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베른의 기적'과 함께 침몰한 마법사 군단

[월드컵 이야기 26- 제5회 월드컵] 험난한 결승 토너먼트의 희생자 헝가리

07.05.27 08:08최종업데이트07.05.28 08:21
원고료로 응원
마법의 팀, 헝가리

1950년대 초반을 휩쓴 헝가리는 1952년 아마추어의 정상인 헬싱키 올림픽에서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며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1954년 월드컵 제패를 목표로 거침없이 행진하고 있었다.

1953년 헝가리는 홈그라운드에서 백 년 동안 진 역사가 없다는 잉글랜드 대표팀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6-3으로 격파하였다. 이 충격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서 잉글랜드는 월드컵 개막을 한 달 앞두고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설욕을 노렸지만 오히려 7-1이라는 엄청난 스코어차로 패할 정도로 헝가리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헝가리는 1938년 제3회 월드컵에서 결승에 오른 적이 있었지만 당시에 최강 이탈리아에 2-4로 패하고 준우승에 머문 바 있었다. 당시에 헝가리는 비교적 강하다는 평가는 받았지만 절대 강자의 칭호는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1954년 월드컵을 맞이하여 헝가리는 그야말로 '절대 강자'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팀이었다.

월드컵을 앞두고 스위스의 1부 리그 팀과 맞붙어 10-0이란 스코어로 승리하는 등 그야말로 천하무적의 팀이 1954년 월드컵 당시의 헝가리였다.

그러나 이런 천하무적의 팀은 결국 월드컵 정상 일보 직전에서 무릎을 꿇었다. 능력이 모자라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다. 오늘날 당시의 월드컵을 살펴보면 여러모로 허점투성이를 발견할 수 있고, 바로 이러한 허점투성이의 대진 방식은 헝가리의 신화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조별리그

헝가리가 속한 제2조는 터키, 서독, 한국이 배정되었다. 피파는 헝가리와 터키에 시드를 배정하여 서로 경기를 하지 못하게 하였고, 시드를 배정받지 못한 서독과 한국 역시 서로 경기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헝가리는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한국을 압도하며 무려 9-0이라는 스코어로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한국팀의 골키퍼 홍덕영은 당시의 경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헝가리의 슈팅은 마치 대포알 같았고, 푸스카스나 치보르, 콕시스가 때린 공은 안보일 정도였다. 특히 골포스트나 바에 맞으면 마치 천둥이 치는 듯했다."

한국이 기나긴 여행으로 제 기량을 펼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베스트 컨디션으로 맞붙었어도 (점수 차이에는 변화가 있었겠지만) 헝가리의 상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헝가리는 4-2-4 전법을 변형한 혼베드 전법으로 미드필드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한국팀은 전반에 두 번의 슈팅 이외에는 제대로 공격조차 하지 못했다.

헝가리의 두 번째 상대는 서독이었다. 서독의 감독은 헝가리와의 경기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포기였다. 베스트 맴버를 출전시켜 헝가리를 잡는다는 보장이 없었고, 설사 잡고서 조 1위를 확정한다고 하더라도 8강 토너먼트 이후에는 남미의 강호들과 상대할 것이기에 차라리 조 2위가 서독에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독으로서는 어차피 한국이 터키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터키만 잡는다면 조 2위를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헝가리와의 경기에 전력을 쏟을 필요가 없었다. 결국 서독은 주장인 F. Walter를 제외한 2진급 선수들을 헝가리와의 대전에 출전시켰다.

이러한 서독에 대해서 헝가리 역시 2진급 선수들을 내보냈지만 서독처럼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민하지 않았다. 헝가리로서는 세계 강호들을 피해서 결승에 진출하기보다는 정면승부로 돌파하는 방법이 그들에게 어울리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별리그에서 헝가리는 서독에 8-3이라는 큰 스코어 차이로 이기며 조 1위를 확정하고 8강이 겨루는 토너먼트에 진출하였다.

험난한 결승 토너먼트

오늘날의 월드컵은 조별리그에서 1위를 차지하면 16강 토너먼트에서 다른 조의 2위 팀과 겨루게 되어 있다. 그러나 1954년의 월드컵은 이상하게도 각 조의 1위가 준준결승을 치렀고, 역시 각 조의 2위가 준준결승을 치렀다. 그렇기 때문에 조 1위를 확정지은 헝가리는 스스로 강자들이 득실거리는 사지에 자신을 내던진 꼴이 되었다.

헝가리가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남미의 브라질이었다. 4년 전 다잡았던 우승을 우루과이에 넘겨준 브라질은 분명 헝가리에는 힘든 상대였다. 그러나 헝가리는 복수의 칼을 갈고 닦은 브라질보다 훨씬 날카로운 칼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양 팀의 충돌은 서로 주먹이 오가는 난투극으로 발전하였다.

6월 27일에 벌어진 브라질과 헝가리의 경기는 '베른의 난투극'이라는 이름으로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폭력 사태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세 명이 퇴장당하며 경기가 끝난 뒤 샤워실에서의 난투극으로까지 이어진 이 경기에서 헝가리는 4-2로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승리를 거두었지만 헝가리는 브라질과의 격렬한 사투의 후유증으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헝가리가 결승에 오르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상대는 디팬딩 챔피언 우루과이였다. 헝가리로서는 산 넘어 산이었다. 우루과이는 비록 20년 전의 전성시대보다는 전력이 다소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4년 전 월드컵 정상에 오른 저력이 있는 팀으로 그때까지 월드컵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강팀이었다.

헝가리는 부상 중인 푸스카스를 빼고 우루과이와 준결승을 치르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 헝가리는 2-0으로 앞서나가며 쉽게 승리하는 듯했다. 그러나 큰 경기에 강한 우루과이는 후반전에 호베르크가 두 골을 넣으며 동점에 성공하였고,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하였다. 전통의 우루과이와 마법의 헝가리의 연장 경기는 콕시크의 두 개의 헤딩 슛으로 마무리되었다. 결국 헝가리는 우루과이에 월드컵 첫 패배를 안겨주며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베른의 기적'과 함께 침몰한 마법사 군단

서독으로서는 '베른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7월 4일, 베른의 모든 신문들은 헝가리가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객관적인 전력상 7-3 혹은 8-2의 우세가 점쳐지는 가운데 역사적인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헝가리로서는 사실상 브라질, 우루과이와의 사투를 벌이며 세 번째 결승전을 치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반면 서독은 비교적 순탄한 행진으로 결승에 안착하여 체력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마법의 군단 헝가리는 결승전 휘슬이 울리자마자 8분 만에 푸스카스와 치보르가 득점에 성공하며 2-0으로 앞서나갔다. 전반 10분이 헝가리의 시간이었다면 그 뒤 10분은 서독의 시간이었다. 서독은 몰락(Morlock)이 11분경 한 골을 만회하였고, 18분경 란(Rahn)이 동점골을 넣어 경기를 2-2로 만들었다.

후반전 6분을 남겨놓고 서독의 란이 서독이 앞서는 역전골을 성공시켰다. 헝가리로서는 종료 직전에 푸스카스가 골을 넣었으나 오프사이드로 득점이 인정되지 못하고 결국 2-3으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최강의 실력을 갖춘 헝가리는 결국 서독에 우승을 넘겨주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헝가리로서는 32연승의 신화가 깨진 동시에 세계 축구의 정상을 향한 자신들의 꿈이 깨진 것이다. 헝가리는 1950년부터 1956년까지 헝가리 국가대표팀은 40승 6무 1패를 기록하였는데 유일한 패배가 바로 월드컵 결승에서 당한 2-3의 패배였다.

헝가리 신화의 종지부는 서독이 달성했지만, 서독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진행된 경기 진행 방식과, 준준결승의 브라질, 준결승의 우루과이가 합심해서(?) 이룬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던 헝가리라는 무적의 군단은 결승에 오르기까지 서서히 위기를 축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 U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05-27 08:08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 U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축구 헝가리 서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