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결말이나 결정적 장면을 알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 <토르 : 라그나로크>의 한 장면.

영화 <토르 : 라그나로크>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토르는 천둥의 신이자 아스가르드의 군주다. 어느 날, 아스가르드에 '죽음의 여신'이 찾아오고, 아스가르드는 위기에 빠진다. 토르는 위기에서 아스가르드를 구할 수 있을까? 위기상황에서, 토르의 아버지는 토르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아스가르드는 장소가 아니라 백성이다."

토르는 이후, 아스가르드 지역을 모두 포기하면서까지 백성을 지켜낸다. 아스가르드는 쑥대밭이 되었지만, 그는 아스가르드를 잃은 것이 아니다. 백성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엄연히, 아스가르드의 군주다.

학창시절 필수로 암기한 '국가의 3요소'라는 것이 있다. 영토, 국민, 주권이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국가라고 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국민'이다.

'영토'가 없는 나라나, '주권'이 없는 나라는 비록 처참한 몰골이긴 하지만,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다. 역사적 실례도 찾아볼 수 있다. '약속의 땅'을 향해 이집트를 벗어나와 광야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던 '이스라엘'은 영토가 없었다. 20세기 초반, 주권을 빼앗긴 조선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이 없는 나라. 이를 상상해볼 수 있는가. 단언컨대 국가의 3요소 중 결정적인 것은 바로 '국민'이다.

국가의 3요소 중 핵심, '국민'

토르는 가장 중요한 '국민'을 지켜냈고, 결국 '아스가르드'를 지켜냈다. 그런데 이것 참, 우리 현실과 많이 다르지 않은가. 우리에겐 '국민'보다 항상 '국가'가 먼저이지 않았는가.

우리는 '국가'를 이유로 '국민'들이 많은 희생을 치르는 것을 보아왔다. 한국전쟁기, '국가안보'를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머나먼 타국 베트남에 파병되어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도 허다하다. 경제개발시기에는 '국가경제', 혹은 '경제개발'이라는 이유로 삶의 터전을 잃고 열악한 근로조건과 저임금을 견뎌내야했다(물론 지금도 그렇다). 물론 이에 대한 합당한 보상도 없었다. 이들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는 국가가 과연 필요할까. 강국이든, 부국이든, 나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그런 국가는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토르가 백성들을 희생시키면서 아스가르드를 지키려 한다면, 도대체 그 '아스가르드'란 무엇인가. 특정 지역인가 자신의 왕좌인가.

<토르 : 라그나로크>와 전혀 다른 작품이지만, 한국의 천만영화 <변호인>이 생각났던 이유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그런데 ... 그 국가를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국가보안문제라고 탄압하고 짓밟았잖소!"

국가란 국민이다

 영화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

영화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 ⓒ NEW


'국가'와 '애국'을 이유로(이마저도 허황된 이미지이며, 결국은 '정권'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 무고한 국민을 처참히 짓밟는 정치군인과 그 하수인들의 전횡에 대한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의 일갈이다.

그들이 그렇게 무자비하게까지 지키려고 하는 그 국가가 바로 '국민'이라는 것. 따라서 국가는 가장 먼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주국가의 기본책무다.

어쩌면, 토르는 비록 '군주제 국가의 군주'이긴 하지만, '국가란 국민'이라는, 민주주의 가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못 궁금하다. 이 영화가 전 정권, 혹은 전전 정권에서 개봉되었다면, '좌파영화'로 분류되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브런치'라는 플랫폼에도 게시할 예정입니다.
토르 변호인 국가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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