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포쉬 TODAY CAST

▲ 연극 포쉬 TODAY CAST ⓒ 안정인

 
1987년에 찍힌 사진이 있다. 배경은 고풍스러운 석조건물이다. 똑같은 옷을 입은 세 명 남자가 계단에 앉아 있고 일곱 명은 서 있다. 어색한 포즈와 어설픈 시선 처리는 단체 사진에 어울린다. 학교 졸업식이나 입학식 같은 곳에서 기념삼아 찍었을 법한 사진이다(현재 이 사진은 복사 및 출판이 금지되어 지면에 실을 수는 없지만 인터넷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이 유니폼 삼아 맞춘 옷은 3500파운드짜리 연미복이고, 한 학기에 한 번 있는 저녁식사에서는 엄청난 양의 술과 마약이 소비됐다. 그 결과 이들이 들른 가게는 냉장고와 테이블 같은 식당 집기뿐 아니라 벽지와 바닥까지 모조리 망가진 폐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사진이 좀 달리 보일 지도 모르겠다.

클럽 입회 신고식에서는 차마 글로 옮기기 더러운 성적 퍼포먼스가 벌어졌고 당연히 매춘부도 함께 자리했으며, 노숙인 앞에서 50파운드짜리 지폐를 태워 버리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면 인상이 찌푸려질 수도 있다.

이들의 역겹고 파괴적인 모임은 몇몇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다. 백지 수표를 가게 주인의 손에 쥐어 주며 입막음을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당신은 '세상은 넓고 별종들은 많으니 어쩔 수 없지' 라며 고개를 흔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진 속 인물이 전직 영국 수상인 데이비드 카메론(David Cameron)과 보리스 존스(Boris Johnson)이고 다른 인물들 역시 영국의 유명 컨설턴트 회사 대표이거나 방송 프로듀서, 신문사 사장이나 법률가 등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사진은 옥스퍼드 대학교에 실제로 존재했던 불링던 클럽(Bullingdon Club)의 회원들이 찍은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자라나 현재 영국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의 상층부가 되었다.

영국이 이랬다면 우리 사회는 좀 다를까? 아니, 잠깐. 이렇게 머릿속 아득해지는 질문을 하기 전에, 이들은 왜, 어떤 이유로 이런 모임을 만든 것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연극 <포쉬>(Posh)는 이들의 식사자리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연극 포쉬 커튼콜

▲ 연극 포쉬 커튼콜 ⓒ 안정인

 
무대는 시골의 한 식당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비밀 사교 조직인 '라이언 클럽' 멤버들이 이곳에서 모임을 열 예정이다. 굳이 이렇게 먼 식당까지 온 이유는 몇 년 전 친 사고 때문이다. 클럽 회원들은 학교 근처 가게에서 모임을 한 후 그곳을 테러 수준으로 망가뜨렸다. 언론의 추격이나 법적인 문제는 돈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학교 당국의 조치는 받아들여야 했다. 학교는 이들에게 학교 반경 25Km 안에서의 모임을 금지시켰다.

멤버들이 모이고 파티가 시작되지만 분위기는 의도치 않은 곳으로 흐른다. 와인은 주문한 것과 다른 것이 서빙되고, 음식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에스코트 전문인 찰리는 멤버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서비스가 아니라며 가게를 떠나 버린다. 술을 먹고 고함을 치는 이들에게 급기야 주인은 나가라는 요구를 한다.

가게 주인을 향하던 이들의 불만은 곧이어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계층에게로 향한다. 자신들의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나머지 계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분노를 표출한다. 이들은 점차 거칠어지고 원래도 별로 갖고 있지 않던 사회적 껍데기마저 벗어버린다. 서빙하기 위해 들어온 가게 주인의 딸 레이첼을 성추행하지만 이 정도로 풀릴 분노가 아니다. 말로만 끝나는 분노는 의미가 없다. 이들은 보기 싫은 것들을 향해 본보기를 날린다. 1987년의 불링턴 클럽 모임에서 있었을 법할 풍경이다.  

영국 극작가 로라 웨이드(Laura Wade)가 쓴 이 작품은 2010년 런던에서 초연되었고 이후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왜일까. 영국의 한 학교에서 발생한 일탈이 여러 나라 관객들에게 일종의 기시감을 주었기 때문 아닐까.

2015년 개봉한 영화 <베테랑>의 안하무인 캐릭터 조태오는 돈 많은 '재벌 3세'일 지언정 법을 만들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권력의 상층부는 아니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영화보다 더 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법조인 아버지를 둔 학교 폭력 가해 학생이 반성이나 불이익 없이 명문대에 진학하고 오히려 피해 학생들이 침묵해야 하는 사회가 연극 <포쉬>가 상연되고 있는 현재의 이곳이다. 정부 고위 관료를 지낸 아버지를 둔 누군가는 6년간 근무한 회사를 그만두며 퇴직금으로 50억을 받는 곳이 연극 <포쉬>가 상연되는 이 땅이다. 어떤 인성과 사회적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는지 지금보다 극명하게 보였던 적은 없었다.

 
연극 포쉬 시작 전 무대

▲ 연극 포쉬 시작 전 무대 ⓒ 안정인

 
불이 켜지면 긴 식탁이 놓인 무대가 보인다. 이곳에서 10명의 멤버는 모임을 갖고, 식당 주인은 서빙을 하며 에스코트 찰리는 도도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무대나 조명, 혹은 특수한 장치들로 변화를 줄 수 없으니 배우들이 감정과 분위기를 조절해야 한다. 그런데 10명의 라이언 클럽 친구들은 시종일관 시끄럽고 에너지 과잉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도 전에 지치는 기분이 든다. 중간중간 카트를 밀고 들어와 대사를 더하는 가게 주인 크리스만 진짜 학생들 사이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배우들의 연기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아직 공연 초반이라 그런 것이라고 관대 관대하게 넘기기로 했다. 라이언 클럽 멤버들이 하는 이런 말들을 나는 공연 내내 견뎠기 때문이다.

"우린 그들과 달라요. 우리는 포쉬니까."

그래, 좋다. 이렇게 된 이상 그들이 예의 바른 척 하기보다는 생각을 드러내 주는 편이 상대하기는 편하다. 편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기분은 썩 좋지 않지만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연극은 유쾌하거나 즐겁지 않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깨달음을 준다. 그것이 뭔지 혹시 알고 싶다면 극장을 찾길 바란다. 5월 21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공연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지안의 브런치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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