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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5.02 08:06수정 2018.05.02 08:06
이런 상상을 해본다. 학교 다닐 적 한 학급 친구 모두가 시험에 나올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공유하면 어땠을까. 지구상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반이 되지 않았을까. 이 세상 사람 모두, 아니 그 가운데 100명이라도 자신이 알고 깨우쳐 활용하고 있는 글쓰기 방법을 속속들이 내놓고 공유하면 어떨까. 우리의 글쓰기 고민 절반은 덜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힘을 합치면서 얼마나 행복할까.

신입사원 시절, 내가 속한 홍보실에는 내 또래 남직원이 세 명 있었다. 한 사람은 나와 동갑이지만 입사 2년 선배, 다른 한 사람은 나보다 한 살 연하지만 입사 1년 선배였다. 세 사람은 대학 동문이기도 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셋이 술자리를 갖고 말을 놓기로 했다. 얼큰하게 취해 집에 돌아가는 길, 이들과 한 직장에서 같이 일하고 있다는 게 뿌듯했다.

청와대에 들어가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고 첫 해외순방길에 올랐다. 긴장 속에 순방을 마치고 비행기가 서울공항에 안착했다. 비행기 바퀴가 공항 활주로에 닿았을 때, 수행원 모두가 일제히 손뼉을 쳤다. 순방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와 함께, 고된 일정 속에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대통령께 위로와 축하를 보내는 박수였다. 갑작스런 상황이 어색하고 민망했지만, 이내 동참했다. 손뼉을 치며 영문 모르게 가슴이 벅찼다.

지금도 글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렇다. 그런 사람과 어울려 사는 게 왠지 뿌듯하다. 동무들이 있어 두렵지 않고 편안하다. 내가 그 일원이라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29세에 하버드대 최연소 지도교수가 되어 40년 넘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로저 로젠블랫(Roger Rosenblatt)이 그랬다.

"글쓰기를 배우려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글쓰기라는 세계를 원할 뿐이다. 그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 그 세계를 거닐기 위해, 그 세계에 둘러싸여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다."

참여정부 때 연설비서관이 됐다. 행정관 네 사람이 국정 전 분야를 나눠 맡았다. 연설비서관은 행정관이 쓴 글을 고치는 사람이다. 고칠 자신이 없었다. 내가 고친 것이 그들이 쓴 초안보다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다 함께 모여 고치자고 했다. 대신 나도 초안을 썼다. 각자 초안을 쓰고 비서관과 행정관 5명이 함께 모여 고쳤다.

국민의 정부 때는 막내 행정관이었다. 나는 경제 분야를 썼다. 매일 시험을 치르는 심정이었다. 매번 비서관과 대통령의 평가를 받았다. 점수를 매기진 않았지만, 얼마나 고쳤는지가 곧 평가 점수였다. 누군가는 칭찬을 받고 누군가는 지적을 받는다. 초안을 쓸 때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이렇게 쓰면 비서관이 어떻게 고칠까, 대통령께 누가 되진 않을까. 결과적으로 무난한 길을 택했다. 지적받지 않고 문제 되지 않는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그 당시 나의 상태를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이랬다. 글을 잘 쓰겠다는 마음으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하다가, 아는 것 하나만 써야 하는데 알고 있는 다른 무엇까지 붙이려다 보니 횡설수설(橫說竪說) 꼬이고, 주제와 상관없는 멋진 표현이 생각나 억지로 넣다 보니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지며, 잘못 쓴 문장 하나 지우면 될 것을 살려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일파만파(一波萬波) 번지고, 찾아놓은 자료가 아까워 이곳저곳 쑤셔 넣다 보니 중언부언(重言復言)하게 되고, 쓰는 도중에 말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어떻게든 꿰맞추려다 보니 점입가경(漸入佳境)에 이르러, 마지막에 감동적인 마무리를 하려다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끝이 났다.

참여정부 때는 동료들이 고칠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동료를 믿고 자신 있게 썼다. 불필요한 자기검열을 하지 않기 때문에 보다 창의적인 글이 가능했다. 대충 쓰지도 않았다. 그러면 동료들이 고생한다는 것을 알았다. 동료에게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밤늦게까지 썼다. 내가 못 쓰면 동료 시간을 빼앗게 된다는 생각으로 고치고 또 고쳤다. 그래도 내가 혼나지 않기 위해 일할 때보다 덜 피곤했다. 동료들이 지적해도 기분 나쁘거나 찜찜하지 않았다. 도리어 고마웠다. 보답하기 위해 나도 열심히 지적했다. 서로의 지적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글이 좋아졌다.

누구는 잘 썼다고 집에 일찍 가고 누구는 못 썼다고 남아 있지 않았다. 밤을 새워도 함께 새우고 놀아도 같이 놀았다. 누군가 자신이 쓴 글 때문에 독회가 길어져 미안해하고 기가 죽어 있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의 글을 미리 봐줬다. 독회에서 줄 의견을 미리 줌으로써 그를 도왔다. 독회가 치열한 만큼 결과물도 좋아졌다.


낙오자 없이 함께 가야 한다

어느 조직이나 뒤처지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발목을 잡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조직에서 중요한 과제다. 같이 움직여야 하는 공동 작업이기 때문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본 스피드스케이팅 팀 추월 경기와 같다. 마지막 들어온 사람의 기록이 최종기록이 되는 경기다. 낙오자 없이 함께 가야 한다. 뒤처지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라도 뒤에서 밀어주고 부추기면서 같이 가야 한다. 그래야 끝나는 게임이다.

그렇다고 각자 초안을 쓰고 함께 모여 고치는 방식만 있는 건 아니다. 다 함께 모일 시간이 없으면 초안을 돌리고 각자 의견을 붙였다. 여럿이 각 부분을 나눠 작성한 뒤 합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대통령 국회 연설문은 경제, 정치, 사회 등 각자 전문 분야를 써서 한 사람이 종합하여 톤을 통일시켰다. 초안 없이 모여서 토의하며 함께 쓰기도 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필요한 짧은 글은 이런 방식이 효과적이다.

한편 직장에서는 잘 쓰는 사람이 견인해서 일의 효율을 높인다. 잘하는 사람이 앞에서 끌어준다. 중요한 글이 벽에 부딪치면 구성원 가운데 실력자가 나타나 해결한다.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안하고 기가 죽는다. 그를 본받으라 하지만 그리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그에게 배울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 자신의 레인을 각자 달릴 뿐이다.

이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경쟁 관계가 된다. 결국 누군가는 지적을 받을 텐데, '나만 아니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 된다. 늘 불안하다. 기분이 좋지 않다. 어딘가에 소속돼 있다는, 안전하다는 느낌이 없다. 서로 공유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논리적인 글을 잘 쓰고, 또 다른 사람은 정서적인 글에 강점이 있다. 잘하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잘하고 못하는 사람은 계속 못한다. 잘하는 사람의 지식, 정보, 경험이 못하는 사람에게 흘러가지 않는다.

공유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는 상태에서는 많이 가진 사람만 편하다. 공유하는 데에 시간을 빼앗길 필요도, 가진 것을 나눠줘야 하는 부담도 없다. 순위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격차가 벌어진다. 부익부 빈익빈이다. 경쟁 일변도 상황에서는 섞이지도 않는다. 경제 연설에 외교 안보 현안이 담기지 않는다. 경제 따로 정치 따로 식이다. 윗선에 올라가면 섞이긴 하지만 실무자 수준에서는 융합과 통섭이 일어나지 않는다. 

참여정부 때는 그것이 가능했다. 모여 앉아 글을 고치는 시간이 학습하는 시간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웠다. 토론하면서 많이 가진 사람의 것이 적게 가진 사람에게 흘러갔다. 나는 글을 쓰면서 누가 어떤 지적을 할지 예상이 됐다. 그러면 그렇게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력이 상향 평준화됐다. 어느 시점부터는 고칠 게 없어졌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서로가 잘 알았다. 어떻게 쓰자는 합의가 소리 없이 이뤄졌다. 독회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결과에 대해서도 누구만 좋고 누구는 나쁘지 않았다. 모두가 뿌듯하고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대통령에게 칭찬을 받건 꾸중을 듣건 모두의 일이었다.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공을 돌렸다. '광복절 경축사'같이 한 달여 동안 함께 고생한 일이 끝나면 삼청동 술집에 몰려가 삐뚤어지게 마셨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못해낼 일이 없겠다.' '이분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연대의 기쁨과 협력의 힘을 확인했다.

우리는 그렇게 공동체가 됐다.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여 앉아 말하는 게 전부였다. 늘 얘기하면서 서로의 속사정을 모두 알았다.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지금 컨디션이 어떤지 등.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얘기했다. 위로를 받기도 하고 동료와 함께 해결책을 찾기도 했다. 서로 공감하고 배려했다. 서로에게 못할 말이 없었다. 실력을 굳이 포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망설이지 않았다. 이런 얘기를 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을까 고민하지 않았다. 내키는 대로 말했다. 무슨 얘기를 해도 됐다. 나의 약점을 말한다고 그것이 공격받는 빌미가 되지 않았다. 되레 누군가 그 약점을 보완해줬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약점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기탄없이 말했고, 다 받아줬다.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상태가 됐다. 집보다 사무실이 편했다. 휴일에도 사무실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얘기하는 게 좋았다. 누군가는 사교 집단 같다고도 했다. 우리가 지나가면 "저기 텔레토비들 간다"고도 했다. 개의치 않았다.

완벽하게 혼자 쓰는 글은 없다

누가 글쓰기를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했는가. 굳이 혼자 쓸 필요 없다. 함께 쓰면 더 잘 쓸 수 있다. 외로운 싸움이기에 벗이 있으면 훨씬 낫다. 직장에 다니면 동료들끼리, 아니면 친구들끼리, 혹은 마을 분들끼리 모임을 만들어볼 것을 제안한다. 일종의 글쓰기 마스터 마인드 그룹이다. 마스터 마인드 그룹은 자기계발서의 원조 격인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이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에서 주창한 개념이다. 보통 3~7명이 정기적으로 모여 아이디어와 정보를 교환하고 토론을 벌이며 서로를 격려하고 자극하는 모임이다. 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 등 성공한 사람 배후에는 예외 없이 이들 마스터 마인드 그룹이 있었다.

직장에서 글을 쓰다가 혼자선 도저히 힘에 부칠 때, 사안이 중요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이 모임을 소집한다. 멀티태스킹이 되지 않는 뇌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여러 뇌가 함께 머리를 맞대는 것이다. 토론식으로 집단 창작을 하거나, 집합 지혜를 모으면 기대 이상의 좋은 결과가 나온다. 한번 도움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요청에 흔쾌히 응하고 성심껏 고쳐준다. 이렇게 부정기적으로 만날 수도 있고, 일정 주기로 순수한 글쓰기 모임을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엔 사전에 주제를 공유하고 A4 용지 한 장 정도로 글을 써서 모인다. 그리고 서로의 글을 평가해준다. 일종의 합평이다.

판타지 소설의 대가,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은 <글쓰기의 항해술>에서 합평의 유용성을 다섯 가지로 제시했다. 상호적 격려, 우호적 경쟁, 고무적 토론, 비평을 통한 훈련, 시련을 이겨낼 버팀목 마련이 그것이다. 뇌과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세 가지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 위험을 회피하려는 마음, 새로움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이런 세 마음과 어슐러 르 귄이 말한 합평의 유용성은 일치한다. 합평을 통해 얻는 다섯 가지가 인간이 추구하는 세 가지 마음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단, 멤버를 잘 짜야 한다. 격의 없이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비판을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실력 격차가 크지 않아야 한다. 모임에 기대려고만 하기보다는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고 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 규칙도 필요하다. 글을 써오지 않으면 커피값을 낸다든가, 다른 사람의 글에 관해 한 가지 이상씩 의무적으로 칭찬해야 한다든가.

나는 <협동작문의 이론과 실제>(오택환 지음)라는 책을 읽고 함께 쓰기에 관해 더 큰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책에서 밝히는 함께 쓰기의 장점은 이렇다. ▲구성원의 인간적 관계가 증진된다. ▲글쓰기가 본질적인 문제 해결 과정으로 기능한다. ▲경쟁적 구조의 폐해로부터 자유롭다. ▲참여자의 글쓰기 실력과 사회성이 신장된다. ▲효과적인 의사소통과 토론 능력이 향상된다.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치는 능력이 생성된다. ▲효과적인 피드백 방식을 터득한다. ▲글의 품질이 좋아진다. ▲긍정적인 상호의존성이 생겨난다. ▲공동체의식이 함양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은 크다. 내 방법이 결코 엉뚱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내 방식의 효과를 공인받은 기분이었다.

글을 쓰다 보면 반드시 슬럼프가 온다. 쓰는 자체가 싫어지기도 하고, 회의가 들기도 하며, 좋지 않은 반응에 좌절하기도 한다. 이때 용기를 주는 동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쓴 글을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 좋았다. 오랫동안 글을 쓰려면 그런 친구를 가졌는지, 그 친구가 누군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누구나가 함께 쓴다. 함께 모여 쓰지 않을 뿐. 누구나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쓴다. 보고서를 쓰면서 상사의 지적을 떠올리는 것, 이전에 누군가 써놓은 보고서를 참고하는 것, 과거 읽었던 책의 저자 소리를 듣는 것, 보고서를 쓰다가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옆자리 동료에게 물어보는 모든 행위가 함께 쓰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완벽하게 혼자 쓰는 글은 없다.

요즘도 나는 아내와 함께 쓴다. 아내와의 대화에서 소재를 찾고, 써야 할 글이 있으면 아내에게 말하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아내와의 대화가 곧 글쓰기 과정이다. 내 곁에는 글쓰기 광야를 함께 가는 동무가 있다. 서로 길을 물으며 길을 찾아가는 동행이 있다. 마음이 편안하다. 힘이 솟는다.
덧붙이는 글 필자 강원국은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를 출간한 이후 글쓰기 관련 강연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국의 글쓰기'는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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