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7회째를 맞은 부산어린이청소년영화제는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직접 행사 일부를 기획하고, 중심에 서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랜 경력의 뛰어난 성인 프로그래머들이 이끄는 다른 나라 청소년영화제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미성년 영화인들이 깊게 참여하고 있다.
 
영화제 폐막을 하루 앞둔 16일 오전 부산 해운대 영화의 전당에서 경쟁 부문 '레디~ 액션18' 부문 상영을 마친 세 감독 또한 그 분위기를 실감한 터였다. GV(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은 청소년 집행위원은 객석에서 이어지는 질문을 꽤 노련하게 배분했고, 상기된 표정으로 감독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행사 직후 영화 <책갈피>의 이혜빈, <모습>의 이주왕, <사랑은 워터>의 유성은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레디~ 액션! 18 부문' 진출작인 감독들의 관객과의 대화 현장.

'레디~ 액션! 18 부문' 진출작인 감독들의 관객과의 대화 현장. ⓒ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

 
영화가 준 위로
 
<책갈피>(10분)는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보며 상념에 젖는 딸의 마음을 헌책방이라는 공간에 표현한 작품. 이혜빈 감독은 "오래된 과거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했고, 관객분들이 엄마의 감정을 잘 따라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라며 헌책방을 주요 공간으로 택한 이유를 전했다. "중학교 3학년 때 갑자기 영화에 빠져 하루에 세 편씩 보곤 했다"며 그는 "고1 때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12번이나 봤다.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 그 감정에서부터 영화 연출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연출 계기를 전했다.
 
<모습>(28분)은 학생회 임원이 만든 정체불명의 약을 먹은 일부 동급생들이 말과 생기를 잃고 가면을 쓴 채 공부만 하게 되는 이야기다. 코미디와 스릴러 요소를 섞어 그렸다. "획일화한 교육으로 수동적이기 됐고, 개성을 잃어버린 친구들 모습을 보고 영화를 만들게 됐다"던 이주왕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억압을 받고 자랐다. 아픔이 있었는데 영화를 통해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며 "고1 때 <싱 스트리트>와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나서 영화에 빠지게 됐다"라고 말했다.
 
<내 감정은 워터>(14분)는 감정적 동요를 느낄 때마다 몸에서 물이 나오는 남학생이 우여곡절 끝에 결국 좋아하는 또래 친구와 만남을 이어가기 시작하는 과정을 사랑스럽게 다루고 있다. "더울 때 땀 나는 걸 통제할 수 없듯이 감정이라는 건 숨기고 싶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라며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고 호그와트 학교에 입학하고 싶었는데 머리가 크면서 그게 불가능함을 알았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게 영화의 힘이라는 걸 알고 관객분들에게 제 세계관과 동심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라고 밝게 이야기했다. 
 
계기는 저마다 다를 지언정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세 감독 다 강해 보였다. 길게는 일주일, 짧게는 4일의 촬영을 위해 세 사람은 스스로 용돈을 모으거나 영상 관련 단체의 지원을 알아보고, 나아가 부모님의 지원도 적극 받아내며 영화를 완성시켰다. 이 정도면 성인 못지 않은 열정이다.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 '레디~액션! 18' 부문에 진출한 <책갈피>의 이예빈 감독.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 '레디~액션! 18' 부문에 진출한 <책갈피>의 이혜빈 감독. ⓒ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

 

"학교에서 촬영했는데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고 엄청 눈치를 받았다. 경상북도 콘텐츠진흥원에서 장비 협찬을 받았고, 나머지 제작비는 두 달 치 용돈을 모아 만들게 됐다. 친구들 출연료로 밥을 사줬다(웃음)." (이주왕 감독)
 
"제가 자주 가는 헌책방이 있다. 촬영을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무상으로 빌려주셔서 찍을 수 있었다." (이혜빈 감독)
 
"남자 주인공 몸에서 물이 나오는 설정이 중요해서 머리 부분에 호스를 연결시켰고, 비내리는 장면도 학교 옥상에서 물을 뿌리며 진행했다. 정작 전 19년 모태솔로 인생이라, 이번 영화 만들 때 친구들의 연애경험을 대거 활용했다(웃음)." (유성은 감독)

 
특별한 포부를 밝히다
 
경상북도 안동과 칠곡에 사는 이주왕 감독과 이혜빈 감독은 일반 고교 재학생이고, 경기도 부천에 사는 유성은 감독은 예술고등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특히나 엄격한 집안 분위기로 꽤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던 이주왕 감독은 획일화한 학교 교육 등 현실 문제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장남이고, 집안 자체가 공부를 잘하는 쪽이라 부모님 기대가 컸던 것 같다. 영화를 한다고 하니 극도로 반대하셨다. 근데 제가 뇌전증을 앓고 있거든. 병원에서 판정받고도 영화를 찍으러 나가니까 이젠 지원해주신다. 열정을 보신 것 같다." (이주왕 감독)
 
"원래 꿈이 국어교사였는데 완전 방향을 틀어서 영화를 하고 싶다고 하니 부모님이 엄청 걱정하셨다. 아무래도 험한 일이라 생각하신 것 같다. 학교에서 느끼는 중압감도 있지만 제가 장녀다. 동생이 2명이라 첫 입시 스타트를 잘 끊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야간 자율 학습 빠지고 영화 보러 다니고, 영화 하러 다니니까 친구나 학교에선 절 원숭이 보듯 하는 게 있다. 이 영화제에도 수업을 빠지고 왔다. 확인서를 받으면 체험학습으로 처리해 주신다." (이혜빈 감독)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 '레디~액션! 18' 부문에 진출한 <사랑은 워터> 유성은 감독.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 '레디~액션! 18' 부문에 진출한 <사랑은 워터> 유성은 감독. ⓒ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 '레디~액션! 18' 부문에 진출한 <모습>의 이주왕 감독,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 '레디~액션! 18' 부문에 진출한 <모습>의 이주왕 감독. ⓒ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

 

이에 비해 유성은 감독은 부모님 지지를 받으며 자기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는 "제 친구도 이번 영화제에 오게 됐는데 반에서 학생들이 많이 빠지면 분위기가 좀 그러니까 학교 수업은 다 듣고 왔다"라며 "어릴 때부터 글쓰기로 생각 표현하는 걸 좋아했다. 영화도 영상으로 생각을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부모님도 그렇고 중학교 때 선생님도 제 꿈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주시고 지지해주셨다"라고 말했다.
 
세 사람 모두 최근 한국영화 및 국내 영상 콘텐츠의 성장을 몸소 느끼는 중이었다. 한국영화계 유망주일 수 있는 이들에게 한국영화계에 기대하는 것과 하고 싶은 작품을 물었다.
 
"영화를 찍기 전까지 스스로 현장 체질이라 생각했는데 마친 직후엔 다신 안 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니 기억이 미화되더라(웃음). 작품 만든 지 이제 6개월이 지났는데 다시 또 하고 싶다. <기생충>을 시작으로 우리 영화가 큰 주목을 받고 있는데 앞으로도 많은 영화들이 외국에 나갈 거라 생각한다. (중략) 일단 우리 같은 경우엔 한국영화 감독님들을 어느 정도 알잖나. 근데 제가 학교 친구들에게 아는 영화감독 이름 다섯 명만 대보라고 하면 아무도 못한다. 좀 더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감독 이름을 술술 말할 수 있을 때가 오면 좋겠다. " (이혜빈 감독)
 
"셀린 시아마 감독님을 좋아한다. 여성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 감독님 작품들을 보고 여성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좀 더 다른 작품을 저도 해보고 싶다. 이를 테면 지금 이슈인 동성애 영화라든지 말이다. 한국영화가 세계에 알려지는 건 좋은 일인데 독립영화는 그만큼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국내 관객분들이 다양한 시각의 작품을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다." (이주왕 감독)
 
"제 영화를 보시는 분들은 잃어버린 동심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님을 참 좋아한다. 이번 영화에선 시간 제약도 있고, 뭔가 다 못 펼친 게 있다. 최근에 다른 영화 스태프로도 일하고 그랬는데 제가 배운 것들을 다음 영화에 넣고 싶다." (유성은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얘기에 기자가 '킹정한다'('인정하다'라는 뜻의 MZ세대 용어)라고 동의를 표하니, 요즘 그런 말 잘 안 쓴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쉬워만 할 순 없다. 세대 간 쓴 단어는 좀 달라도 영화로는 모두가 소통 가능한 법. 새삼 이런 유망한 영화인들을 만날 수 있는 장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부산어린이청소년영화제 비키 BIKY 해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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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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