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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5.16 09:54수정 2018.05.16 09:54
마트에 갔다가 천 원짜리 건빵 한 봉지를 카트에 담았다. 어릴 적 형들이 "건빵이나 감빵"이라고 그랬다.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 소리가 좋아 "건빵이나 감빵" 소리치고 다녔다.
내가 어렸을 때 종합선물세트란 게 있었다. 맨 위는 쪼코렛(초콜릿)이 장식했고, 그 아래 비스킷, 드롭프스, 껌이 있었다. 건빵은 바닥을 깔았다. 우리는 건빵을 보며 사기 친다고 욕했다.
군대 오니 또 건빵을 나눠준다. 훈련소에선 아껴뒀다 취침시간 이후나 똥간에 가서 먹었다. 건빵엔 별사탕도 들어 있었다. 별사탕 안에 정력 감퇴 성분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난 별사탕 찾는 재미로 건빵을 먹었다.
건빵에는 스토리가 있고 추억이 있다. 쓰는 것은 겪은 것을 넘어서기 어렵다. 설사 넘는다 한들 생생하지 않다. 이야기는 경험이고, 글은 이야기다. 내가 우리 아들보다 글을 잘 쓸 수 있는 힘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의 기억이란 것도 스토리텔링에 다름 아니다. 사람은 기억하려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스토리텔링을 한다. 입력되어 있는 정보를 꺼내 쓰는 과정에서 스토리를 덧입힌다. 기억은 압축된 정보 형태로 저장돼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야기를 채워 넣지 않으면 기억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니, 이야기를 귀담아들은 사람만 살아남았다. '위험하니까 거기 가지 마.' '거기 가면 먹을 게 있을 거야.' 이런 이야기를 무시하거나 콧등으로 들은 사람은 다 죽었다. 원시시대부터 이야기로 정보를 교환하고 전수했다. 이야기를 잘하고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생존과 직결돼 있다. 유전자 안에는 그런 이야기 능력이 들어 있다. 누구나 공평하게 글쓰기 능력을 타고난 것이다.

영화나 광고는 물론 연설, 기업 홍보, 자기소개, 기사, 프레젠테이션 등에도 스토리텔링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바야흐로 이야기 전성시대다. 글의 본질은 이야기다. 글이 이야기라면 글쓰기는 스토리텔링이다. 소설, 시나리오는 말할 것도 없고,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 SNS, 블로그 모두 스토리텔링이다. 보고서나 언론 기사도 과거에는 정보를 담았지만, 이제는 이야기를 쓰라고 한다.

정보는 재미와 감동이 없다. 재미와 감동이 있는 것이 이야기이고, 재미와 감동이 클수록 좋은 이야기다. 잘 쓴 내러티브 기사는 재미와 감동이 있다. 지금은 정보시대를 넘어 이야기시대이며, 글을 잘 쓴다는 것은 훌륭한 이야기꾼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의대생이 꼭 들어야 할 과목이 있다. 내러티브 의학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의대생은 소설 창작에 관해 배운다. 의대생이 웬 소설 공부? 의사는 환자에게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말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스토리를 엮어 나가는 서사 능력이 있어야 한다. 또한 환자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서사 능력은 필요하다.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역량은 진단과 치료에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 서사 의학이라고도 불리는 이 프로그램은 의학과 인문학의 성공적인 융합 사례로 꼽힌다.

의료 분야뿐만 아니다. 내러티브는 사회생활의 기본도구이자 생활양식이다. 인간은 육하원칙에 의해 일어난 사건을 구술하고, 자신이 본 장면을 묘사하며, 아는 것을 설명한다. 이처럼 내러티브는 생활 곳곳에 침투해 시시때때로 쓰인다. 이야기 형식이 재미있고, 이해하기 쉬우며, 기억도 잘 되기 때문이다.

의외성과 반전이 있어야 한다

어떤 이야기가 재밌고 감동적인가. 영화를 생각해보면 쉽다. 재미있는 영화는 흔한 이야기가 아니다. 맵고 짜고 신선하다. 갈등과 긴장이 있다. 주제의식이 분명하고 깊이가 있다.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몰입하게 한다. 결말에서 감정과 궁금증을 풀어준다. 같은 이야기도 예상을 빗나가는 얘기가 좋다. 결과가 빤한 이야기가 아니라 의외성과 반전이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늘어지고, 처음부터 결말이 예상되거나,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으면 최악이다.

미국 소설가 제임스 스콧 벨(James Scott Bell)은 'LOCK'이 들어가면 이야기가 탄탄해진다고 했다. LOCK은 주인공(Lead), 목표(Object), 대결(Confrontation), 승리(Knockout)의 앞글자다. 주인공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장애물이 등장해 갈등하고 대결한다. 적이 가는 길을 막아서고 방해하지만 도와주는 사람이나 사건을 만나 결국 승리한다.

<형사 콜롬보>를 쓴 로버트 맥기(Robert McKee) 역시 이야기 쓰기의 교본인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이야기에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관심을 잡아끄는 훅(hook) ▲관심을 유지하게 만드는 홀드(hold) ▲이야기의 절정에서 감정과 궁금증을 풀어주는 페이오프(pay off)다.

또 하나의 이야기 쓰기의 명작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에서 로널드 토비아스(Ronald B. Tobias)는 19가지를 제안한다. 추구, 모험, 추적, 구출, 탈출, 복수, 수수께끼, 라이벌, 희생자, 유혹, 변신, 변모, 성숙, 시련, 난관, 발견, 금지된 사랑, 상승과 몰락, 지독한 행위가 그것이다.

이 세 사람의 얘기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키워드는 추구, 성장, 시련, 몰락, 회복, 발견이다.

1. 추구: 목표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이건, 조직이건 간에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나 지향하는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나는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
2. 성장: 잘 나가던 시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몰락할 수 있다. 단, 성장하는 배경에 전환(시련)의 씨앗을 심어놓자. "행복했던 시절을 그린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만의 행복."
3. 시련: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나고, 나쁜 유혹이 손을 뻗치고, 누군가 배신한다. 갈등이 극에 달하고 난관에 부딪힌다.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잉태한 것."

4. 몰락: 떨어질 수 있는 데까지 처참하게 떨어진다. 인생의 쓴맛, 밑바닥을 경험한다. "헛된 행복을 좇던 욕망의 희생양이 된다."  
5. 회복: 인생의 동반자, 혹은 구원자를 만나는 등 회복의 계기가 있어야 하고, 회복 과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만회와 갱생 노하우를 선사해야 한다. "행복한 삶으로 복귀하거나, 복원, 재건한다."
6. 발견: 각성이 이루어진다.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 새롭게 성숙한 나. 이를 통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달음을 준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세상은 이야기 천지다

스토리텔링을 잘하려면 '선택과 배열'을 잘해야 한다. 우선,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를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 세상은 이야기 천지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화, 사례는 물론, 영화 줄거리나 책에서 읽은 내용을 전하는 것도 이야기다. 고사, 우화, 신화, 영화, 전래동화 등도 이야기다. 역사에는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하다. 이야기 교본인 문학작품도 있다. 그림이나 음악에도 이야기가 담겨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오늘 신문만 봐도 이야기가 넘친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것은 자기 이야기다. 매일 겪는 일상 중에서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잡아내 보자. 첫째는 재미이고, 둘째는 의미다. 재밌는 일이란 남들이 늘 겪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늘 하는 일은 재미없다. 재미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감동을 주려면 의미가 필요하다. 의미는 느낌이나 깨우침을 준 일이다. 사람은 의미에 감동한다. 일화, 에피소드에 교훈, 시사점을 입히면 생생하고 살아 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가 준비되면, 그다음은 배열이다. 좋은 이야기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혹시 그것 아세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식이다. 그런 다음 독자가 한눈팔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흥미를 유발한다. 무엇보다 구성이 치밀해야 한다. 좋은 이야기는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이 따로 놀지 않고 인과관계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이 있고, 행동이 있으면 의도가 있다. 앞에 권총이 등장하면 뒤에 누군가 총에 맞고, 벽에 박힌 못이 나오면 그 못에 누군가 목을 맨다. 이처럼 구성이 치밀하다는 것은 이야기 구조인 플롯이 좋다는 의미다. 스토리 속 사건은 인과관계 없이 일어날 수 있지만, 플롯 안에서는 사건들이 인과응보의 필연적 관계를 맺고 일어난다.

전개 또한 상투적이지 않아야 한다. 한국 영화를 보고 '외국 영화 같다'고 처음으로 느낀 영화가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이었다. 그전에 본 영화와 달리 이야기 전개가 빨랐다. 군더더기가 없고 반전이 있다. 전개가 상투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야기 방식인 내러티브가 좋은 것이다. 같은 스토리도 내러티브가 좋으면 <깊고 푸른 밤>처럼 세련미가 넘친다.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말대로 남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남과는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된다. 

이야기를 쓰다 보면 내가 만들어진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자기만의 이야기 샘을 하나씩 갖고 있다. 고사에 정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명언, 신화, 전설, 역사, 속담을 자주 쓰는 사람도 있다. 우화(寓話)도 그런 이야기 샘 중의 하나다. 우화는 동식물이나 사물을 인격화하여 만든 이야기다.

이솝우화가 대표적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도 이솝우화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겨울 나그네의 외투를 벗게 만드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라는 이야기다. 우화는 <토끼와 거북이>, <개미와 배짱이>에서 보듯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풍자로 웃음을 자아낸다. 비유를 통해 메시지를 쉽게 전달한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글감이 마땅찮으면 우화를 찾아보자. 그러나 너무 길게 인용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돼 흉하다.

이야기가 많은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려면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 그래야 할 얘기가 많다. 그리고 많은 사람과 만나 얽히고설켜야 한다. 경험하고 알고 여러 사람과 만나야 이야기 부자가 될 수 있다.

이야기를 만들자. 시도하고 어려움을 겪고 좌절하고 다시 기어오르자. 온탕 냉탕을 오가고 정상과 골짜기를 넘나들자. 그래야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야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고난, 역경, 좌절은 축복이다. 이야기를 하자. 친구에게, 자식에게, 배우자에게 이야기하자. 말하지 않는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고, 만든 이야기는 말하자.

그리고 매일매일 이야기를 쓰자. 블로그나 메모장에 쓰자. 실수한 얘기도 좋고, 낭패 본 얘기도 좋고, 어려움을 극복한 얘기도 좋다.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이야기는 시시각각 만들어진다. 나의 이야기가 나다. 이야기를 쓰다 보면 내가 만들어진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한 토막의 긴 이야기다. 우리는 살면서 매일 이야기를 쓰고 있다.
덧붙이는 글 필자 강원국은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를 출간한 이후 글쓰기 관련 강연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국의 글쓰기'는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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