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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이어온 드라마가 배우의 노화를 피하는 법

[김성호의 씨네만세 512] <닥터 후: 시간의 종말>

23.07.15 09:23최종업데이트23.07.1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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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터 후: 시간의 종말 포스터 ⓒ BBC

 
영국 BBC의 명품 드라마 <닥터 후>는 무려 반세기 넘게 방영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드라마 시리즈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까지 10여 년 동안 휴방기를 가졌으나 BBC에선 이 드라마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라 확인했을 만큼 국민적 인기를 누렸다. 휴방기 이후 나온 뉴 시즌만도 10개가 넘어섰는데, 그 중간 별도로 작품성 있는 단편을 내놓은 것이 이른바 <닥터 후> 스페셜이다.
 
<닥터 후: 시간의 종말>은 네 번째 뉴 시즌 뒤 나온 5편의 스페셜 중 하나다. <닥터 후>를 애정하는 이른바 '후비안'들에게 이 작품은 특별한데, 이는 다름 아닌 재생성(regeneration)이 이뤄지는 흔치 않은 편이기 때문이다.
 
배우의 노화 피하는 장수드라마의 설정
 
재생성은 OTT 서비스 업체들이 등장하며 가히 전 세계적 시장을 확보한 드라마 산업에 있어 여러모로 흥미로운 설정이다. 이는 실사 드라마가 필연적으로 지니는 한계를 아이디어를 통해 극복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드라마 시리즈를 만들어낸 비결이라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무려 수십 년을 가로질러 제작되게 되면 주인공을 비롯해 주연 배우들의 노화를 피할 수가 없다. 주인공이 나이를 먹어도 전개 상 무리가 없는 드라마도 있을 수 있겠으나, <닥터 후>의 주인공 닥터처럼 인간보다 노화가 천천히 오는 데다 훨씬 더 긴 수명을 가진 외계종족을 보여주려면 배우의 노화를 시청자에게 가리는 선택을 할 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재생성이란 개념이 탄생한다.
 
재생성은 육체의 수명이 다한 타임로드가 새로운 신체를 맞이하는 일을 가리킨다. 동일한 기억을 새로운 육체에 담아 제 영속을 이어가는 것이다. 같은 기억을 갖긴 했으나 육체가 다르니 완전히 동일한 존재라고 볼 수는 없겠으나 기억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정체성의 상당부분이 유지되어 닥터라는 캐릭터를 이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재생성을 할 때마다 닥터는 조금씩 다른 성격과 기질을 갖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닥터 후> 전성기 이끈 테넌트의 마지막
 

▲ 닥터 후: 시간의 종말 스틸컷 ⓒ BBC

 
<닥터 후> 뉴 시즌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몇 차례 재생성을 거쳤다. 첫 번째 재생성은 뉴 시즌에서 첫 닥터 역을 맡은 크리스토퍼 에클스턴이 한 시즌 만에 하차하면서였다. 뉴 시즌의 중흥을 이끈 데이비드 테넌트가 이를 이어받아 연기했고, 그는 이후 4년간 닥터 역을 맡아 뉴 시즌 4까지의 여정을 이어갔다. 영국을 넘어 전 세계 80여 개국에 시리즈가 방영될 만큼 큰 인기를 구가한 뒤 그는 <시간의 종말> 편에서 마지막을 고한다.

<시간의 종말>은 데이비드 테넌트에서 맷 스미스로 이어지는 닥터의 교체, 즉 재생성을 담은 독자적인 회차다. 모두 두 편으로 제작되어 장편영화 한 편 분량으로 나온 이 드라마는 마지막 남은 두 명의 타임로드가 대립하는 이야기로 꾸려진다. 그 하나는 닥터(데이비드 테넌트 분)이고, 다른 하나는 마스터로, 지구인을 숙주 삼아 제 힘을 키우겠다는 마스터에 맞서 닥터는 언제나처럼 사람들을 구하려 하는 것이다.
 
별반 새로울 것 없는 <닥터 후> 시리즈의 한 회차인 이 이야기는, 그러나 많은 감상을 안긴다. 그건 재생성이라는 아이디어 하나로 무려 60여 년을 이어온 이 오래된 드라마의 생명력과, 그렇게 버티고 이어온 과정 속에서 이뤄진 수많은 시행착오와 성과들, 나아가 겹겹이 쌓여 어느덧 세상 어느 드라마 속 캐릭터와 맞서도 경쟁력이 있는 닥터라는 어마무시한 캐릭터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시즌을 이어가며 깊이 더하는 캐릭터의 힘
 

▲ 닥터 후: 시간의 종말 스틸컷 ⓒ BBC

 
그리하여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이한 이른바 한국의 K드라마 콘텐츠가 그 놀라운 성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훌륭한 캐릭터를 얼마 갖지 못하였는가 하는 자성에까지 이른다.

돌아보면 한국엔 유독 시즌제 드라마가 얼마 나오지 못하였고, 몇 편이 나오긴 했다 해도 시즌을 이어가며 깊이를 더하는 캐릭터를 가진 경우는 얼마 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영화판에서까지 캐릭터를 귀히 여기지 않는 풍경들을 보게 되고는 하는 것이다.
 
지난 '씨네만세'에서 주연배우와 관련해 제기된 의혹 뒤 중단된 <조선명탐정> 시리즈를 이야기한 것도, 또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범죄도시> 시리즈에 박수를 보낸 것도 모두 이와 관련한 일이라 하겠다. 가만히 생각하면 꾸준히 지속하여 얻어지는 귀한 일이 영화며 드라마 가운데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한국 드라마 속에서 그렇게 오래가는 캐릭터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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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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