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 ⓒ OAL(올)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 윤미(박희정 분)의 소원은 소박했다. 아버지의 택시를 바꿔 드리고 싶었고, 어머니의 가계에 보탬이 되고 싶었고, 철부지 남동생의 용돈을 주고 싶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반도체 기업 '진성'에 입사하게 됐으니 꿈은 차근차근 실현될 것 같았다.

그런데 부푼 희망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얼마 안 돼 백혈병 진단을 받고 만 것. 2003년 10월 입사해, 2005년 10월에 받은 결과였다. 믿기 힘든 결과는 가정을 깡그리 망쳐가고 있었다. 평생을 택시 운전을 하며 살던 아버지 상구(박철민 분)는 애초 남 탓을 하지 않았다. 그저 운이 나쁘다고만 생각했던 것.

하지만 회사의 태도는 가족과 환자 본인에게 섭섭함을 넘어 배신감을 안겨줬다. 퇴사를 종용하고 약간의 위로금을 건넨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아픈 것은 윤미뿐이 아니었고, 다른 노동자들 역시 다양한 질병에 시달리는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반도체에 입사 후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세상을 뜬 고 황유미씨와 그 아버지 황상기씨의 실화를 그린 작품이다. 김태윤 감독이 밝혔듯이 직접적인 압력은 없었지만, 누구도 선뜻 지원에 나서기 부담스러웠을 작품이다. 힘들게 만들어진 이 영화가 2월 6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절절히 그려진 아버지의 부정은 따스했다

 아버지의 부정이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아버지의 부정이 절절하게 그려져 있다. ⓒ OAL(올)


영화는 강원도 속초에서 시작한다. 고 황유미씨의 고향이다. 아픈 딸 덕분에 세상 물정 모르던 아버지는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그러나 골수이식 수술을 했던 딸은 다시 재발돼 병원에 재입원했다가, 수술을 할 상황마저 안 돼 퇴원하게 된다.

결국 평소 가장 사랑하던 아버지의 자리, 가족을 위해 바친 아버지의 청춘이 묻어 있는 곳, 아빠의 택시 뒷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가고 만다. 물론 이 장면도 실화 그대로다. 아버지는 딸을 위해 강해지리라 다짐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진성'으로 그려지는 대기업을 상대로 한 싸움은 그리 만만치 않다. 피해를 본인이 직접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와중 회사는 산재를 신청하지 않으면 10억 원에 합의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가 없다. 그 덕에 남은 가족의 화목이 깨지기도 하고, '딸 팔아 돈을 얼마나 벌겠다고 그러냐' '이상한 데 다니더니 빨갱이 물이 들었다'는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지만 지치지 않고 나아간다. 그리고 드디어 1심에서 세계 최초로 반도체 공장 노동자로서 산재판결을 받아낸다.

"그들이 우리를 '또 하나의 가족'으로 만들었다"

영화 초반 낯설고 드세게까지 들리는 속초 사투리가 들려온다. 강원 내륙과는 또 다른 억양이라 잠시 당황할 관객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차분히 집중하면 나름 재미나게 감상할 수 있다. 영화는 실제 현실을 그대로 옮기려 애썼다. 그래서 박철민은 고 황유미씨의 부친을 처음 만나는 날, 그분의 음성을 그대로 녹음해 와 연습했다고 한다.

평소 어느 영화에서나 웃음을 책임지던 박철민이었지만, 이번 작품에는 다르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을 표현했다. 흡사 아들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결코 원망치 않는 <아버지의 이름으로(1994)>의 한 장면이 떠올려진다. 인생 희로애락 중 '애'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준 이 작품은 그의 연기 인생에 중요 포인트가 될 듯하다.

어머니역의 윤유선도 안정감 있는 연기력을 보여줬다. 박철민은 결국 아내가 이해하고 힘을 보태는 장면을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꼽기도 했다. 급성백혈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윤미역의 박희정도 빠지지 않는다. 애초 시나리오를 보고 삭발을 결심했다고 밝힐 정도로 영화에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물심양면으로 아버지를 돕는 노무사 역의 김규리는 악에 받히는 장면에서조차도 베테랑의 차분함이 느껴진다. 배우로서의 능력에 토를 달지 않아도 될 듯하다. 특히 영화 속 그녀가 남긴 "저 사람들이 우리를 또 하나의 가족으로 만드네요"라는 대사는 음미해 볼 만하다. 기타 출연 배우 모두 노 개런티에도 돈 이상의 역할을 보여줬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장점은 지루한 장면이 없다는 것이다. 적은 제작비의 효율적 운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과감한 압축과 생략이 영화에 결코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꼭 들어가야 할 장면들이 생략된 것도 아니다. 전체적으로 크게 감정의 과잉 없이 팩트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많은 제작비 때문에 아까워 끼워 넣는 일이 발생하지 않아, 오히려 군더더기가 없다.

아직은 진행 중인, 거대 악이 아닌 진실과의 싸움

 영화는 두레형식으로 제작비를 마련했고,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노개런티로 참여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감독은 밝혔다.

영화는 두레형식으로 제작비를 마련했고,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노개런티로 참여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감독은 밝혔다. ⓒ 나영준


1심에서 승소하긴 했지만 모든 재판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근로복지공단이 피해자 유족은 물론 시민·사회단체, 정치권의 비난마저 감수하며 산업재해를 인정한 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에 서울고검은 "각종 유해화학물질이나 전리방사선에 노출된 것이 이 사건 상병의 발병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항소제기 결정사실을 공단에 알렸다. 때문에 법적으로는 진행 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길고 지루한 시간이 남았지만, 영화에서 그려낸 아버지의 투쟁은 '거대 악'이나 '악마'와의 전투가 아니다. "직접 보지 않은 회사 측의 입장을 상상으로 담지 않았다"는 감독의 말처럼 상대를 나쁜 놈으로 규정짓는 것이 아닌, 진실을 향해 걷는 발길의 기록이다. 그 여정에 힘을 보태진 못하더라도, 따스한 눈길 정도는 보여줘도 되지 않을까 싶다. 진실은 보수나 진보, 좌나 우, 혹은 '일베'나 '오유'가 아닌 사실 그 자체의 문제기 때문이다.

지난 20일 언론 시사회가 끝난 후 잠시 틈을 내 만난 김태윤 감독은 "영화는 오버하지 않고 철저히 팩트 위에서 완성됐다"며 혹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은 이야기일 뿐이라고 볼멘 목소리를 낼 이들을 위해 당부의 말을 남겼다.

"영화는 지난한 시간을 지낸 아버지와 유족이 1심을 승소한 시점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은 판결이 궁금하신 분들은 관심을 가지고 계속 지켜봐 주시면 됩니다. 그런 세상의 지켜봄이 유가족에겐 오히려 힘이 되지 않을까요."

또 하나의 약속 박철민 삼성반도체 윤유선 김규리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