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3 13:48최종 업데이트 23.05.23 13:48
  • 본문듣기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그린피스 활동가들이 지난 4월 26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비판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 그린피스

 
불확실성 속에서는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합리적인가?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합의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정의로운가? 경제·경영 혹은 사회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질문이다. 지금처럼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글로벌 사회의 혼란기에는 국가 간의 관계에서 사사건건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 같다. 과연 대한민국의 결정은 국민의 합리적 판단을 대변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이 참여하는 국가 간 합의는 국민의 눈높이에서 정의로운가?

불확실성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일정한 확률로 예측할 수 있는 불확실성과 확률조차 정해지지 않은 더 '깊은' 불확실성이 그것이다.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의 관심은 전자에 집중됐다. 수익 혹은 효용의 기댓값이 기준이 되는 합리적 의사결정에 관한 이론, 기대효용이론은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합리적 의사결정을 다루는 경제경영 분야에서 폭넓게 사용된다.


예상 수익이 없는 위험한 투자는 피하지만 예상 수익이 충분히 크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하는 것이 위험 기피적인 합리적 투자의 원리다. 그러나 예상 수익을 도출할 근거인 확률(분포)이 없다면 어떨까? 수익이 커도 그 확률이 정해지지 않는 깜깜이 투자라면 손실을 우려해 기피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깊은 불확실성 속에서 내려지는 의사결정은 최악의 결과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확률적 판단에 기초한 기대효용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확률 계산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그것이 합리적 경제인의 특성이라는 것이 많은 실험과 자료로 드러났다. 이런 태도는 현재 '불확실성 기피성(uncertainty aversion)'에 대한 경제이론으로 발전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존 하사니 교수가 1970년대 존 롤스 교수와 논쟁할 때 납득할 수 없던 부분도 바로 그것이다. 롤스가 제시한 정의의 원칙은 극단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휘둘리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판단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하사니 교수 비판의 핵심이다.

뉴욕에 있는 회사로 옮기면 지금보다 몇 배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이동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비행기 사고 우려 때문에 직장을 옮기지 못한다면 얼마나 비합리적으로 보이겠는가? 그런데 어떤 사고가 있을지 예견할 수도 없고 그 사고의 확률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비행기 사고 확률이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이유로 높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뉴욕으로 직장을 옮기지 못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신념은 하사니가 제시한 사례에서는 미신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복잡한 사회의 다양한 사회 구성원과 그 미래세대의 삶의 질, 복지를 좌우할 사회 정의의 중대한 계약이 맺어지는 상황에서는 다르다. 정의로운 사회계약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롤스 교수가 강조했던 것은 내가 이 사회에서 직면하게 될 사태 그리고 내가 처하게 될 직업, 직위, 계층 등 사회적 위치에 대한 깊은 불확실성, 이른바 두꺼운 '무지의 장막'이다.

한국이 일본 정부 대변하나? 
 

도쿄전력 관계자들이 지난 2일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외신 기자들에게 오염수 저장탱크를 설명하고 있다. 2023.2.6 ⓒ 연합뉴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관련해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문제다. 원전 사고와 오염 문제가 이웃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미래세대와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는 사태로 전개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당사국에 부여되기 때문이다.

원자력 안전 문제야말로 그 불확실성이 초래할 위기의 양태와 확률을 가늠하기 어려운 '깊은' 불확실성의 문제다. 섣부른 확률적 판단으로 성급한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투명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이 논란에서 지금 한국 정부가 취하는 입장은 기괴하다. 일본 정부의 자국 중심주의가 한국 정부의 입장으로 보일 정도여서 경악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시찰단'의 역할과 활동에 대한 양국 정부 실무자들의 협의가 끝나기도 전에 한덕수 총리는 시찰단의 역할을 스스로 축소하고 민간 전문가의 참여도 배제하겠다는 취지의 말을 기자들에게 했다.

국회의원들도 기괴한 정부의 입장을 두둔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은 지난 이명박 정부 때의 광우병 사태를 상기시키며, 당시 반정부 시위가 광우병 '괴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비판적인 사회여론을 괴담으로 몰아가는 지극히 저열한 논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괴담'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전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허위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다. 그런데 그게 과연 허위 사실이고 공포를 조장하는 잘못된 선동이었을까?

당시 광우병의 피해는 확률이 지극히 낮아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불확실성이 아니라, 그 확률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깊은 불확실성이었다. 북미와 서유럽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처럼 깊은 불확실성을 기피하려는 시민들의 불안과 공포가 확산됐고, 가축 복지와 동물 사육 윤리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소 사육과 소고기 유통의 전 과정에서 광우병의 피해를 막는 새로운 법과 규제를 도입했다.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한 한국 정부 역시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줄이는 방향의 규제를 도입했다. 괴담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기피하려는 시민들의 의지가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 낸 역사적 진보, 윤리적 진보의 순간이었다.

지금 원자력 안전에 대한 글로벌 거버넌스는 매우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처럼 안이한 방식과 불투명한 절차로, G7이 방패가 되어 서방 선진국 중심주의의 무책임이 정당화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원자력 안전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적절한 권한과 의사결정 구조를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크다. 작년 11월 IAEA 관계자들이 인정했던 것처럼, 설사 오염수 방류가 국제 안전기준을 지키지 않더라도 방류를 할지 말지의 결정은 일본 정부에 맡겨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G7 정상회의 참관국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히로시마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 앞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오염수 방류의 직접적 피해 당사자로 이루어진 태평양도서국(島嶼國)포럼(PIF)은 현재 일본 정부가 과학적 판단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자료의 신뢰성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최근 <타임>은 "오염수 방류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자료가 없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과학적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 할 데이터가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데이터 수집에 장기간의 공백이 발견됐다" 등 이 포럼에 참여하는 학자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을 전하기도 했다.

국제 환경단체 그린피스도 통계자료의 문제, 오염수 처리 시스템의 부실, 일본 정부가 무시하고 있는 주요 오염물질 정보, 일본 외교부가 저장 오염수에 대하여 부정확한 사실을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들에게 전달했던 점 등을 지적하며 다른 대안을 모색하지 않고 오염을 퍼뜨리는 일본의 무책임한 방류 결정을 비판하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 역사가 남긴 교훈은 국제기구와 글로벌 사회가 돈의 힘을 대변할수록 인류의 지속가능성은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오존층 파괴, 지구 온난화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1달러 1표'가 아니라 '1인 1표'의 권리를 존중하는 글로벌 사회의 민주적 의사결정뿐이라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이번 사건이 원자력 안전에 대한 투명하고 민주적인 글로벌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기후위기의 도전이 에너지 전환의 기회가 아니라 원자력 발전의 확대로 이어진다면 위험을 위험으로 막는 잘못된 길이 열리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문제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주병기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소셜 코리아 편집·운영위원) ⓒ 주병기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소셜 코리아>의 편집·운영위원과 서울대 경제연구소 분배정의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미 캔자스대와 고려대 경제학과에서 재직했으며 한국응용경제학회장, < Journal of Institutional and Theoretical Economics > 편집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시경제학, 재정학, 정치경제 등이고 분배적 정의, 불평등과 소득분배, 공정한 경제기제 등의 주제로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분배적 정의와 한국사회의 통합>, <정의로운 전환>, <정책의 시간>, <혁신의 시작> 등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