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11 11:27최종 업데이트 24.09.1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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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유성호


극우 뉴라이트의 선봉에 선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제주 4·3이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한 의거였다고 말하기 곤란하다. 배후에 북한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4·3은 뉴라이트가 분단과 냉전을 합리화하는 이념적 도구다. 그래서 그는 뉴라이트의 공식 이념과 상충하는 주장을 하기 힘들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 직전의 청년 김영호는 그런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운동권 전사였다. 28세 때인 1987년 3월, 그는 4·3이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제주도민들의 자발적 궐기였다는 점을 세상에 공표했다. 6월항쟁이 발생한 그해의 핵심 공안사건 중 하나인 '한라산 필화 사건'은 그가 자신이 아는 4·3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다.

진실화해위원회가 10일 배포한 보도자료는 37년 전의 그 사건을 상기시킨다. 위원회가 지난 6일 결정해 이날 언론에 알린 결정 사항은 청년 김영호가 운영하는 녹두출판사를 통해 '한라산'을 발표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화를 입은 이산하 시인에 관한 것이다.

위원회는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고무찬양 혐의로 구속된 뒤 뺨 때리기, 방망이로 때리기, 잠 안 재우기, 물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당하다가 징역 1년 6개월에 자격정지 1년을 받은 진실규명대상자 이산하에 관해 이렇게 결정했다.

"조사 결과, 진실규명대상자가 1987년 11월 10일 서울중부경찰서 수사관들에 의해 검거된 후 구속영장이 발부, 집행될 당시 긴급구속 절차가 적법하게 진행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서울시경 공안수사단 수사 과정에서 진실규명대상자가 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한 정황을 확인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에 불법구금·가혹행위 등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발생한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해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재심 등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권고한다."

4·3에 관한 시를 쓰는 것도 위험하지만, 이를 활자화하는 것도 위험한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청년 김영호는 자신이 발행하는 <녹두서평>에 '한라산'을 실었다가 이산하 시인보다 훨씬 빠른 1987년 4월에 구속돼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집행유예가 붙기는 했지만, 출판사 사장이 저자보다 더 많은 형량을 받았던 것이다.

김영호는 집행유예 기간 중인 1990년 1월 미국 유학을 떠났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인물이 미국 유학을 떠나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에 대해 김영호는 2023년 7월 21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사면을 받고 갔다"고 주장했다. 보스턴대학과 버지니아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석·박사 과정을 마친 그는 귀국해 극우 활동에 뛰어들었다.

'한라산'은 외친다

지난 6일 진실화해위원회 제86차 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한 '국가보안법 위반 불법구금 등 인권침해 사건' 보도자료 ⓒ 진실화해위원회


'한라산' 발표는 20대 후반인 이산하 시인과 청년 김영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과 관련된 국가폭력 혹은 국가범죄에 대해 국가가 사과해야 한다는 결정이 이번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나온 것이다.

이산하와 김영호의 사실상 합작으로 1987년 공안정국의 핵심 이슈가 된 '한라산'은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조목조목 기록된 기다란 병풍을 머릿속에 넣어줄 만한 작품이다. 이 시의 서시는 4·3에 대한 시인의 전체적 느낌을 보여준다. 당시의 시대적 과제를 위해 스스로 몸을 내던진 제주도민들의 아픔과 통곡에 대한 시인의 공감이 표시된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 백두산에서 / 한라산에서 / 지리산에서 / 무등산에서 / 그리고 피어린 한반도의 산하 곳곳에서 /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싸우다 / 장렬히 산화한 모든 혁명전사들에게."

혓바닥을 깨물지 않고는 들을 수 없는 4·3의 진실, 발가락이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게 뛰쳐나가게 만드는 4·3의 진실이 시인의 가슴을 격동시켰음을 느낄 수 있다.

오늘날 김영호 장관과 같은 편인 극우 뉴라이트들은 4·3을 공산주의국가 건설을 위한 폭동으로 매도한다. '한라산'은 그것이 허무맹랑한 주장이라고 단언한다. 남북의 분단을 막기 위한 궐기였다고 '한라산'은 외친다. 이 시 제1장 제5절 대참화 편은 4·3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한다.

"1948년 4월 3일 / 미군정의 분단획책을 분쇄하고 조국의 통일을 외치며/ 제주도 인민들은 일제히 봉기했다."

"제주 4·3 폭동"(1987년 12월 4일 <동아일보>)이나 "제주도 난동"(1986년 10월 6일 <경향신문>) 같은 표현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던 시절이었다. 폄하적 표현들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던 시절에, 4·3은 분단을 막고 통일을 이루기 위한 의거이자 혁명이라는 시가 활자화돼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뉴라이트로 전향한 사람들이 4·3 매도

"문단에서는 이 작품이 맹목적 반공주의의 편견을 딛고 역사의 매장된 부분을 밝혀냈으며 문학성과의 조화도 높은 수준에서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는 평을 소개해 보도의 공정성을 기한 1988년 4월 5일 자 <매일경제>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한라산'은 역사가 '제주 4·3무장폭동'으로 부르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를 무산시키려고 한 남로당의 무장투쟁'으로 규정하는 48년의 4·3사건을 재외학자·증인들의 기록에 입각해 시화한 작품이다."

공정성을 유지하고자 애쓴 이 기사에서도 "역사가 제주 4·3무장폭동으로 부른다"는 표현이 사용됐다. 지금은 사용될 수 없는 이런 표현이 쓰인 것은 4·3을 폄하하는 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던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런 시절에 4·3을 의로운 봉기로 묘사하는 시를 발표하고 발간했으니, 두 20대 청년 모두 대단했다고 평할 수 있다.

이 시는 지금의 뉴라이트들이 4·3을 폄훼하고자 내놓는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일례로, 뉴라이트는 4·3이 북한 같은 외부세력의 조종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라산'은 "독립하자마자 다시 또 독립해야 하는 어이없는 해방정국 / 그 새로운 압제의 사슬을 끊는 제주도의 인민항쟁은 / 자연발생적 저항"이라고 답을 해주었다.

언론에 공개된 1988년 3월 21일 자 서울형사지방법원 공판조서에 따르면, "'한라산'에는 대체로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요?"라는 공안검사 황교안의 질문에 대해 피고 김영호는 "제주도 4·3사건은 우리 민족사에서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라며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된 민족적 슬픔이라고 답변했다.

자기 출판사에서 펴낸 작품의 내용도 알고 있으며 4·3의 내용도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 대답은 출판사 사장인 그가 저자의 글에 공감한 상태에서 글을 실어줬음을 알려준다. 그런 위험한 시대에 이 시를 출간했다는 것은 그가 판매를 위해서보다는 진실을 알릴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아는 내용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뉴라이트 진영에 포진한 전직 운동권 출신들도 과거에는 청년 김영호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뉴라이트들이 뜻을 꺾고 전향하던 시기는 4·3의 진실이 점점 더 많이 알려지던 때였다. 이 시기에 점점 더 입증된 것은 4·3이 공산폭동이었다는 점이 아니라 4·3이 분단을 막기 위한 의거였으며 이로 인해 무수한 양민이 학살을 당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4·3의 진실이 점점 더 많이 알려지던 시기에 뉴라이트로 전향한 사람들이 4·3을 공산폭동으로 매도하고 있다. 그들의 전향을 전후한 시점에 4·3이 공산폭동이었음을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하나같이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그들의 양심과 신념 때문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새로운 진영에서 기반을 잡기 위한 생계의 방편이라고밖에 이해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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