 후 전국에 불었던 농민회(전국농민총연맹) 가입 바람이 살미면에도 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서에 도장을 찍은 이들은 1949년도 국민보도연맹에 자동으로 가입하게 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 문서는 살생부가 됐다.

국민보도연맹원 모이라는 연락에 최규용 형제는 낮에 모내기를 해, 몸이 천근만근 이었지만 살미지서로 갔다. 전쟁 전에 국민보도연맹 소집에 응하지 않은 이들이 혼쭐이 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전 살미면 신매리 엽연초 사무실에서 모였던 국민보도연맹 모임에서는 반공 교육을 실시했다.

문화리 최규용 형제를 포함한 살미면 73명의 국민보도연맹원은 면 소재지인 세성리의 살미지서로 모였다. 그곳에서 트럭에 태워져 충주경찰서로 이송됐다. 유치장에 며칠 구금된 후 그들은 후퇴하는 국군 6사단 7연대 군인들과 충주경찰서 경찰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1950년 7월 5일이었다.

문화리 젊은이(국민보도연맹원)들의 떼죽음 사건에서 극소수 눈이 밝은(?) 이들은 죽음의 골짜기로 가지 않았다. 우양섭은 소집 당시 신매리 고개에서 몰래 대열을 이탈해 귀가했다. 마을 국민보도연맹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신정희는 아들의 "아부지. 가지 마셔유"라는 말에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이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샌님 손 한 이는 매타작

사실 살미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국민보도연맹 사건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전 월악산 빨치산이 무릉리와 신당리 청년을 학살한 것이 시초였다. 빨치산들은 대한청년단 살미면 단장 김순갑(무릉리)이 집에 없자 그의 형 김진갑을 쇠망치로 가격해 학살했다. 또한 독립촉성국민회 살미면 청년대장 윤숙일(신당리)도 같은 날 죽임을 당했다.

이들의 장례식은 신매리에 있던 살미국민학교에서 봉행됐다. 장례식이 열린 운동장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문화리 소년 최조태도 갔을 정도니 말이다.

장례식을 치른 며칠 후 살미지서 순경들이 무릉리로 출동했다. 심OO의 집에 불을 질렀다. 빨치산 활동을 한다는 혐의였다. 경찰의 보복행위였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살미면에 드리운 것은 국민보도연맹 사건 때부터이다.

전쟁이 난 그해, 여름 피난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최조태가 어머니와 누나, 동생들과 함께 피난 보따리 짐을 지고 괴산군으로 갔을 때였다. 최조태는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진대마을에서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미군 폭격에 부상당한 문화리 청년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남의 집 헛간에 부상자를 눕혀 놓고 물 한 양동이를 떠 놓고 남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환자 상태가 며칠 못 갈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0일 후 피난민들이 돌아오는 길에 그곳을 지나치는 데 놀랍게도 그때까지 부상자가 살아 있었다. 가족들은 반가운 마음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담가에 싣고 문화리로 돌아왔지만 등에 큰 구멍이 난 환자는 오래지 않아 저세상 사람이 됐다.

피난길에서 돌아오니 북한군이 문화리 길가에서 행인의 손을 일일이 검사했다. 손에 굳은살이 있으면 무사통과였다. 그런데 굳은살이 아니고 샌님처럼 손이 희거나 고우면 옆 참나무밭으로 끌고 가 매타작을 했다. 공무원이거나 지식인일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학살 터현재의 싸리재 모습. ⓒ 박만순


젊은 여성 찾던 미군

삽짝문을 밀치는 소리가 들렸다. 불청객의 출현에 최조태는 궤연(几筵)으로 재빨리 숨었다. 망자의 혼백을 모셔두는 곳이다.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은 북상을 결행한다.

경상도까지 남하했던 인민군들이 재오개를 지나 발티재를 넘어 북상할 때였다. 인민군은 길 안내를 위해 문화리 청장년을 무작위적으로 징발했다. 최조태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어떤 해코지를 당할 줄 몰라 궤연으로 숨었다.

인민군들이 모두 무사히(?) 북상하지는 못했다. 경찰에 붙잡힌 인민군 낙오병들이 문화리 앞 개울에서 집단처형을 당했다. 그곳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이 북한군만은 아니었다. 국군은 북한군 점령 시절 인민군을 도운 혐의자(부역 혐의자) 6~7명을 그곳에서 학살했다. 그때까지 죽음의 그림자가 문화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돼 살미면 무릉리에 미군들이 약 일주일 정도 진주했을 때다. 미군 5~6명이 떼지어 다니며 '젊은 여성 사냥(?)'을 하러 다녔다. 문화리에도 들이닥쳐 기겁한 주민들이 딸들을 숨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최조태의 누나 옥순과 정순도 얼굴에 숯검댕이(숯검정)를 칠하고 골방으로 숨어들었다. 젊은 여성들이 미군에게 붙잡히면 성폭행을 당한다는 소문이 쫙 퍼졌던 터였다.

정작 문화리를 포함한 살미면 주민들이 전쟁의 고통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겨울 난리 때였다. 여름 난리 때 피난길을 떠나지 않은 이들을 부역자라고 해서 처벌하거나 불이익을 준 경험 때문이었다. 최조태 집에서도 고령자인 할머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 여름 난리 때와는 달리 충북 보은까지 갔다.

피난 길에는 끔찍한 장면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논과 밭에 시신들이 즐비했다. 당시 유행했던 홍역으로 죽은 아이들의 시신이 매장도 되지 않은 채 널려 있었다.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어른과 노인들의 시체도 마찬가지였다. 고생 끝에 겨울 피난길에 돌아왔을 때 최조태 가족은 망연자실했다.

집이 국군들의 중대 본부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놀라운 일은 집에 있던 소 두 마리가 온데간데 없어진 것이다. 한 마리는 군인들이 잡아먹었고, 다른 한 마리는 피난민들의 뱃속에 들어갔다.

최조태 집의 야산도 민둥산이 돼버렸다. 원래는 최규용이 어머니 환갑잔치를 치르기 위해 그해(1950년) 겨울, 야산 참나무를 팔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일을 하기로 했던 최규용은 저세상 사람이 됐고, 참나무는 국군과 피난민들이 땔감으로 모두 베어 버려졌다. 가장을 잃고, 재산목록 1호인 소와 참나무를 갈취당한 것이다.

공포의 상이용사

"빨갱이 XX들 전부 죽여 버리겠다!"

상이군인들이 최조태 집 앞에 와서 행패를 부렸다. 물론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쇠갈고리 손과 목발을 짚은 이들의 욕설은 공포 그 자체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상처는 끝나지 않았다. 툭하면 상이군인들이 보도연맹 희생자 집을 다니며 해코지를 한 것은 1950년대였다.

최조태가 성인이 돼서도 경찰의 감시는 계속됐다. 1980년 충주댐 건설로 문화리가 수몰됐을 때도 마찬가지다. 충북 음성군 생극면 차평리로 이사 갔는데, 생극지서에서 동향 파악을 한다며 이삿짐을 풀기도 전에 들이닥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반백 년 넘게 최조태는 아버지와 삼촌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제사 때나 가족들 앞에서 이야기했다. 특히 최조태의 큰누나 옥순은 제사 때마다 "불쌍한 우리 아부지" 하며 곡을 했다.

▲ 증언자 최조태(왼쪽).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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