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성적표의 김민영> 스틸컷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 스틸컷 ⓒ 엣나인


 
별 것 아닌 것에 서운해지거나 무한히 고마워지는 순간이 있다. 상대를 생각하는 그 마음만큼은 마치 생물처럼 변하기 마련이라 그것을 특히나 감지하는 사람들에겐 여간 피곤한 경우가 왕왕 있다. 지난 8일 개봉한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은 바로 그 마음이 한창 예민했을 10대 말, 20대 초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16일 서울 동작구 극장 아트나인에서 만난 이재은, 임지선 감독은 "가늘고 길게 영화가 상영됐으면 좋겠다. 출연 배우들이 지금 고3이라 무대 인사를 같이 못 다니는데 수능시험이 끝난 후에 영화 홍보를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있었다. 이 또한 타인의 감정과 상황을 헤아리는 마음 아닐까.
 
두 감독의 성정과도 많이 닮아 있는 <성적표의 김민영>은 삼행시 클럽을 만들어 자기들끼리 유희적 욕망과 문학적 감수성을 해소하던 19세 학생들의 이야기다. 고3이 되어 미묘한 감정적 갈등으로 소원해지는 과정을 정희(김주아)의 시선으로 때론 코믹하게, 때론 쓸쓸하게 묘사하고 있다. 20대 초반 한 영화 워크숍에서 만난 두 사람이 첫 장편인 이 영화를 내놓기까지 약 5년이 걸렸다.
 
너무도 닮은꼴
 
어느새 이재은 감독은 취업해 한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임지선 감독은 학교 졸업 작품을 준비중이었다. 2017년 단편 영화로 출발했던 기획이 장편이 되어, 영화제에서 상영한 뒤, 개봉까지 하고 관객과 만나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두 사람도 저마다 감흥을 느끼고 있을 것 같았다.
 
"만들 때만해도 기대가 없었다. 독립영화 제작환경이 다 다르니까. 우린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제작비를 댔고, 주먹구구식이라 결과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막상 전주영화제에 출품했을 때부터 간절해지더라(웃음). 선정이 돼야 하는데 하며 가슴 졸였던 기억이 난다. 우린 너무 많이 봐서 별 재미가 없는데 (개봉 후에도)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어 신기하다. 처음 이재은 감독이 제게 같이 하자고 제안했을 때 제가 느꼈던 재미를 관객분들이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임지선 감독)
 
"이 작품 처음 기획한 후 같이 만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간헐적으로 서로 다른 것도 하긴 했지만 5년은 나름 되게 긴 시간인데 포기하지 않고 영화를 만든 것에 기특한 마음이 없지 않다." (이재은 감독)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을 연출한 임지선 감독.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을 연출한 임지선 감독. ⓒ 엣나인필름


 
제목의 변천사가 재밌다. 단편 기획 당시 <민영의 성적표>였던 제목은 회의 끝에 지금의 제목이 됐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 한 줄이 제목이었을 때도 있었다"며 임지선 감독은 "그러다 앞뒤 말을 바꿔 봤는데 말장난이 주는 재미도 있고, 민영이라는 이름이 주는 중요성이 부각된 것 같아서 좋았다"고 설명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속내를 털어놓는 그 과정의 우정과 사랑의 특징이기에 굳이 나이 불문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게 두 감독의 생각이었다. 삼총사처럼 늘 붙어 다녔던 영화 속 민영(윤아정)과 정희, 그리고 수산나(손다현)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 찾기 쉬운 존재들일 것이다. 두 감독은 이에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굳이 열아홉, 스물일 필요는 없었다. 같이 한 시기를 공유하다가 변하는 시기를 맞는 인물들이니까. 진실된 감정이면 어느 나이 때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를 본의 아니게 오래 붙잡게 되면서 서로 잘 아는 감정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그러면서 더 디테일이 살고, 미묘해지고, 결이 계속 붙어간 것 같다. 재은 감독과 서로 캐릭터를 바꿔가며 역할극을 해보기도 했다." (임지선 감독)
 
"미묘한 감정의 뒤틀림을 중학생 때 느낀 적도 있고, 이 시나리오를 쓰는 순간에도 인간관계에 힘듦이 있었다. 종종 세대 이야기냐는 질문받는데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느낄 법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지선 감독 말대로 녹음기를 틀어놓고 상황극도 했는데 이상하게 그 감정에 몰입이 되더라. 영화 대사 중 민영이 정희에게 4차원 같다고 하는 게 있는데 임 감독이 제게 그 대사를 하는데 울컥하더라(웃음). 저도 평소에 헛소리를 많이 해서 그 단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거든. 정희든 민영이든 둘 다 밉지 않게 미묘한 느낌을 잡는 게 중요했다. 어느 한쪽이 밉게 묘사되면 이 영화는 성립할 수 없으니까." (이재은 감독)

 
영화 속 정희는 곧 두 감독이 생각하는 이상적 친구의 모습이기도 하다. 수산나는 도피하듯 해외 유학을 선택했고, 민영 또한 정희의 마음보단 당장 신입 대학생의 삶에 집중했음에도 이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려는 태도를 지키기 때문이다. 세 사람이 영화 후반부에서 마냥 화해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길을 간다는 설정도 많은 고민 끝에 나온 현실적 대안이었다.

이재은 감독은 "찍으면서 가장 경계했던 부분이다. 우리가 정희와 민영을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며 "그래서인지 관객과 대화 행사를 할 때도 민영에 대해 말하는 단어들을 조심스럽게 고르고 있더라. 그만큼 정희 마음에 집중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을 연출한 이재은 감독.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을 연출한 이재은 감독. ⓒ 엣나인필름


 
달랐고, 치열했던 선택들
 
두 감독은 마치 영화 속 정희와 민영처럼 달랐다. 다만 영화를 사랑하거나 이야기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서로를 알아본 듯 보였다. 재수한 뒤 수의학과를 택한 이재은 감독, 대학 입시를 택하지 않고 영화 공부를 하다 뒤늦게 학교에 들어갔던 임지선 감독을 두고 주변에선 그 공동 작업의 시너지 효과가 크다고 평하기도 한다. 두 사람에게 영화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 때를 물었다.
 
"(대학 입학 후) 영화와 관련 없는 삶을 살다가 영화가 하고 싶어졌다. 방법을 모르니 휴학하고 그 워크숍을 들었던 거지. 4개월 간 주 3회 수업받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거창한 이유는 없고,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하고 싶긴 했다. 극장에 갈 때마다 제가 다른 사람들과 웃음 코드가 다르다는 걸 느껴서 영화를 안 좋아했다. 사람들이 웃는 지점에 전 안 웃기고, 제가 웃는 지점에선 사람들이 안 웃더라. 소름 끼쳤다(웃음). 고등학생 때 여러 예술영화를 접하게 됐는데 다양한 형식의 영화와 삶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취향에 맞는 느낌이랄까. 그럼 나도 내 얘길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근데 연출을 엄청 하고 싶다기 보단 내 이야길 쓰고 싶은 마음에 가깝다. 누가 안 찍어주니까 찍게 된 것 같다." (이재은 감독)
 
"입시 때 영화학교를 지원했다가 떨어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뭔가 결과를 내야 붙을 수 있나 싶어서 워크샵을 들은 거다. 영화에 대한 확신도 갖고 싶었고. 어렸을 때부터 아이디어를 내고, 뭔가 만드는 걸 좋아해서 광고 연출 같은 직업을 꿈꾸기도 했다. 영화는 어려운 예술이라 생각했는데 광고보다 의미 있는 작업인 것 같아 공부해보고 싶었다. 재은 감독과 달리 연출에 흥미가 있다. 좋은 아이디어를 살리는 그 재미로 움직이는 것 같다." (임지선 감독)

 
"지나고 나서 보면 우리 둘이 너무 다르고 잘 안 맞아서 잘 맞았던 것 같았다"고 이재은 감독은 말했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이렇게 서로를 보완하고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 과정의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이제 30대를 코앞에 두거나 맞이한 두 사람은 또다른 가능성을 모색 중이다. "정말 그렇게 자주 만났는데 의외로 일만 했다. 코인노래방을 가끔 가긴 했는데 그때도 일하다가 안 풀려서 간 거였다. 너무 사무적인 거 아냐?"라며 신기해하는 임지선 감독에게 이재은 감독이 "일할 때만 만나는 게 마치 그룹 플라이 투 더 스카이 같다"고 화답하며 웃어 보였다.
 
"<성적표의 김민영>을 쓸 당시엔 제가 정희와 비슷한 상황이라 생각했다. 어디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느낌이랄까. 근데 직장에 다니니 변하긴 한 것 같다. 어렸을 땐 내 감정을 들여다 보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생각이란 걸 멈추고 있다. 뭔가 다른 세계에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지금 더 뭉클하게 다가온다. 제가 성격이 소심하고 낯을 가리는데 그래서 저만 알아보고 바라볼 수 있는 게 있다. 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직장에선 뭔가 무쓸모가 되는 게 싫더라. 어떤 특성이 있듯 사람들만의 개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사회에선 종종 그게 단점으로 여겨지는 게 슬프다. 제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만 아는 감정, 그걸 사람들이 이해하게끔 하는 통로니까." (이재은 감독)
 
"<성적표의 김민영>은 마음과 행동이 다른 친구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시선의 이야기라 생각한다. 그게 인간관계 핵심 아닐까. 나이 들면서 저도 사람을 판단하고, 다른 점을 찾고, 그걸 미워하곤 했는데 그게 걸림돌이더라. 있는 그대로 보는 시선을 가진 정희에게 위로를 받는다. 저는 10대 때부터 무슨 일을 하는지가 중요해서 대학 입학도 미루고 원하는 걸 찾아갔다. 일이 중요하다 보니 친구들이 서운해하더라. 그 문제를 파고 들다 보니 이렇게 제가 영화를 하고 싶어하는 것도 결국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인 것 같더라. 결국 일과 관계는 떼어놓을 수가 없는 무언가같다. 그래서 더 어렵고." (임지선 감독)
성적표의 김민영 이재은 임지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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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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