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미지수>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미지수>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그리고 싶은 사람 얼굴이 있는데 이제 생각이 안 나네.."

지수(권잎새 분)의 집에 말도 없이 계속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우주(반시온 분)다. 6년을 사귀다 헤어진 두 사람이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크게 놀라는 그녀다.

이번에는 혼자도 아닌 것 같다. 불안해 보이는 표정 뒤로 화장실 욕조 속에는 피를 가득 쏟은 채 영배가 죽어 있다. 우주의 친구로 지수 역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친하게 지냈다. 우발적인 사고에 의한 것이니 신고를 하자는 지수와 전과자는 될 수 없다는 우주. 두 사람이 답도 없는 고민을 이어가고 있을 때, 죽었던 영배가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화장실 밖으로 걸어 나와 그동안 지수가 연락을 하지 않았다며 서운해한다. 비로소 소파에 나란히 앉은 세 사람. 행복하게 보냈던 오래전의 시간들이 거실의 TV 속에서 흘러나온다.

한편, 이 영화 속에는 우주를 홀로 부유하는 남자도 있다. 언제나 꿈속에서 외로운 유영을 멈추지 못하는 기완(박종환 분)이다. 아내 인선(양조아 분)과 함께 작은 치킨집을 운영하는 그는 상당히 예민한 편이다. 주문이 밀려있는데도 배달원이 통화를 하며 배달을 나간다며 그 자리에서 바로 음식을 빼앗아 버린다. 비가 내리는 날에도 주문은 받지 않는다. 배달을 하다가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 그의 모습이 못마땅스럽지만 아내는 일단 참고 넘긴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기완은 언제나 꿈속에서 우주인이 된다. 끝도 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같은 공간 속에, 이번에도 역시 혼자서.

02.
영화 <미지수>의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현실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나마 현실에 가깝게 놓여 있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조차 현실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몰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놓여 있는 영화의 플롯 자체도 우리가 이제껏 봐왔던 일반적인 형식과는 조금 다르다. 어떤 사실 하나를 최대한 지연하기 위하여, 그렇게 지연된 시간 속에서 다른 형식으로 그 이야기를 조립해 내기 위해서 감독은 쪼개고 또 쪼갠 극을 다시 이어 붙여 나간다. 마지막에 이르러 완성되는 전체 모양은 평범한 플롯이 가진 결말과 그리 다르지 않겠지만, 여기에는 그 과정에서 생기는 균열과 이격이 남게 된다.

이는 어떤 상흔과도 같다.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내면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자국 하나가 새겨질 수 있는 것처럼 독특한 플롯은 이 작품 위에도 사라지지 않는 흔적 하나를 남긴다. 그리고 영화의 가장 깊은 곳에 놓여 있는 이야기 하나는 그 자리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시간 위로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어떤 상실 이후에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이별을 둘러싼 남겨진 이들의 상실감과 그리움이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미지수>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미지수>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3.
이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모든 인물은 상실이라는 단어 위에 머물고 있다. 그중 어떤 인물은 상실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굳이 구분 짓지 않도록 하겠다. 그 또한 누군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존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가 여전히 그 작은 공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로 존재하며,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를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벌써 지나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크게 세 공간에 의미를 두며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가장 많은 장면이 할애되어 있는 지수의 집과 시작점과도 같다고 할 수 있는 기완의 치킨집, 그리고 짧지만 마음을 동요하게 만드는 신애(윤유선 분)의 집이다. 서로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이지만 영화의 중심 사건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세 공간은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서로 각자의 꿈을 꾸는 공간처럼도 여겨진다. 지수는 사건 이후 자신이 마주할 수 없는 현실을 이 공간 속에 감춰두고, 기완은 돌이킬 수 없는 스스로의 자책과 후회를 가둬놓는다. 신애에게는 여전히 놓을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꿈을 이 공간에서 꾼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서 꿈을 꾼다는 행위는 오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영화는 극의 처음에서 이들 모두가 수동적으로 꿈을 꾸는 존재가 아닌, 꿈에서 벗어날 의지가 없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이제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 대상의 얼굴을 애써 그리고자 수없이 얼굴 윤곽만 그리던 사람과 로켓 발사에 관한 기사와 영상을 끊임없이 찾아보는 사람으로 말이다. 누군가를 상실하고 난 뒤에 그 어두운 시간 속에서 길을 잃게 되면, 상체는 제발 도와달라 말하면서 하체는 가라앉는 그대로 아무 의지 없이 멈춰버리는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이들 모두가 그런 모습이다.

"나 혼자 우주에서 떠다니고 있어. 나 좀 꺼내 줘. 그곳에서."

04.
기완의 아내인 인선과 신애의 존재는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중요하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다른 조각을 어루만지고 현실에 안착할 수 있게끔 만드는 존재로 기능한다. 인선은 기완이 우주에서 헤매는 동안 현실을 붙잡고 버텨내는 인물이며, 신애는 지수가 처음으로 용기를 말할 때 그 자리를 반듯하게 닦고 안아주는 존재가 된다. 물론 두 사람으로 인해 기완과 지수가 단번에 일상을 회복하게 된다거나 과거의 모든 상처를 지워낼 수 있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존재하기에 억지 노력 없이 충분히 자신의 아픔 속에서 머무를 수 있게 되고, 잠깐이나마 현재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인선과 신애 사이에 차이는 존재한다.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인선과 달리, 신애는 그 사건 중심에 놓인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극이 말하고 있는 기완과 인선의 쪽에 훨씬 더 가까운 인물이며, 이들보다도 훨씬 더 어둡고 깊은 상실 속에 위치한 대상이기도 하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윤유선 배우의 짧고 고요한 연기 하나, 지수를 말없이 꼭 껴안아주는 신애의 모습은 그래서 큰 울림과 여운을 남긴다.

영화는 그런 인물의 전면과 후면을 그리 가깝지고 멀지도 않은 위치에서 조심스럽게 번갈아가며 비추는데, 눈꺼풀 아래에 잠겨 있을 인물의 슬픔이 스크린 너머로 옮겨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바로 이어 등장하는 처절한 전투 신.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이 장면으로 인해 신애라는 인물의 내면은 입체적인 서브텍스트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미지수> 스틸컷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미지수> 스틸컷 ⓒ 서울독립영화제


05.
영화가 후반부에서 지금껏 미뤄두었던 이야기 하나를 꺼내는 순간, 지금까지 익숙하지 않던 플롯의 형태도 모두 제 모습을 드러낸다. 내러티브 전체가 향하는 방향은 물론, 장면 사이사이에 존재하던 짧은 신들까지도 모두 말이다(지수가 우주에게 왜 다음은 자신이냐고 물었는지, 한 여고생은 벤치에서 왜 상기된 표정으로 편지를 읽고 있었는지 등의 장면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때가 되면 그동안 속내를 감춰올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의 감정도 모두 함께 터져 나오게 된다. 언젠가는 반드시 쏟아내야 하지만 아직까지는 삼키고 있던 누군가가 그 상실의 슬픔을 이제 모두 토해내기라도 하듯이. 여기에는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도 함께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한 가지 궁금했던 점이 있었다. 이 작품과 유사한 다른 많은 영화들이 남성 서사를 중심으로 사랑했던 이의 부재를 슬퍼하고 견뎌냈던 것과 반대로, 이 작품은 왜 여성 주인공을 중심에 두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다. 여성 서사를 따랐기 때문에 조금 더 섬세한 표현이 가능했고, 신애와 같은 인물의 면모 또한 극대화하여 보여줄 수 있어 더 좋았다고 느꼈지만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특히 이 작품은 감독이 오래 만나왔던 연인과 헤어진 후에 느꼈던 감정을 바탕으로 시작되었기에 남성 인물을 극의 중심에 놓는 게 표현하기에 더 용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했던 것이다.

영화를 연출한 이돈구 감독은 이에 대해 '자신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옛 연인이 항상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 영화 속 지수가 마지막 장면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슬픔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이 영화의 어떤 틈으로부터 따뜻함이 새어 나온다면, 그리고 이를 우리가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여기 이 한 줄의 대답이 영화를 끌어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영화 미지수 권잎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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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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