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0 11:03최종 업데이트 24.01.1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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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ILO는 장시간 노동과 반사회적 노동시간이 노동자의 건강과 일-생활 양립을 저해하여 번아웃과 이직률을 높인다고 경고했다. ⓒ 셔터스톡

 
지속가능한 지구와 사회가 화두이다. 문제 제기의 근원에는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극복 없이 더는 지구의 미래도 없다는 심각한 위기의식이 있다. 탈탄소, 불평등 타파는 국제사회의 긴급하고도 중요한 공동 목표로 천명되었고, 각국 정부도 복합위기의 시대를 돌파할 급진적·발본적 대안을 제시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기후행동, 인권 존중, 비차별과 성평등은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각국의 지속가능발전 의제의 핵심을 차지한다. 지구 열탕화 시대에 지구 재앙을 막기 위한 급진적 기후행동이 지금 즉시, 전방위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 인간의 존엄과 비차별에 대한 보편적 존중 및 완전한 성평등의 향유가 공정하고 공평하며 포용적이고 개방된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근본적인 요소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 공유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하에 기업은 앞다퉈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표방하면서 E와 관련하여 넷 제로(net zero) 경영, 친환경 경영을 추진하고 있으며, S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의 인권, 건강과 산업안전, 비차별과 성평등을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E, S, G에 대한 통합적 접근을 하지 못하고 생태주의적 관점과 성주류화 관점 없이 개별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오히려 탈탄소와 성평등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노동시간 정책을 둘러싼 논란은 이와 같은 몰젠더적이며 반생태주의적 관점의 한계를 드러냈다. 필자는 지난해 1월 17일 칼럼에서 노동시간 정책 추진 시 ILO(국제노동기구)의 존엄한 노동시간(decent working time)의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관련기사: 주 69시간 일하고 건강 지킬 수 있나... ILO의 경고https://omn.kr/22e5p)

ILO는 장시간 노동과 반사회적(unsocial) 노동시간이 노동자의 건강과 일-생활 양립을 저해하여 번아웃과 이직률을 높인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ILO는 노동자가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일할 수 있으려면 장시간 노동을 근절해야 할 뿐만 아니라 유동적인 시장 수요에 따라 예측 불가능한 노동시간, 저녁·심야·주말에 이뤄지는 비전형적 근무시간을 편성하면 안 된다고 했다. 또한 노동시간 정책이 성평등을 촉진하는 수단이어야 한다면서 여성과 남성 모두 일과 돌봄을 병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장시간 불규칙 노동은 일과 돌봄의 양립을 불가능하게 하여 여성들에게 제약을 가하고 유리천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기에 존엄한 노동과 성평등을 요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성별 임금격차의 주범은 '탐욕스러운 일'
 

클라우디아 골딘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지난해 10월 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하버드 대학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AFP/연합뉴스


노동과 노동시간이 조직되는 방식과 성별 임금격차 및 불평등과의 관계는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클라우디아 골딘의 저서 <커리어 그리고 가정>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골딘에 의하면, 오늘날까지도 여성들은 커리어와 가정을 양립시키기 위해 고전하고 있는데, 이는 커리어가 갖고 있는 명백하고도 핵심적이며 가시적인, 탐욕스러운(greedy) 속성 때문이다. 커리어를 쫓는 일이 가혹한 밀도로 불규칙한 일정에 대응해 가며 장시간 일할 것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높은 보수를 지급한다는 것이다. 즉, 시간외 근무와 주말 근무를 밥 먹듯 하고 저녁 시간과 밤 시간도 일에 쏟아부으며 직장의 호출(on-call)에 언제나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이런 탐욕스러운 일자리를 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탐욕스러운 일'이라는 표현은 클레어 케인 밀러의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 기사는 미국의 일에 대한 집착이 장시간·불규칙 노동을 낳았고, 장시간 노동에 결부된 임금 프리미엄이 부부간 불평등한 역할을 통해 젠더 불평등을 강화했다고 꼬집었다.

이는 <커리어 그리고 가정>의 핵심 주장과도 맞닿아 있다. 골딘은 이 저서에서 성별 임금격차의 주범을 탐욕스러운 일과 노동시간으로 보았다. 불규칙한 장시간 근무를 요구하는 탐욕스러운 일자리는 직장의 온콜 상태가 되는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전통적인 성별 역할 규범에 의해 돌봄의 책임이 더 강한 여성에게 부합하지 않는다.

육아와 돌봄은 가정의 온콜을 요구하기에 부부가 가구 소득을 높이기 위해 어느 한 쪽이 직장의 온콜 상태가 되기로 하면 다른 쪽은 이를 포기하고 근무시간이 짧고, 근무 일정이 예측 가능하고, 시간 사용에 유연성이 더 많이 허용되는 일자리를 택한다. 이때 성별 분업에 의해 가정의 온콜에 더 잘 대응할 수 있는 일자리를 선택하는 것은 주로 여성이다. 이러한 부부간 불평등한 분업은 다시 성별 임금격차로 귀결된다. 즉, 일반적으로 남성은 장시간·불규칙 노동을 통해 높은 임금을 받는 일을 선택하고, 여성은 높은 소득과 커리어의 진전을 상당 부분 포기하면서 시간 요구와 압박이 덜 강한, 유연한 일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골딘의 저서에서 젠더 불평등의 원인으로 지목된 미국의 탐욕스러운 일자리와 그 일자리에 결부된 장시간·불규칙 노동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골딘은 그런 일자리가 돌봄에 동등하게 참여하고자 하며, 일-생활의 균형을 중시하는 새로운 세대로부터도 외면받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고소득 근로자의 근로시간 제한을 없앤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collar exemption) 제도를 우리나라에 도입하자는 주장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고소득 전문직의 근로시간 제한을 없앤 미국의 탐욕스러운 일자리는 돌봄과 일의 양립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글로벌 스탠다드와는 거리가 먼 퇴행적 제도일 뿐이다.

이에 맞서 골딘은 예측 가능하고 생애주기 욕구에 따라 노동시간을 단축하거나 근무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는 일자리가 더 생산적일 수 있도록 노동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돌봄과 경제의 명백한 상호 의존성과 돌봄의 필수적 가치를 인정하고 여성과 남성 모두 돌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동과 돌봄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말한다. 골딘의 제언대로 기업이 탐욕스러운 노동구조를 바꿔야 한다면 그 출발은 노동시간 단축과 불규칙한 근무 스케줄의 종식이다.

주 4일제의 획기적인 효과

그런 점에서 주 4일 근무제의 효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국내외 주 4일제 실험을 통해 노동자들의 스트레스와 번아웃 감소, 건강 개선, 일-생활 균형, 일과 돌봄의 양립, 가족과 보내는 시간 증가로 인한 삶의 질 개선 효과가 광범위하게 입증된 바 있다.

가깝게는 세브란스병원 사례가 있다. 이 병원은 노사 합의로 2023년 한 해 동안 주 4일제 시범사업을 시행한 결과, 실험 참여자들의 번아웃과 퇴사·이직 의도가 획기적으로 감소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존에 간호사는 항상 병원의 호출 대기 상태에 있어야 했고, 불규칙·장시간 노동, 잦은 야간근무를 감내해야 해서 일과 돌봄, 일과 생활의 갈등이 지속가능성의 임계점까지 밀렸다. 그러나 세브란스병원은 주 4일제 실험으로 노동과 노동시간을 새롭게 조직함으로써 여성 중심 직종인 간호사들의 노동시장 이탈을 방지하고 커리어와 가정을 조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탈탄소와 기후행동의 차원에서도 주 4일제의 효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 환경단체 플랫폼 런던은 영국이 주 4일제로 전환하면 202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을 연간 1억 2700만 톤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노동시간 단축의 환경영향을 고찰한 다수의 연구가 노동시간 단축이 온실가스 감축에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2021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노동시간이 1% 줄어들면 온실가스 배출이 0.8% 줄어든다는 사실을 검증한 2015년 스웨덴 연구와, 노동시간이 1% 늘어나면 온실가스 배출도 0.65~0.67% 증가하는 것을 입증한 2018년 미국 연구를 소개했다. 영국 <BBC>는 미국, 아일랜드, 영국에서 주 4일제 실험을 이끌었던 단체 포데이위크글로벌(4 Day Week Global)의 연구원 쇼어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오늘날 세계가 필요로 하는 탄소배출 감축의 핵심 수단이 주 4일제라고 보도했다. 쇼어는 인터뷰에서 노동시간이 10% 줄어들면 탄소 발자국도 8.6%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를 근거로 제시했다.

넷제로 경영을 그린워싱(가짜 친환경)이나 마케팅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 가치로 추구한다면 노동과 노동시간을 조직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태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 노동시간을 어떻게 재편하는 것이 탈탄소의 목표에 부합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출퇴근 일수를 줄이는 것이 전력 소비량과 출퇴근 자동차 운행거리를 모두 줄여 탄소 배출 감축에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라는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속가능한 미래는 탐욕스러운 노동시간 체제로부터 탈피하여 탈탄소, 돌봄과 평등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적 노동시간 단축 모델을 필요로 한다.
 

권혜원 / 동덕여대 경영학과 교수(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 권혜원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권혜원 동덕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셜 코리아>의 운영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관심 영역은 노동시장 이중화 해소, 노동권과 성평등의 의제를 통합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학계에서는 한국산업노동학회 부회장,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서울시와 성남시 생활임금위원장,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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