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5 07:05최종 업데이트 23.11.15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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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를 하고 나서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어디를 가도 무심코 택배기사가 눈에 띄고 주변의 배송 환경을 살피게 된다. 택배기사가 트럭 탑재함 문을 열어놓고 물건을 고르고 있으면 나도 함께 유심히 본다. 어떤 물건들이 실려 있는지 둘러보고, '저 정도면 몇 시간쯤 걸리겠다'는 계산도 해본다. 동네의 골목은 어떻고 차량흐름은 어떤지가 눈에 들어올 때도 있다.

배송의 편의로만 보자면, 좁고 복잡한 골목이 많은 동네보다는 도로가 쭉쭉 뻗어있고 바둑판처럼 동·호수 구획이 잘 나뉜 아파트가 백번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택배기사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아파트가 많은 구역을 배송하는 사람이 부러움을 산다.


한창 택배를 힘겹게 배울 때는 온 세상이 다 아파트면 참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제정신이 돌아오면 이웃이 오가며 아이들이 뛰노는 동네만큼 사람 냄새나는 곳도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아파트가 많아도 너무 많다. 1980년대부터 도시화, 현대화와 함께 널리 보급되면서 아파트는 중산층의 상징이었다. 아파트와 규격화된 도시구획으로 깔끔한 서울은 성공하고픈 국민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서울은 갈수록 커지고, 인구도 많아졌으며, 전국 어디나 서울을 닮아갔다.

나 역시 서울 성내동에서 태어나 경기도 근교만 돌아다닌 평생 수도권 사람이다. 그러나 내 마음에 가장 남는 곳은 경기도 광명이다. 2004년 이사 간 하안동 주공5단지 아파트는 크게 높지 않은 주변의 다른 주공아파트와 함께 그야말로 소박하고 서민적인 아파트 마을을 이루었다.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이름도 재미있는 도덕산이 있어 가족 모두 자주 오르내렸다. 살다 보니 광명 전체가 그랬다. 광명시를 둘러싸고 구름산, 도덕산, 가학산, 철망산, 서독산 등이 이어져 있어 어디에 살든 조금만 걸으면 금세 푸르고 울창한 숲을 거닐 수 있었다.

광명은 서울과 경계를 나누는 안양천이 지나고 작은 개천이 있고 산의 옹달샘도 적지 않다. 더구나 구름산을 끼고 가리대마을, 안터마을, 설월리마을 등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자연부락도 적지 않아 산에 오르다가도 일부러 멈춰 한참 살펴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일제 강점기부터 면사무소가 있었던 소하동의 설월리 마을은 초가집, 기와집 형태의 흔적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 자연부락이다. 불교 사찰과 가톨릭 기도 처소, 교회가 사이좋게 자리 잡은 광명의 자랑이기도 하다. 내게 광명은 아이들이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해 목회했던 곳이라 더욱 애착이 간다.
 

개발 전인 2015년의 설월리 마을 ⓒ 구교형

 
도시개발이라는 눈물의 악순환
   
그러나 광명은 서울을 위해 개발되고 발전했다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기에 중요한 정책이 서울에서 먼저 결정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도시 전체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산과 숲이 아름답던 밤일마을은 음식점 숲이 되었고, 주공아파트를 헌 자리에 산보다 높은 고층 아파트가 병풍처럼 늘어섰으며, 큰 도로가 산·하천·자연부락을 가로질러 여기저기 놓였다.

광명은 서울시 무한 확장을 위해 언제든 빼먹을 수 있는 곶감처럼 인식되었다. 십수 년 전부터 뉴타운, 신도시 등 대규모 개발 예정지로 고시되었다가 취소되기를 거듭하더니 지금은 그나마 개발 손길에서 벗어나 있던 산자락과 농지까지 속속 파헤쳐지고 있다.

10여 년 전 광명에 살면서 몇 해 동안 농사를 지어본 적이 있었다. 부모 때부터 광명 원주민으로 살아 지금도 밭농사를 짓고 있는 지인 목사님이 자기네 밭을 가꿔보라고 권했다. 나는 서울 촌놈이라 어떤 게 풀이고 어떤 게 곡식 줄기인지도 구별 못 하던 생초보였다. 그러나 목사님께 배우고 주변에서 듣고 인터넷을 찾아가며 고구마, 감자, 고추, 상추를 심었고 나중에는 가을배추와 무까지 골고루 심고 돌봤다.

틈날 때마다 가서 물주고 풀 뽑으며 소처럼 열심히 일하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기 미안할 정도로 기본적으로 땅이 너무 좋았다. 흙을 고르다 보면 굵은 손가락만큼 큰 지렁이와 땅강아지가 수시로 보였다. 그러다 보니 캐낸 고구마와 감자 등을 다 나눠주기도 힘들 만큼 정말 풍성하게 거두었다. 도시 속 농촌으로 광명의 또 다른 매력을 보았다.

10년 만에 다시 방문한 동네는 곳곳이 뒤숭숭하고 가을바람만큼이나 썰렁했다. 목사님 사택이 있는 주택가는 전체가 3기 신도시로 수용되어 울긋불긋한 현수막들이 나붙었고, 큰 도로 건너 언덕과 밭, 산지는 산업단지로 수용되면서 산자락이 흉측하게 무너져 있었다.

조상 때부터 내려온 소중한 농민의 밭과 산을 국가가 최저가인 평당 40만 원에 후려쳐 강제수용해 갔다. 그 돈으로는 산 넘어 건너편 광명역사 부근 작은 평수 아파트도 살 수 없다. 그런데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내부 정보를 이용해 땅 투기에 사용했음이 밝혀진 게 바로 그 무렵이니 농민과 원주민들의 분노와 배신감이 얼마나 크겠나?

나라는 개발과 건설이라는 공익을 앞세워 농민과 원주민의 땅을 최저가로 빼앗다시피 하여 민간 건설업자나 개발업자에게 싼값에 팔면, 그들은 그걸로 아파트와 상가를 비싸게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 그 과정에서 정보를 독점한 공무원과 공사 직원들이 투기에 가세하고, 개발의 공로를 안고 정치인은 재선된다.

반면, 땅을 빼앗긴 원주민과 오른 부동산 가격을 감당 못 하는 지역주민들은 더 싼 곳을 찾아 정든 마을을 떠나야 한다. 앞서 언급한 설월리 마을도 고층 아파트로 탈바꿈하기 위한 이주가 시작되어 여기저기 가림막이 즐비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도시개발이라는 게 거의 이런 눈물의 악순환을 거듭해 왔다.

강제 수용당한 목사님네 산의 좋은 소나무 숲은 다 베어지고 깎인 채 지난여름 많은 비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지금은 커다란 가림막이 둘러쳐져 있다. 목사님은 유순함을 타고 난 분인데도 심경을 물으니 "트라우마가 너무 커요"라고 했다.
 

강제수용 당한 후 무너진 산과 밭 ⓒ 구교형


선거공약 정도로 써먹는 몰염치

최근 보궐선거 참패 이후 내년 총선을 걱정하던 여당이 돌연 김포를 비롯한 서울 근교 지역의 서울 편입을 공언하며 표심을 자극하고 있다. 당연히 지금껏 서울의 곶감 노릇을 해 왔던 광명도 포함되어 있다. 여당 광명지구당에서는 벌써 역 주변에서 서울 편입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처음 들었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다. 안 그래도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다 빨아들여 비대할 대로 비대한 서울을 분산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가 집권하든 동의한 지 오래인데, 한 도시의 미래를 아무런 공적 논의도 없이 돌연 선거공약 정도로 써먹는 몰염치에 할 말을 잃는다.

물론 여론조사에서도 나오듯이 서울 편입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총선을 위해 잔뜩 써먹다가 선거 끝나면 슬그머니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그냥 에피소드나 해프닝이 아니다. 서울 편입이 되든 안 되든, 여당 공약으로 언급되는 순간, 해당 지역 부동산 시장은 근거 없이 춤추고 밀려나는 사람이 생겨난다.

그나마 서민이 살만한 여건과 환경이 남아 있던 광명도 갈수록 높아가는 부동산 가격과 개발 수요에 밀려 오랜 지역주민은 다시 떠나고 지역 색채를 잃고 메가 서울을 닮은 모습으로 채워져 갈 것이다. 대한민국의 도시 발전이라는 게 왜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하고 거대화해야만 하는지 묻고 싶다. 대한민국 어디나 조금의 빈틈만 생겨도 기어이 도로 내고, 땅을 파헤치고, 아파트를 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사람살이가 화려함이나 편리함으로만 정리되지 않는데 대한민국의 삶은 여전히 같은 색깔, 같은 느낌밖에는 허락하지 않는다. 단지 지나친 개발을 멈추고 환경을 보존하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일제 강점, 분단과 전쟁, 가난, 독재의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는 무조건 개발, 무한성장 대신 이웃과 조화하고 자연과 화해하는 대한민국으로 전환하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택배 배송이 조금 힘들어도 동네와 마을이 대한민국에 남아 있으면 좋겠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에스겔 47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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