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1 11:07최종 업데이트 24.04.0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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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조금 모자라서, 상대의 맘을 헤아리지 못해서, 그렇지만 악의는 전혀 없는, 그런 ‘속없는 헛소리'엔 그냥 웃어주면 그만이다. ⓒ 김미래/달리

 
햇살 좋은 오후, 함께 산책에 나선 친구가 소시오패스가 주인공인 웹툰 이야기를 하다가는 뜬금없이 말했다. 

"아무래도 내겐 소시오패스 기질이 있나 봐."


남이 장난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바른말을 한답시고 친절하게 말을 하지도 못하는 자기가 꼭 웹툰에 나오는 주인공 같다는 게 이유였다. 너무도 엉뚱하단 생각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성격이 느긋하고 말수는 적은 편이지만, 그 친구는 그 누구보다 나를 많이 도와주고 있었고, 사려도 깊었다.

"네가 소시오패스면 개똥이 소똥이 세상 모두가 소시오패스겠다. 뭐, 말이 좀 느려서 답답하게 들릴 수는 있겠는데, 네가 못되게 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날 돕고자 한 말인데 기분이 나쁘다면

친구와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니, 나도 말이나 말투 때문에 맘이 불편했던 여러 기억이 떠올랐다. 시력을 잃고 난 후 나는 다른 감각 기관, 특히 청각에 많이 의존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말이나 말투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할 때가 많다. 내게 한 말도 아니고, 나와 상관없는 말인데도 예민하게 반응해서 괜히 신경을 곤두세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틀린 말도 아니고, 내게 해가 되는 말도 아닌데 그래서 내가 내게 한다면 참 좋은 말이기도 한데, 그걸 남에게서 듣게 되면 울컥하게 되는 그런 말, 요즘 나는 이런 말에 조금 예민하게 반응한다.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 죽겠는데, 위로한답시고 내뱉는 누군가의 한마디,

"너만 힘든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다 힘들고 어려워."

돈 좀 아껴보겠다고 고르고 고르다가, 싼 맛에 구입한 물건의 애매한 하자로 속이 터지는데, 바른말을 한답시고 내뱉은 한마디,

"남을 탓할 건 아니지. 네가 원해서 산 거잖아. 네가 좀 더 신중했어야지. 안 그래?"

내가 나에게 한 소리라면 이보다 좋은 격려요, 반성의 말도 없을 듯하다. 그리고 아주 가끔이겠지만, 꿈을 꾸듯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나름 도움이 될 듯하다. 

하지만 이걸 남에게서 들었을 때 격려요 응원으로 받아들일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더라도 십중팔구 속으로는 능력껏 욕을 한 바가지 내뱉었을 것이다. 듣는 이가 그런 걸 몰라서 그랬겠는가. 듣는 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위로와 공감이지 사실을 빙자한 그런 뻔한 소리일 리가 없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친구가 말했다.

"그건 그런데, 그렇게 말했더라도 무조건 화를 낼 건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좋은 의미로 충고를 한 건데, 듣는 이의 감정을 헤아리지는 못한 거지. 뭐, 생각 없이 한 말이랄까…."

친구 말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내 솔직한 마음 역시 토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백하자면 시력을 잃고 난 후에는 좀 더 자주 이런 말에 울컥했던 것 같다. 상대는 내게 상처를 줄 의도가 조금도 없이, 나름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뿐인데도 말이다. 

매일 앉는 우리 집 식탁이 아니라면 나는 식탁의 모양과 내가 앉은 자리 등을 손으로 더듬어 추측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오해한 한마디에 울컥할 때가 있다.

"에이, 기다려. 아직 음식이 다 나오지도 않았는데, 급하긴."

우연히 듣게 된 모르는 외국 가수의 노래가 좋을 때, 내 마음의 눈은 나름의 정보로 그 가수를 그려 본다. 그러다 문득 백인인지 흑인인지 애매한 궁금증을 풀어보려 한 내 질문에,

"노래만 좋으면 됐지, 그게 왜 궁금해? 그것도 일종의 인종차별이야. 흑인이면 어떻고 백인이면 어떤데?"

볼 수 없기에 나는 손으로 더듬어서 뭔가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맹점이 너무 많다. 그리고 거의 모든 걸 기억해야 하기에 헷갈릴 때도 많다. 분명 거기 있는데도 그날따라 이상하게 손이 그곳만 지나칠 때도 있고, 놓아둔 곳을 착각할 때도 있다. 그런 내게, 

"야, 신기하게 거기만 비껴가네. 거기, 거기 있잖아. 네가 둔 그곳에, 그걸 기억 못 해?"

볼 수는 없어도 눈 내린 겨울 산이나 눈모자를 잔뜩 눌러쓴 남한산성 소나무를 보러 가고 싶을 때도 있고, 모진 비바람에 마구 파도치는 바닷가에 가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 가고 싶은 나를 이런저런 이유로 말리면서 한다는 말이,

"굳이 지금 가야겠어? 볼 수도 없는데 가서 뭐 하려고?"

지금도 그때의 느낌이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감정을 못 이기고 발끈했던 내 모습에 화끈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하지만, 솔직히 맘속 한구석은 여전히 불편하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그들이 나를 놀리려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걸 잘 안다. 분명 나를 돕고자 한 것이었는데, 다만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이런 소리를 한 것뿐이란 것도 잘 안다. 

그래도 울컥 치솟는 불편한 감정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일단 나는 내 마음부터 달래기로 했다.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나는 재빨리 내 마음에 '속없는 헛소리일 뿐이야!'라고 말해준다. 그럼 불편한 마음이 누그러지고 한 발짝 물러서서 다시 들을 수 있다. 

약간은 모욕적인 방법 같지만, 나와 내 마음만이 아는 것이고 그들은 전혀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다가 이 방법은 꽤 쓸모 있다. 나를 울컥하게 만드는 소리고, 분위기까지 망치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그게 그들의 속마음이 아니란 걸 금방 깨닫게 한다. 웃고 넘길 것이지 화를 낼 게 아니란 것도 쉽게 알게 된다.

내 말을 들은 친구가 웃으며 물었다.

"속없는 헛소리라…! 그럼, 그런 속없는 헛소리 말고, 다른 의도가 있는, 그러니까 놀리려는 의도나 뭘 속이려는 것처럼 나쁜 생각을 가진 헛소리가 있다는 얘기네?"
"그럼, 있지, 있었어. 생각만 해도 여전히 화가 나네."

사실을 내세운 언어폭력

시력을 잃은 직후의 일이었다. 친구와 카페에 들어서다가 막 그곳을 나서려던 그의 전 직장 상사와 우연히 인사를 하게 됐다. 기업 인수합병 전문 투자자로서 '회장'이라 불리던 60대 중반 나이의 그 사람은 내가 이름을 분명히 밝혔음에도 헤어질 때 나를 '장님 친구'라 불렀다.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는지 그 사람은 장님이 소경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며 끝내 내 이름은 부르지 않은 채 웃으며 카페를 나갔다. 

장님이 사전상 높임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회장이란 사람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는데도 '장님 친구'라 부르며 웃기까지 했다. 이것은 분명 '속없는 헛소리'가 아니다. 알고서 하는, 나를 놀리려는 분명한 의도가 있는 '속 있는 헛소리'였다.

이런 '속 있는 헛소리'는 개인 간의 대화에서만 문제 되는 게 아니다. 최근 어떤 인물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일으키는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인, 학자, 법률가, 기자 등등 이른바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라는 사람들도 '사실 적시'라는 미명 아래 이런 '속 있는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1920년대, 일명 산미증식계획을 조선총독부가 단행하고 증산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간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수탈이라 하면 안 됩니다. 수탈이란 재물 따위를 빼앗는 것인데, 당시 일본은 매매를 통하여 쌀을 가져간 것이거든요."

몇 해 전에 일제 강점기가 우리나라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한 역사학 교수가 방송에 나와 한 말이다. 그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이 역사학자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사실을 왜곡해 듣는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었다.
  

신분이나 지식을 왜곡해 자기 주장을 펴는 것은, 어쩌면 가장 큰 해악인 ‘속 있는 헛소리’인지 모른다. 반드시 따져야 한다. ⓒ 김미래/달리


당시 방송에서 그 교수는 이런 말을 하면서도 일제가 행한 토지조사사업으로 많은 땅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에게 헐값으로 넘어갔고, 조선인 지주를 회유·협박해서 친일 세력으로 만든 사실은 외면했다. 그리고 산미증식계획으로 늘어난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감으로써 대다수 소작인 신분이었던 우리 농민들이 유례없는 굶주림에 시달렸던 사실도 무시했다. 

만약 이 사실들까지 언급했다면 과연 그것을 수탈이 아닌 매매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굶주림을 면하기도 어려운데, 그 목숨과 같은 쌀을 제값도 아닌 헐값에 강제로 사 갔다면, 그건 수탈일까 매매일까?

사실이라고 모두 진실도 아니고 옳은 것은 더욱더 아니다. 필요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데 굳이 상대방의 약점을 언급하는 것은 언어 폭력이지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다. 1건이 겨우 2건으로 늘어난 것을 오로지 비판을 위해 '두 배로 증가'했다거나 '100퍼센트 증가'했다고 하는 건 사실일지 몰라도 왜곡된 보도다. 조직의 이름으로 행해진 잘못인데도 책임자가 직접 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범죄일 수 있다. 

나도 종종 알 수 없는 내 속인데 남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속없는 헛소리'는 당연히 그럴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웃어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속 있는 헛소리'는 전혀 다른 문제다. 따져야 하고 때론 화도 내야 한다. 그냥 웃어넘겼다가는 자칫 내가 바보가 되고, 내 맘이 상하고, 소중한 사람까지 커다란 불행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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