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17 14:56최종 업데이트 23.08.1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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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지난 7월 13일(현지시간)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오른쪽)과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관련 회의가 열리고 있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만나고 있다. ⓒ 연합뉴스


미국은 중국의 경제적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의 경제·안보 패권전략을 대폭 변화시켜 왔다. 그에 따라 글로벌 무역질서도 빠르게 재편 중이다. 미국이 추구하는 새 무역질서의 기본적인 방향 중 하나는, 인공지능을 포함한 첨단기술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반도체와 배터리 부문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나아가 중국을 부분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첨단산업의 생산시설을 자국으로 옮기고, 정치 동맹들 중심의 블록화를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 부문의 비중이 큰 우리 경제 역시 이러한 변화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같은 변화로 우리나라가 받게 될 영향에 대해 논의하고 가늠할 때, 이념에 경도되어 잠재적 기회는 과장하고 잠재적 위험은 간과하는 모습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이 한국경제, 그중에서도 반도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하나의 반도체는 설계부터 최종 제품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수십 번 가로질러 오고 가며 완성된다. 오늘날 고도로 전문화하고 복잡하게 얽힌 반도체의 글로벌 공급망은 정치 논리가 아니라 낮은 운송 비용과 효율성, 그리고 국가 간 비교우위라는 경제 논리에 따라 구축되고 수십년에 걸쳐 성장해 왔다.

그 배경에는 냉전 종식 이후 새롭게 수립된 미국의 경제·안보 패권전략으로 나타난 경제적 세계화를 들 수 있다. 경제적 세계화로 인해 나라 간 재료, 장비, 지적재산, 중간재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졌으며, 기업이 글로벌 공급망을 쉽게 구축해서 생산·판매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됐다. 이런 면에서 지리적으로 넓게 분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긴밀히 얽혀있는 반도체의 글로벌 공급망은, 지난 30여 년간 시장과 경제 논리에 기반해 펼쳐진 세계화의 대표적 산물이기도 하다.

반도체, 국경 70번 넘나들며 생산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7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반도체 국가전략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반도체 산업과 세계화의 이런 멋진 케미는 사실 반도체의 물리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반도체는 작고 가벼워서 생산비용에서 운송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다. 일반적으로 반도체 생산에는 약 100일이 소요되는데, 그중 공급망을 따라 평균 70번에 걸쳐 국경을 넘나들며 이동하는 데 12일이 소요된다(미국 공급망 100일 검토 보고서). 반도체 산업이 지구적 스케일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조직화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반도체 산업이 늘 이러한 고도의 효율성을 누린 건 아니다. 경제적 세계화가 오늘의 수준에 이르기 이전에는 인텔과 같은 종합 반도체 기업이 설계부터 제조와 조립·테스트·패키징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아웃소싱 없이 내부에서 수행했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 이러한 전략을 취한 인텔 등의 기업들은 쇠락한 반면, 비교우위에 기초해 생산 단계별로 전문화하고 글로벌 공급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기업들(엔비디아, AMD, 퀄컴 등)은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로 성장했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 집중하고 특화하는 비교우위의 경제 논리가 반도체 산업과 얼마나 잘 맞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 공급망 100일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미국의 기업들은 칩 설계, 전자 설계 자동화, 지적재산, 고급 제조 장비 등 연구·개발(R&D)의 집약적인 활동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반면 한국과 대만의 기업들은 대규모 자본 투자가 필요한 메모리와 웨이퍼 제조 분야에서 앞서 있다. 일본의 기업들은 반도체 소재 분야에 특화한 반면, 대만과 중국의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숙련이 덜 필요하고 자본 집약적인 조립·테스트·패키징에 특화되어 있다.

글로벌 공급망으로 연결된 이러한 국제 분업체계는 최근 미국의 경제·안보 패권 전략에 따라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반도체 생산공정에서 높은 기술적 우위를 갖춘 미국은 이제 비교 열위에 있는 첨단 웨이퍼 제조 분야까지 자국 안에 확보하기 위해 부분적 반도체 공급망의 재편을 추진 중이다.

이러한 정책은 반도체과학법(The Chips and Science Act)을 통해 법률적으로 뒷받침된다. 구체적으로 2026년까지 약 390억 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사용하여 미국 내 생산시설이 없는 10나노 미만 웨이퍼 생산시설을 건설하도록 유인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1년 11월에 텍사스주 테일시에 웨이퍼를 생산하기 위한 투자 계획을, TSMC는 2022년 12월에 애리조나주에 4나노와 2나노 웨이퍼 생산을 위한 투자 계획을 발표하였으며 현재 공장 건설이 진행 중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 정책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인 인텔 또한 애리조나주와 오하이오주에 첨단 웨이퍼 생산을 위한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다. 경제·안보 측면에서 미국 반도체 공급망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이 일정 정도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향후에 첨단 웨이퍼 제조를 위해 미국으로 공장을 지속적으로 이전하는 데는 많은 난관이 놓여 있다. 보스톤 컨설팅 그룹과 미국 반도체 협회가 공동으로 수행한 분석에 따르면 제조 공장을 미국 내에 건설하고 운영하게 되면 해외에서보다 약 30% 추가 비용이 더 발생한다고 한다.

반도체과학법은 기업의 추가 비용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보조금 지급 자체가 2026년까지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과,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향후 10년 동안 중국에 신규 투자나 생산 확대를 5% 이상 할 수 없도록 강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미 상무부는 지난 2월 "1억 5천만 달러 이상의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초과이익이 발생한 경우에 금액의 일부를 반환"하라는 조항이 추가된 '반도체 지원법 재정 인센티브 세부 계획'을 발표했다.

즉, 미국에 공장을 설립하고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그 대가로 현금 흐름, 수익구조 등 민감한 경영상황을 미 정부와 공유해야 한다. 심지어 생산공정의 기밀사항 등이 노출될 수도 있는 공장 내부 접근을 허용해야 한다. 이런 점들 때문에 해외 기업들은 바이든 행정부의 공급망 재편 전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주저할 수 있다.

미 전략에 참여하면 되돌리기 어려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7월 7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경제와 관련한 발언을 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더 큰 문제는 미국의 공급망 재편 방향이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보스톤 컨설팅 그룹과 미국 반도체 협회가 공동으로 수행한 또 다른 분석에 따르면, 만약 글로벌 공급망 대신 중국과 미국 등 각 국가가 독립적인 지역 공급망을 갖춰 현재 수준의 반도체 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약 1조 달러의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 또한 반도체 가격은 35~65%까지 증가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모든 최종 재화들의 가격도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고비용 구조의 산업과 폐쇄적 무역질서가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평가 없이 이뤄지는 이런 투자 결정은 향후 우리 경제에 큰 짐이 될 지도 모른다. 공장 건설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투여하여 미국의 정책에 참여하게 되면 이를 되돌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공급망 재편과 더불어, 첨단 반도체 제품에 대한 대 중국 수출 통제 정책을 통해 중국이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술과 시설을 보유하게 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한다.

예컨대, 미국은 자국 기업의 첨단 반도체 제품(엔비디아의 고성능 A100와 H100 GPU 칩 등)과 미세공정 제조 장비에 대해 대 중국 수출을 제한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미국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적으로 생산하는 기업인 ASML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도록 네델란드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 또 일본 정부와 협력하여 일본 기업들이 첨단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요한 극자외선 기반 장치, 각종 식각·검사 장치 등 14나노 이하의 미세공정에 필요한 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통제한다.

이러한 수출 통제는 중국 기업뿐 아니라 중국 내에서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에도 적용된다. 이미 중국 내 반도체 공장에 약 60조 원 이상을 투자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더 이상 첨단장비를 중국으로 반입하지 못하게 되면 중국 공장의 생산공정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 중국 수출 통제 정책은 일시적인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로 중국이 미국 기업들이 생산하는 반도체의 가장 큰 수요국인 점을 들 수 있다. 즉, 중국을 대신하는 판매시장이 창출되지 않고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수출 통제 정책이 지속적인 효과를 내기가 어렵다.

중국은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 분야에 필수적인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에 비해 아직 상대적으로 기술 격차가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이든 행정부의 자국 중심 공급망 재편 전략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 전략을 무력화시키고 자국의 제조 공급망을 보완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첨단산업의 특정 생산공정에 국한된 부분적인 디커플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거 미-소가 대립했던 냉전시대처럼 모든 산업 분야에서 중국과 전면적인 디커플링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부분적인 디커플링의 범위는 가변적이며, 향후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정치·경제적 요인들에 의해 영향받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부분적인 디커플링 정책은 움직이는 과녁과 같아서 미국의 공급망 재편에 대응하는 다른 나라 기업들과 정부는 커다란 불확실성에 직면한다는 점이다.

공급망 다변화 전략은 대안 아냐
 

2022년 5월 20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둘러보며 대화하고 있다. ⓒ 대통령실

   
일각에서는 부분적 디커플링의 위험을 헤징하기 위한 방안으로 탈중국화 혹은 중국 플러스 1 전략과 같은 일종의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에서 공급망 다변화를 통한 기업의 대응은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다.

공급망 다변화는 한 지역에서 생산이 집중될 때 파생되는 규모의 경제의 이점(예를 들어 생산비용의 감소)을 희생해야 하므로 디커플링이 야기하는 교역 비용이 매우 크고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반도체 산업에서의 수직적 공급망의 다변화와 배터리, 화장품 산업 등에서 판로 개척을 위한 공급망 다변화 전략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공급망 재편에 따르는 기업의 신규 생산설비 투자는 한번 이뤄지면 되돌리는 비용이 대단히 크고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디커플링 정책이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기업이 투자를 전면적으로 실행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 정책에 순응하면서 가변적인 디커플링 정책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나라 기업들이 선택할 수 있는 안전하고 경제적인 전략은 무엇일까? 당분간은 반도체 제조 설비 투자와 핵심 소재 투자를 미국도, 중국도 아닌 우리나라에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기업의 이익은 물론, 반도체 산업이 연관 산업들에 파급되는 긍정적인 효과와 내수경제에 미치는 낙수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전체 경제에도 이롭다. 물론 이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재정적인 지원과 더불어 미중 경쟁에 휘말리지 않는 유연한 외교정책 수행이 필수적이다. 이미 우리 정부와 기업은 몇 년 전 일본 정부의 반도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경험이 있다.
 

문성만 / 전북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문성만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문성만 교수는 전북대학교에서 경제학의 다양한 분야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스페인 카를로스 3세 국립대학 경제학과와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재직했습니다. <아태경상저널>과 <Journal of APEC Studies> 편집장을 역임했거나 하고 있습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거시경제학, 국제경제학, 응용경제학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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