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02 10:12최종 업데이트 23.09.0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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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발 수도원은 예전의 폐허를 보여주고 있다. ⓒ 윤한샘

 
*1편 <폐허에서 피어난 맥주의 비밀... 돌 색깔이 심상치 않다>에서 이어집니다

유럽의 많은 수도원들이 프랑스혁명 시기에 파괴됐다. 왕과 성직자의 권력을 허무는 과정에서 수도원은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왕의 목은 단두대로 보내졌고, 성직자들의 목은 교회와 수도원 재산 몰수와 함께 잘려졌다. 유럽 중세를 지탱해 온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혁명으로 희석됐다. 교회와 수도원 파괴가 민중의 저항 없이 진행되었다는 건, 그들이 지지를 받지 못했던 기득권 세력이었음을 의미했다. 권력을 위해 복속하는 종교는 존속하기 힘들다고 역사는 가르치고 있었다.   

화재와 전쟁으로 검게 그을린 옛 오르발 수도원 터는 쓸쓸함 대신 상상력을 자극했다. 담장의 경계를 따라 예전 모습을 떠올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우거진 풀들로 가득한 공간들이 한때 어떠했을지 눈으로 그려봤다. 잘려 나간 거대한 기둥은 두꺼운 발목만 남았고 벽체의 돌들은 검은색 화상을 입고 있었지만, 기둥과 벽 그리고 사라진 지붕을 연결하니 화려했던 과거 수도원의 영화(榮華)가 눈앞에 선했다. 
 

비츨라프 1세가 잠들어 있는 석관. 물론 모형이다. ⓒ 윤한샘

 

옛 수도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 윤한샘

 
텅 빈 창틀에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겠지. 회랑 끝에는 거대한 십자가가 있었을 거야. 상념에 젖은 채 주위를 둘러보던 중, 한쪽 끝에 있는 거대한 석관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의 관이기에 폐허의 한가운데 있는 것일까? 관 뚜껑에는 'Wenceslas(1337~1383)'이라는 표기와 QR코드가 있었다. 이럴 때는 디지털 이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스마트 폰으로 큐알 코드를 비춰보니 바츨라프 1세라는 이름이 떴다. 룩셈부르크 공국 최초의 공작이었다.

귀국 후 정보를 더 찾아보니, 이 남자는 보헤미아 프라하를 황금기로 이끌었던 카를 4세의 이복동생이었다. 1354년 룩셈부르크가 백국에서 공국으로 격상되며 최초의 공작이 된 그는 이곳 오르발에 영면하고 있었다. 물론 대중에게 공개된 이 관은 모형으로 진짜는 지하에 안치되어 있다. 
 

지하에는 예전에 사용했던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 윤한샘

 

화려한 옛 수도원 유믈들. ⓒ 윤한샘

 
폐허 곳곳에는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은 박물관이었다. 단순히 옛 흔적을 남겨둔 공간이 아니었다. 장식 조각과 부조, 성상을 비롯해 다양한 유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폐허 구석구석을 밟는 여정은 조금씩 지하 공간으로 이어졌다. 내가 가본 모든 성당의 지하는 무덤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오르발 수도원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밝고 화사한 빛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폐허의 지하는 현대식으로 리모델링된 전시관이었다. 밝은 복도에서는 과거 사용했던 물품들을 볼 수 있었다. 성배, 십자가, 성경책, 약제 서적, 금 쟁반 그리고 성인의 그림들은 과거 화려했던 오르발 수도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화려한 유물들을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 프랑스혁명 정부와 나폴레옹이 수도원 재산을 몰수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수도원의 검은 상흔은 세상을 바꾸고자 한 민중의 염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 수도원을 재건하다
 

폐허 상태로 남아있는 옛 오르발의 모습. ⓒ 윤한샘


불탄 건물과 잡초만 무성하던 땅에 다시 역사를 흐르게 한 주인공은 드 하렌네 가문이었다. 1926년 이들은 폐허가 오르발 수도원을 매입해서 트라피스트회에 기부했다. 수도원 재건이라는 중책을 맡은 인물은 수도사인 마리 알베르트 반 데르 크루이센이었다. 그는 10년간 오르발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헌신했다. 마침내 1936년 오르발은 사라졌던 수도원의 지위를 되찾았고 1948년 9월 8일 봉헌을 통해 부활을 알렸다.   

맥주 양조장은 1931년 재건 자금 마련을 위해 설립됐다. 오르발 수도원은 새로운 맥주를 만들기 위해 수도사가 아닌 민간인 양조사를 처음부터 고용했다. 중책을 맡은 인물은 독일 출신 브루마스터, 마르틴 파핀하이머와 두 명의 벨기에 양조사 오노레 반 잔데, 존 반후에레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트라피스트 맥주와 차별된 DNA를 오르발 맥주에 이식했다.


오르발 맥주는 독특하다. 드라이 호핑 된 영국 페일 에일과 벨기에 전통 양조 방식이 하이브리드 되어 있다. 벨기에 맥주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맥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드라이 호핑이란 발효가 끝난 맥주에 홉을 추가적으로 넣어 향을 입히는 방법으로 18세기 영국에서 시작한 양조 공법이다. 

오르발에는 독일 할러타우, 슬로베니아 스티리안 골딩스, 프랑스 스트리세슈팔츠 홉이 3주 동안 드라이 호핑 된다. 이 아이디어는 영국 유학파였던 존 반후에레에서 나왔다. 그는 묵직한 알코올 도수와 효모 향이 도드라지는 벨기에 맥주에서 벗어나 홉 향을 강조한 맥주를 추구했다.  

흥미로운 건, 바로 다음 과정이다. 오르발은 병에서 2차 발효를 진행한다. 이때 사용하는 효모가 특이하다. 주인공은 야생 효모인 브레타노마이세스(Brettanomyces)다. 브렛 효모라고도 불리는 이 미생물은 인간에게 길들지 않은 효모다. 보통 맥주에서 이 녀석이 뿜는 향이 감지되면 오염된 것으로 간주한다. 외양간, 말안장으로 표현되는 이 향은 극단적인 정향 또는 페놀 향에 가깝다. 람빅 같은 특별한 맥주를 제외하고 모두 이취로 여겨진다. 

오르발의 양조사는 드라이 호핑이 끝난 맥주를 병에 담고 브렛 효모를 넣어 추가적인 발효를 이끌어 낸다. 브렛 효모는 병 속의 당을 먹고 이산화탄소와 알코올을 맥주에 더한다. 브렛 특유의 쿰쿰한 향도 더불어 입혀진다. 이후 맥주는 양조장에서 섭씨 15도로 최소 3주 동안 숙성된다. 그리고 다시 펍에서 6개월 정도 추가 숙성을 거친 뒤 판매된다. 그 결과 오르발 맥주는 시간에 따라 향과 알코올 도수가 달라지는 특징을 갖게 된다. 이 부분이 바로 다른 트라피스트 맥주와 다른 매력이다. 

솔직히 브렛을 2차 발효용 효모로 넣는다는 것은 대단히 혁신적이고 놀라운 발상이다. 브레타노마이세스(Brettanomyces)에서 브렛(Brett)은 영국을 의미하는 브리튼(Britain)에서 가져왔다. 사실 이 미생물은 오랫동안 영국 에일을 오염시켰던 골칫덩이였다. 학자들은 이 녀석의 정체를 밝혀낸 후, 학명에 영국 이름을 헌정했다. 그런 브렛 효모를 영국 에일에 고의로 사용하다니, 이건 상식을 파괴하고 사고를 전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00여 년 전에 현대 크래프트 맥주에서나 할 법한 시도를 했던 것이다. 

전통적이고 고답적일 수 있는 수도원 맥주에 창조적 파괴를 꾀한 매력은 오르발 맥주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여러 병의 오르발을 구매해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향미를 즐긴다. 매년 오르발은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공식적인 상미 기한이 5년인 이유다. 

인생을 담고 있는 맥주
 

오르발 맥주와 치즈들. 왼쪽부터 베르, 영, 올드 오르발이다. ⓒ 윤한샘

 
오르발 맥주는 수도원 기념품 매장에서 6병 들이 박스로 살 수 있다. 한 박스를 사면 6년 동안 매년 달라지는 오르발의 모습을 맛볼 수 있다는 의미다. 수도원에서 바로 출시된 맥주로 수직 테이스팅(vertical tasting)을 할 수 있으니 구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오르발 수도원에 오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오르발 베르(Orval Vert)를 마시기 위해서다. 

수도원 입구에 있는 직영 레스토랑에서는 3종류의 오르발을 만날 수 있다. 이중 오르발 베르(Orval Vert) 또는 수호천사(Ange Gardien)라고 불리는 녀석은 여기서만 맛볼 수 있다. 오르발 베르는 숙성이 이제 막 시작된 맥주다. 생맥주로만 서빙되며 4.5%의 알코올 갖고 있다.

다른 두 맥주는 영 오르발(Young Orval)과 올드 오르발(Old Orval)이다. 6.2% 알코올을 가진 영 오르발은 병 속에서 6개월 정도 숙성된 맥주다. 조금 더 높은 알코올을 가진 올드 오르발은 최소 1년 이상 병 속에서 숙성된 맥주를 의미한다. 올드 오르발의 7.2%가 오르발의 마지막 알코올 도수다. 하지만 변화는 계속된다. 추가 발효는 여기서 멈추지만 브렛 효모는 시간이 지날수록 다채로운 향을 만들어 낸다. 

레스토랑에서는 3종류 맥주 외에 숙성도가 다른 3종류의 치즈도 함께 먹을 수 있다. 더구나 맥주 150ml에 치즈를 더한 세트가 8.9유로에 불과하니, 이보다 좋은 대안은 없다. 주문을 마치자, 곧 나무 플레이트에 정갈하게 세팅된 맥주와 치즈가 나왔다. 3종류의 오르발은 색깔부터 차이가 났다. 숙성이 되지 않은 오르발 베르는 가장 밝은색을 띠었다. 그리고 숙성도에 따라 색은 점점 짙어졌다. 투명도는 반대였다. 숙성이 될수록 투명했다. 

맥주는 어린순으로 음미해야 한다. 먼저 오르발 베르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신선하지만 뭉툭했고 단순하지만 우아했다. 브렛 효모의 향은 도드라지지 않았다. 옅은 단맛과 홉의 허브 향이 슬며시 느껴졌다. 태초의 오르발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듯했다. 

영 오르발은 막 피어난 꽃이었다. 6.2% 알코올은 슬며시 브렛 효모 향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쿰쿰한 향이 확연했다. 산미도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반면 홉은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오르발 베르에 비해 전체적으로 조금 더 가벼웠고 날카로웠다.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활발하고 생생한 모습이 청춘 그 자체였다.  

올드 오르발은 연륜이 묻어났다. 7.2% 알코올은 브렛 효모 향과 조화를 이루며 한 몸이 됐다. 제일 가벼웠지만 가장 마시기 편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며 향미는 점점 원숙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밋밋한 느낌은 없다. 산미는 섬세했고 복합성과 밸런스는 뚜렷했다. 흐릿했던 결들이 명징해지며 오르발 맥주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멋있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서서히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맥주, 오르발은 인생을 담고 있었다. 어느덧 향미를 분석하려는 애초의 목적은 사라지고 창밖으로 보이는 수도원의 실루엣을 배경으로 단지, 맥주 그 자체를 즐기는 나를 발견했다. 1000년 전 마틸다가 이곳에서 황금 계곡을 외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진정한 마음이 통하는 황금의 계곡, 지금 나에게 황금은 이 순간을 즐기라고 가르치고 있는 오르발이 아닐까. Bibere et Carpe Diem (마셔라, 그리고 순간을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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