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5 13:40최종 업데이트 23.09.1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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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뢰번의 거리 ⓒ 윤한샘

 
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수수한 붉은 색 벽돌 건물들 1층에는 작은 아시아 마켓과 아담한 이발소가 보였다. 자동차도 작고 오래된 것들이 눈에 자주 띄었다. 분주함 대신 한가로움이 담긴 풍경은 이곳이 유럽 대학 도시라는 걸 넌지시 알려줬다. 

오래된 유럽 대학 도시는 대학 그 자체가 도시가 된 경우가 많다. 지금(7월 3일) 걷고 있는 뢰번도 유럽 최고 대학 중 하나인 뢰번 대학이 도시의 심장이다. 네덜란드어로 뢰번(Leuven), 프랑스어로 루뱅(Louvain)은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대학 도시다. 플람스브라반트 주의 주도이며 스텔라 아르투아의 고향이다. 

1425년 최초로 대학이 설립된 이래, 뢰번은 유럽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도시였다. 에라스뮈스는 이곳에서 유토피아를 썼고, 유수의 천문학자들이 활약했다. 물론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스텔라 아르투아(Stella Artois)를 한 잔 마시기 위함이었다. 세계 최고의 맥주 양조학과가 있는 뢰번 대학을 조금이나마 보고 싶은 목적도 있었다.   
 

뢰번 대학의 건물 ⓒ 윤한샘

 
뢰번 가톨릭 대학교(Katholieke Universiteit Leuven, KU Leuven)가 정식 명칭인 뢰번 대학은 흥미로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34년 설립된 이 대학은 다른 벨기에 대학과 달리 프랑스어 수업만 하고 있었다. 무려 100년이 흐른 1930년이 돼서야 네덜란드어 강의가 제공됐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던 갈등이 드러난 건 1962년이었다. 대학 내 부서가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로 각각 자치권을 갖게 되면서 분리 독립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강경 플랑드르(네덜란드어권) 분리 독립자들은 대학의 분할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점점 학생과 교수 간 반목도 심해지자 결국 1968년 대학은 분리라는 초유의 선택을 하게 된다. 


하나였던 뢰번 대학은 플랑드르와 왈로니아(프랑스어권) 지역으로 갈라졌다. 프랑스어권 뢰번 대학이 정착한 곳은 루뱅라뇌브(Louvain-la-Neuve)였다. '새로운 루뱅'이라는 뜻을 가진 루뱅라뇌브는 브뤼셀에서 남쪽으로 불과 30km 떨어져있다. 언어 때문에 대학이 반으로 갈리다니, 생소해도 너무 생소했다. 아니다. 어쩌면 이들 입장에서는 분단국가에서 온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더 우스울 수 있으려나.

현재 두 대학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남과 북처럼 서로 죽일 듯 으르렁대며 다투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지금은 서로 학문을 교류하며 멋진 파트너로서 벨기에 최고 대학의 위상을 이어가고 있다. 작은 나라 벨기에를 강한 국가로 만든 소통과 관용이라는 가치를 우리는 언제쯤 누리고 살 수 있을까?

뢰번의 역사를 품은 구시가지
 

화려한 뢰번의 구 시청사 ⓒ 윤한샘


뢰번의 구시가지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방학 중이라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오래된 도시답게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벽돌로 된 플랑드르 스타일 건물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낯선 돌로 된 바닥은 평평한 보도블록에 익숙한 우리에게 생경한 즐거움이다. 아기자기한 골목을 보며 걷고 있는 와중, 갑자기 멀리서 땅땅 종소리가 들렸다. 구시가지 중심에 거의 다 온 듯했다.    

가톨릭 문화가 배어있는 유럽 도시 중심에는 성당과 시청 그리고 광장이 있다. 중세 시대 성당에서 퍼지는 종소리는 안전을 담보하는 증표였다.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은 공동체의 울타리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종소리 너머 있는 깜깜한 숲은 괴물과 도적이 사는 죽음의 공간이었다.

종소리를 따라가던 중, 도시를 가르는 작은 강이 보였다. 아니, 개천인가? 강이라기에는 좁고 개천이라기에는 깊었다. 맥주 양조장이 있는 도시는 대부분 물을 품고 있다. 한때 수십 개의 양조장이 즐비했던 뢰번 또한 깊은 물줄기를 갖고 있었다. 옆으로는 붉은색 벽돌집들이 수변도 없이 물에 맞닿아 있었다. 큰비가 오면 괜찮을지 괜한 기우가 들었다.  
 

뢰번을 흐르고 있는 강 ⓒ 윤한샘

 
좁았던 길이 점점 넓어지면서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웅장한 성 베드로 성당과 화려한 구시청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986년에 건설된 성 베드로 성당은 12세기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425년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종소리가 나는 곳을 올려다보니, 온몸에 황금 칠을 한 기사가 열심히 종을 치고 있었다. 원래 거대한 세 개의 탑을 세울 계획이었으나 불안정한 지반으로 완성되지 못했다고 한다. 왜 종소리가 땅땅 울리는지 그제야 이해했다. 종탑이 없는 성당을 위해 봉사하는 애틋한 황금 기사에 연민이 갔다. 힘내시라. 

성 베드로 성당을 마주보고 있는 구 시청사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15세기 완성된 시청 건물은 19세기에 236개 조각이 더해지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시청을 감싸고 있는 세밀한 조각상에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데 잠시 뒤, 뭔가 어색함을 느꼈다. 위압감이었다. 홀로 우뚝 서 있는 시청이 고담한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로 솟은 시청 귀퉁이가 거만해 보였다. 
 

뢰번 성 베드로 성당. 약한 지반으로 첨탑을 못 지었다. ⓒ 윤한샘

 
약한 지반으로 높은 지붕을 허락하지 않은 성 베드로 성당과 달리 시청에는 바벨탑을 허락한 이유가 궁금했다. 놀라운 점은 세계 대전 폭격으로 성당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시청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뢰번의 신은 자신보다 인간의 보금자리가 더 중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스텔라 아르투아의 고향

우리는 대학 캠퍼스가 고립된 성처럼 존재하지만 유럽은 마을과 대학이 구분됨 없이 하나인 경우가 많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처럼 뢰번도 길가에 있는 건물들이 모두 캠퍼스였다. 뢰번 대학은 맥주 양조학과로도 유명하다. 석사 학위 과정으로 운영되며 맥아, 효모 같은 원재료부터 양조, 향미, 패키징, 맥주 사업 전략까지 전문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대학 부속으로 있는 뢰번 맥주 연구소(Institute for Beer Research)는 양조와 관련된 효소, 미생물, 홉 등에서 최고 수준의 연구를 자랑한다. 훨씬 더 젊은 나이에 뢰번을 왔다면 아마 캠퍼스 문을 두드리고 있었을 것이다. 

빡빡한 스케줄로 아쉽게 스텔라 아르투아 양조장을 방문하지 못했지만 구 시청사와 성 베드로 성당 그리고 뢰번 대학을 배경으로 스텔라 아르투아를 마시고 싶었다. 아직 오전이었지만 광장에 있는 테라스에서는 기꺼이 맥주를 판매했다. 테라스에 있던 직원은 벌써 우리의 의도를 알고 있었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스텔라 아르투아를 마시러 왔냐고 물은 뒤, 지체 없이 성배에 든 황금색 액체를 들고나왔다. 
 

성 베드로 성당과 뢰번 구 시청사를 바라보고 마신 스텔라 아르투아 ⓒ 윤한샘

 
스텔라 아르투아는 1926년에 아르투아 양조장에서 태어났다. 1366년 이 도시에서 사냥용 뿔피리를 달고 맥주를 팔던 댄 호른 양조장이 아르투아의 기원이다. 실질적인 출발은 세바스찬 아르투아가 댄 호른을 인수하고 아르투아 브루어리로 이름을 바꾼 1717년이다. 작은 지역 양조장에 불과하던 아르투아는 크리스마스 시즌 맥주로 스텔라 아르투아를 출시한 이후 크게 성장했다. 스텔라는 별이라는 뜻으로 크리스마스의 별에서 착안했다.  

다채로운 맥주 스타일이 즐비한 벨기에에서 밝은 라거를 선보이는 건 모험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깔끔한 황금색 라거는 벨기에를 넘어 유럽 전체에서 인기를 끌었다. 뢰번은 스텔라 아르투아를 통해 대학 외에 맥주라는 정체성을 추가했다. 

1987년 아르투아는 맥주 세계를 뒤흔든 결정을 한다. 1853년 왈로니아 주필리에에 설립된 뾔에드뵈프 양조장과 합병을 발표한 것이다. 1921년 라거를 생산한 뾔에드뵈프는 작은 양조장이었다. 그러나 1966년 출시된 주필러(Jupiler)는 이 회사를 명실상부한 벨기에 최고 맥주 회사로 만들었다. 아르투아와 뾔에드뵈프는 오래 전부터 경쟁사이면서 협력자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벨기에 라거 시장을 양분하고 있던 두 회사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맥주 세계는 격변을 맞게 된다. 

아르투아와 뾔이드뵈프의 합병으로 태어난 회사가 현재 초거대 맥주 기업 AB인베브의 전신인 인터브루(Interbrew)다. 1991년 벨기에 벨레뷰와 헝가리 보르소디를 인수한 인터브루는 맥주 산업에서 다중 브랜드 전략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이후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캐나다 맥주 브랜드를 인수했고 2000년 초반 영국 바스와 독일 벡스를 가족으로 만들며 거대 맥주 회사로 거듭난다.

충격적인 일은 2008년 일어났다. 2004년 브라질 맥주 브랜드 암베브(AmBev)와 합병하며 인베브(InBev)로 사명을 바꾼 인터브루가 세계 1위 맥주 회사 앤하이저부시를 적대적인 방법으로 합병한 것이다. 맥주 시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버드와이저를 가지고 있는 세계 최고 미국 브랜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베브에서 AB인베브(Anheuser-Busch InBev)로 초거대 기업이 된 이 맥주회사는 계속해서 덩치를 불려 갔다. 2013년에는 코로나 맥주를 갖고 있는 멕시코 최대 브랜드 그루포 모델로를, 2014년에는 한국 최대 맥주 회사 오비맥주를, 그리고 2016년에는 세계 2위 브랜드 사브밀러(SABMiller)를 인수하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다국적 기업이 되었다. 

AB인베브 본사는 여전히 이곳 뢰번에 있다. 스텔라 아르투아는 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성배처럼 생긴 전용 잔, 챌리스에 담긴 황금색 라거가 없었다면 지금의 AB인베브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텔라 아르투아 한 잔을 뢰벤 구시청사 옆에서 마시려고 한 것도 바로 그 '시작'을 '고향'에서 느끼고 싶어서였다. 

솔직히 뢰번에서 마시는 스텔라 아르투아는 한국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청량한 목 넘김을 즐겨야 하는 페일 라거의 기본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깔끔하고 가벼웠다. 성 베드로 성당 앞에서 광장을 오가는 지역 사람들을 보며 스텔라 아르투아를 마신다는 경험이 색다를 뿐이었다. 하지만 경험은 기억으로 남는다. 아마 이 기억은 한국에서 계속 스텔라 아르투아를 찾게 만들 것이다. 혀로 스며든 기억은 이래서 무섭다. 

한때 AB인베브 본사를 미국으로 옮긴다는 소문에 뢰번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스텔라 아르투아는 초국적 기업 라거 중 하나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도시의 영혼이 담긴 맥주다. 뢰번 대학은 반으로 찢겨졌지만 맥주는 고고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펜은 칼보다 강하고, 맥주는 펜보다 세다. 물론 아주 가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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