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6 20:03최종 업데이트 23.06.2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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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토프나도누[러시아] AP=연합뉴스) 무장 반란을 일으킨 러시아 용병 기업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24일(현지시간)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나도누에서 텔레그램 메시지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프리고진은 "푸틴 대통령이 반역과 관련해서 깊이 착각하고 있다"며 "우리는 모두 반역자가 아니라 애국자"라고 주장했다. ⓒ 연합뉴스

 
균열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철옹성 같아 보였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권위가 한낱 모래성으로 전락하기까지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푸틴의 요리사'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불안한 칼은 주방을 뛰쳐나와 푸틴의 표현대로 그의 '등에 꽂히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푸틴의 몰락을 재촉한 것은 모스크바를 향한 프리고진의 군대가 아니고 푸틴 자신이었다. 지난 24일 용병부대 바그너 그룹이 전쟁터 우크라이나에서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진군할 때만 해도 이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대통령궁이 있는 크렘린으로부터 3킬로미터 남짓 거리의 러시아 국방부로 지목했다. 과연 그의 목표가 정말 대통령궁이 아니고 국방부 청사였을까?


사실 지략 싸움에서 사실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앞서 프리고진이 회군의 구실로 삼았던 것은 러시아 국방부의 무능이었다. 정규군을 대신해 다수의 요충지와 최전방에 섰던 프리고진의 군대는 수차례 국방부의 보급이 부실하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그러면 그때마다 크렘린이 나서 권위를 앞세운 정리 과정을 통해 갈등을 봉합하는 수순이 반복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았고, 권력간 교통 정리를 보여주며 권위를 자랑하던 푸틴의 리더십은 치명타를 입게 됐다. 어떠한 내부 갈등도 크렘린 발아래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해왔던 푸틴이었다. 하지만 이번 반란 앞에서는 칼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스스로 밝히면서 이제는 국가 위기의 해결사가 아닌 당사자로 전락한 모습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프리고진은 회군에 앞서 영상 메시지를 통해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부 장관과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이 오지 않으면 모스크바로 진격할 것"이라고 했다. '끝까지 갈 준비가 됐다'는 부연 설명에서도 원하는 것은 군 수뇌부의 처벌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푸틴은 그로부터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대국민 연설을 하기에 이른다. 

이번 러시아 용병부대 바그너 그룹의 반란극에서 가장 결정적 장면 가운데 하나가 푸틴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이었다. 프리고진의 군대가 모스크바를 향하는 동안 카메라 앞에 선 푸틴은 시민, 군대, 법 집행 기관을 향한 호소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리고 '속임수나 협박에 속아 가장 중대한 범죄인 무장 반란의 길로 내몰린 이들'에 대한 호소도 뒤따랐다. 

푸틴은 1917년 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의 한 장면을 끌어들여 프리고진의 부대가 러시아를 붕괴시킬 수 있는 내전의 한 축이 되는 듯 설명했다. '군대와 국민의 등 뒤에서 다툰 정치인들로 인해 군이 파괴되고 국가가 붕괴했으며 광대한 영토의 손실이라는 거대한 격변이 초래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현 상황이 그에 비견할 위기라고 국민들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2022년 2월 24일 전쟁도 아닌 특수군사작전일 뿐이라며 시작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제 러시아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거대한 사건으로 흐르고 있음을 푸틴 대통령 스스로 밝힌 셈이다. 그는 '민간, 군사 행정 기관의 업무가 사실상 차단됐다'면서 러시아 대통령이자 총사령관으로서 국가를 방어하고 시민을 지키기 위해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라며 국민 단결, 통합을 당부했다. 

사실상 마비된 러시아 수뇌부
 

(모스크바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용병 기업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반란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연설하고 있다. 이날 푸틴 대통령은 사태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가혹한 대응이 있을 것"이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비장한 다짐을 밝혔다. ⓒ 연합뉴스


그가 스스로 재촉한 몰락의 시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연설 중에 반란 세력에 대한 응징과 관련해서도 시간을 할애했다. '고의적으로 배신의 길을 택한 자, 무장 반란을 준비한 자, 협박과 테러 방법을 택한 자들은 모두 형용할 수 없이 강력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군과 정부 기관이 이들을 응징할 명령을 받았다고 밝혔다. 반테러 조치도 도입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던 바그너 그룹 용병들은 보란 듯이 모스크바를 향한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점령했던 우크라이나 동부의 바흐무트를 뒤로하고 국경을 넘은 그들은 러시아 로스토프주를 접수한 후 보로네시주와 리페츠크주를 지나 툴라주까지 거침없이 북상했다. 이제 모스크바까지 남은 거리는 불과 200킬로미터. 

바그너 그룹 용병들이 그들의 베이스캠프인 로스토프주의 주도(州都) 로스토프나도누시를 떠나 툴라까지 이동하는 동안 사실상 한차례의 정부군이나 기타 공권력에 의한 제지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러시아 정부군 측에서 1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우크라이나의 한 언론이 러시아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로스토프나도누와 툴라 사이의 거리는 900킬로미터에 달한다. 평상시에도 차로 10시간 가까이 걸리는 먼 거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별다른 장애 없이 빠르게 북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시민들 가운데에는 심지어 환호하는 이들까지 나왔다. 세계 2위 군사대국이라는 러시아의 내부 현실은 이처럼 처참했고 철권통치자 푸틴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정보는 그 정도로 제한되고 왜곡돼 있었다. 

반란군이 모스크바 코앞까지 접근한 것을 확인한 푸틴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길은 협상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권위를 바닥까지 추락시킨 결정타가 됐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처벌'과 '응징'의 대상이었던 이들과 갑자기 협상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정부의 행위로 보기 어렵다. 

그만큼 푸틴 대통령으로 향하는 정보와 그의 참모들의 조언, 그리고 푸틴 본인의 판단력 등 러시아 수뇌부의 정상적 기능이 사실상 마비됐다는 뜻이다. 그나마 협상의 주체도 러시아가 아닌 벨라루스였다. 지리상 유럽에 위치하면서 다른 유럽국가들로부터 철저한 제재와 왕따를 당하고 있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모스크바를 향한 바그너 그룹의 진군을 돌려세우는 조건으로 그들을 향한 러시아 정부의 모든 기소 취하를 제안했고 이를 푸틴과 프리고진, 양측이 받아들였다.

일일천하로 끝난 바그너 그룹의 반란은 과연 돌발적인 행동이었을까? 미국 정보기관들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이들이 확보한 바그너 그룹의 동향에 관한 정보는 거사 며칠 전 바이든 행정부와 미 의회 수뇌부에도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당시와 마찬가지로. 

물론 당시와 다른 점은 있다. 전쟁 발발 당시에는 바이든 행정부가 지속적으로 전쟁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이번에는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상식적인 이유에서다. 러시아 내전으로까지 갈 수 있고, 푸틴 대통령에게 치명적일 수 있으며, 서방 국가들에 불리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라는 건 종전에 대한 희망
 

24일(현지시간)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주 로스토프나도누의 한 거리에서 용병 기업 바그너 그룹의 병사들이 탱크 위에 앉아 시민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이처럼 미국 정보기관들도 파악하고 있는 정보를 크렘린에서는 왜 놓치고 있었을까? 푸틴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비결 가운데 하나가 분할통치였다. 정식 국가기관뿐 아니라 비선 조직들까지 그의 주변 등거리에 놓고 어느 한 쪽에도 힘의 절대우위를 주지 않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그들 사이에서 라이벌 의식과 위기감을 조성해 모두가 푸틴의 입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2인자를 두지 않는 그의 통치술은 분명 그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체계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의 취합능력 부족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비선조직들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정보 기관들마저 어느 쪽 눈치를 볼지 머뭇거리는 것이 현재 러시아의 현실이다. 

심지어 푸틴 대통령은 연방보안국(FSB), 군 총참모부 정보총국(GRU) 등 공식 정보기관들 외에 빠뜨리오뜨(Патриот Patriot)라는 정보기관 역할의 민간군사기업(PMC)도 운용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이들 정보기관이 상호 협력관계라고 하지만 과연 민간 비선 그룹과 정부 기관이 마냥 훌륭한 협력관계를 보장할지는 회의적이다. 당장 바그너 그룹과 러시아 국방부의 관계를 보면 바로 짐작할 수 있다. 

2000년 집권한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의 골칫거리 올리가르히(신흥재벌집단)를 제압,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랬음에도 그가 필요로 하는 올리가르히는 오히려 보호하고 육성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그들은 푸틴의 비선 그룹이 되어 러시아의 정·재계는 물론 군조직까지 주무르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들의 '위험한 관계'가 보여준 말로는 지금 우리가 보는 그대로다. 

신흥재벌이자 푸틴의 측근 프리고진은 이제 푸틴에게 지워진 인물이다. 심지어 대국민 티브이 연설 중에도 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바그너 부대의 병사와 지휘관들'은 국가를 위해 싸운 상징으로 언급됐지만 그 부대의 총 책임자이자 반란 핵심 인물의 이름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22년 푸틴의 충복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볼드모트처럼 이제는 이름조차 언급될 수 없는 푸틴의 빌런으로 전락했다. 

바그너 그룹의 반란극이 끝난 현재 러시아 정국의 시계는 제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칠 영향도 초미의 관심사다. 벨라루스로 떠난 것으로 알려진 프리고진의 행방도 묘연하다. 이번 미완의 반란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에 어떻게 작용할지 관건이다. 현재 러시아에 있는 반푸틴 세력에게는 어떤 동기를 불어 넣을지도 관심거리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 지금, 그래도 바라는 건 종전에 대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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