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보도지침>은 기존 연극에서 보기 힘든 법정드라마라는 소재와 설정으로 눈길을 끈다.

연극 <보도지침>은 기존 연극에서 보기 힘든 법정드라마라는 소재와 설정으로 눈길을 끈다. ⓒ 벨라뮤즈


전두환 전 대통령 집권기인 5공화국 시절, 신문사 편집국마다 매일 아침 팩스 하나가 도착했다. 문화공보부 안 홍보정책실이란 곳에서 날아온 팩스였다. "이 문장은 빼고 이 단어는 꼭 써라, 이 기사는 톱에 배치하라." - 보도지침이었다. 물론 정부는 그것을 '보도협조사항'이라고 표현했지만, 언론사는 모두 그 명령에 따라 기사를 써야만 했다. 그 시절, 언론 자유는 사치였다.

 1986년 9월 6일, <말>지는 보도지침 특집호를 발행함으로써 언론 탄압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1986년 9월 6일, <말>지는 보도지침 특집호를 발행함으로써 언론 탄압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 <말>

"이거 왜 이러십니까! 나, 기자입니다!"

그래도 기자는 있었다. 몇몇 용기 있는 기자들이 이렇게 외치며 보도지침을 거부했고, 그래서 이들은 수난을 겪었다. 오는 26일부터 6월 19일까지 대학로 수현재씨어터 무대에 오르는 연극 <보도지침>은 그런 기자들의 이야기다.

우선 역사적 팩트부터 정리해보자. 김주언 당시 <한국일보> 기자는 1985년 10월 19일부터 1986년 8월 8일까지 한국일보사가 받은 보도지침을 복사해 월간 <말>에 넘긴다. 이에 <말>은 다음달인 1986년 9월 6일 '보도지침-권력과 언론의 음모'란 이름의 특집호를 발간한다. 권력에 의한 언론의 직접통제가 세상에 까발려지는 순간이었다. 이 폭로로 김 기자와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김태홍 사무국장, 신홍범 실행위원 등이 구속됐다. 이들이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은 건 무려 9년 넘게 흐른 1995년 12월 12일이었다.

연극 <보도지침>은 김주언 기자가 보도지침을 폭로하고 재판정에 서는 과정을 그렸다.

진지할 줄 알았는데, '빵' 터졌다

 연극 <보도지침>은 엘에스엠 컴퍼니 이성모 프로듀서가 2014년 보도지침사건의 실재인물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와 조언을 들으며 대본 집필을 시작했다. 이후 약 2년간의 기획기간을 거쳐 제작에 돌입했다.

연극 <보도지침>은 엘에스엠 컴퍼니 이성모 프로듀서가 2014년 보도지침사건의 실재인물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와 조언을 들으며 대본 집필을 시작했다. 이후 약 2년간의 기획기간을 거쳐 제작에 돌입했다. ⓒ 벨라뮤즈


선입견을 깨기 위해 이 연극의 재기발랄함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겠다. 분명 연극 <보도지침>은 어두운 언론 탄압을 그리는 것도 맞고 재판정의 무거움을 그리는 것도 맞지만, 분명 재미있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연습실에서 열린 <보도지침> 연습공개 현장에선 진지한 가운데 웃음 폭탄이 곳곳에서 터졌다. 공연을 앞두고 연습에 한창인 배우들은 자신의 끼를 아끼지 않았는데, 배우들의 이런 감각 있는 '깨알 리액션'이 웃음 포인트였다. 묵직한 주제로 자칫 가라앉을 수 있는 극의 분위기가 덕분에 적절한 톤을 찾았다.

이날 보도지침 사건의 실재 인물인 김주언(62) 전 기자와 그를 변호했던 한승헌(81) 변호사가 연습실을 찾았다. <미디어오늘> 전 편집장 출신으로 미디어 전문가인 시사평론가 김종배(50)씨도 이들과 동행해 배우와 스태프를 응원했다.

특히 한 변호사는 이 연극이 품은 웃음에 흡족해했다. 그는 "나는 글이든 연극이든 엄숙일변보다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웃음과 해학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결국 우스운 장면이 기억에 남더라"며 "연습 현장을 보고 완전히 압도당했다, 여러분은 알파고다"라며 칭찬했다.

"잡혀갈 줄 당연히 알았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이 대단한 일은 아니다"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왼쪽)와 한승헌 변호사가 17일 연극 <보도지침> 연습현장을 찾아 배우들과 제작진, 취재진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왼쪽)와 한승헌 변호사가 17일 연극 <보도지침> 연습현장을 찾아 배우들과 제작진, 취재진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 벨라뮤즈


"보도지침 사건(재판)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당시에 보도지침 폭로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노동자의 권리를 찾으려 했던 전태일, 그리고 후에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의 이야기 등 그들에 대한 추모도 연극에 함께 담아주신다면 좋겠다." (김주언 기자)

김주언 기자는 이 말을 하면서 목이 메는 듯 잠시 침묵했다. 이어서 그는 "보도지침을 단순 과거의 일로 돌리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과거에는 보도지침을 안 지키면 강제 연행해서 고문하거나 언론사를 폐간해버리는 식의 물리적 통제가 주였다. 하지만 지금은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대리인이나 언론사 사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방송과 신문 등을 통제하여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은 말하지 못하게 한다. 연극 <보도지침>은 메르스나 세월호가 떠오르는 '현재의 이야기'일 수 있다."

순간 연습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지나갔다. 제작진 중 한 명이 그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폭로를 결심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김 기자가 담담하게 답했다.

"잡혀들어갈 줄 당연히 알았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이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자유민주언론을 위해서 노력하는 기자들도 있다는 것을 단지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의 폭로는 의미 있었다. 당시 보도지침 사건이 미국 언론인들에게도 전해졌고, 미국 하원의원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항의서한도 보냈다. 또 가두시위를 하는 등 외국에서 우리 행동을 주시하면서 응원했다."

한 배우의 질문 : 가장 싫어하는 대통령은?

 연극 <보도지침>의 실재 인물들과 배우들, 제작진이 다함께 모여 사진을 찍고 있다. 맨 아래줄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 한승헌 변호사, 김종배 시사평론가다.

연극 <보도지침>의 실재 인물들과 배우들, 제작진이 다함께 모여 사진을 찍고 있다. 맨 아래줄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 한승헌 변호사, 김종배 시사평론가다. ⓒ 벨라뮤즈


한 변호사는 보도지침 사건을 연극화 하는 것에 감사를 표했다. "개탄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어쩌면 그런 사건과 재판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우리 역사가 한 단계 한 단계 더 성숙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연극은 사람들 기억 속에 두고두고 남는 것이다, 당시 사건을 이렇게 남기게 되어 매우 의미 있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사법권의 독립이 이만큼 이루어진 것도 우리들(변호사)이 아닌 오히려 당시 피고인들 덕분이다"라며 "제가 못한 것을 연극을 통해 여러분이 다 이야기 해준 것에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한 배우가 김 기자와 한 변호사에게 던진 마지막 질문은 엉뚱한 듯 날카로웠다. "지금까지 대통령 중에 제일 싫은 대통령은?" - 이 질문에 김 기자는 누군가의 이름을 말했고, 옆에 앉은 한 변호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 질문의 답, 제가 보충해줄게요. 그런데... 현직 대통령도 포함입니까?"


보도지침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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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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