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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헝가리의 마법을 풀다

[월드컵 이야기 27- 제5회 월드컵] 최후의 승리를 위해서는 순간의 패배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07.05.27 10:04최종업데이트07.05.28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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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 배정도 못 받은 이류 국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16개 나라는 피파에 의해서 두 개의 진영으로 구분되었다. 선택된 8개 팀은 강자로 분류되었고, 나머지 8개 팀은 비교적 약자로 분류되었다. 지역예선에서 노르웨이를 제압하고 본선에 오른 서독은 후자에 속했다.

제2차 대전의 주범으로 전쟁이 끝나고 동서로 나뉜 독일의 한쪽 진영인 서독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노르웨이와 핀란드를 제치고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지역예선에서 3승 1무의 성적을 거두었지만 당시 서독의 축구는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류 국가에 속했다.

서독이 배정받은 2조에는 당시 무패의 팀 헝가리와 터키, 그리고 아시아의 한국이 함께 배정되었다. 피파는 네 나라 중에서 헝가리와 터키를 강자로 구분하여 시드를 배정하였다. 서독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노릇이었지만 어차피 승부의 세계에서는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 이전에 강자로 구분되건 약자로 구분되는 것은 크게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불리한 조별리그

분명 당시 조별리그는 서독보다는 터키가 유리했다. 서독은 세계 최강 헝가리와 터키를 상대해야 했고, 터키는 헝가리를 피하고 서독과 한국을 상대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독으로서는 1패가 이미 예약된 상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각 조에 속한 팀들이 모두 대결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취한다면 서독도 한국과 대결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여유 있는 조별리그 운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독은 시드 배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과 대결할 수 없었다.

터키로서는 한국을 당연히 이긴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독과의 대결에서 비기기만 해도 조별리그 통과는 이룰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지역예선에서 제비뽑기라는 행운이 터키에 본선 진출을 가져다준 것처럼 특별한 조별리그 운영 방식은 터키에 유리하게 적용되는 듯했다.

서독으로서는 비록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지만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당시에 승점으로만 순위를 가리고 있었고, 오늘날처럼 골 득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규정이었다. 그래서 서독으로서는 헝가리에 패하더라도 터키만 붙잡는다면 조 2위는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터키가 약체인 한국을 이긴다고 하더라도 세계 최강 헝가리가 터키를 꺾어준다면 서독은 터키를 제치고 2위가 될 수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하다'

서독은 처음부터 조 1위가 될 생각이 없었다. 워낙 헝가리라는 존재가 컸기 때문도 있었지만 조 1위가 된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결승 토너먼트에서 유리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독은 조 2위가 되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 유리한 점이 많았다. 8강이 겨루는 결승 토너먼트는 각 조의 1위 팀은 1위 팀끼리, 그리고 2위 팀은 2위 팀끼리 대진표가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서독이 욕심을 부려서 조별리그에서 1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헝가리와의 대결에서 총력을 기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베스트 맴버를 출전시켜 헝가리를 잡는다는 보장이 없었고, 설사 잡고서 조 1위를 확정한다고 하더라도 8강 토너먼트 이후에는 남미의 강호들과 상대할 것이기에 차라리 조 2위가 서독에는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독으로서는 애초에 조 1위의 욕심을 과감히 버렸다. 어차피 세계 최강 헝가리와 조별리그에서 정면승부를 펼쳐봤자 터키에 어부지리를 줄 수도 있기에, 헝가리와의 대결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오로지 터키와의 경기에 승부를 걸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서독의 작전은 주효했다. 서독은 첫 번째 경기인 터키와의 경기(6월 17일)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 4-1로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번 경기는 모두가 예상했듯이 헝가리에 패했다(6월 20일). 서독으로서는 예상보다 큰 점수차(3-8)로 패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결승 토너먼트를 위해서 그러한 아픔을 감수할 수 있었다.

서독과 비기기만 해도 2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터키는 서독에 패한 뒤, 다음 경기인 한국과의 경기(6월 20일)에서 7-0으로 대승을 거두었지만 결국 서독과 1승 1패를 기록하며 동률을 이루었다. 오늘날과 같았으면 골 득실에서 앞선 터키가 2위를 차지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의 규정에 따라서 서독과 터키의 플레이오프가 6월 23일 진행되었고, 이 경기에서 서독이 7-2로 승리하여 조 2위를 차지하고 8강이 겨루는 토너먼트에 진출하게 되었다.

순탄한 결승 토너먼트

우여곡절 끝에 8강에 진출한 서독은 비교적 순탄한 토너먼트에 합류하게 되었다. 각 조의 1위가 득실거리는 쪽을 피했기 때문에 서독으로서는 행운이었다.

물론 강팀들을 피했다고는 서독의 상대가 되는 팀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8강에서 서독이 만난 상대는 올림픽에서 연속으로 준우승을 차지한 동유럽의 강호 유고슬라비아였다. 유고슬라비아는 비록 시드를 배정받지 못해서 약체인 멕시코와의 경기는 할 수 없었지만 강호 브라질과 연장 접전 끝에 1-1 무승부를 이루었고, 시드를 배정받은 프랑스를 1-0으로 누르며 조 2위를 기록하고 8강에 오른 팀이었다.

유고슬라비아의 단점이라면 지역예선과 본선 조별리그를 통해서 매 경기 한 골밖에 못 넣는 골 결정력에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의 형편없는 득점력은 결국 서독과의 경기(6월 27일)에서도 진가를 발휘했다. 서독은 유고의 골결정력 부족에 힘입어 유고슬라비아를 2-0으로 누르고 준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서독이 결승에 오르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상대는 역사적으로 감정이 있는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는 1938년 제3회 월드컵에서 지역예선을 통과하고도 독일에 합병되는 바람에 본선의 무대를 밟지 못했던 뼈아픈 과거를 갖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다행히 조별리그에서 시드를 배정받아 강호 우루과이를 피할 수 있었고, 스코틀랜드(1-0)와 체코슬로바키아(5-0)를 제압하고 8강에 진출한 팀이다.

오스트리아는 역사적 감정을 서독과의 경기에 쏟아부으려고 했으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서독에 1-6으로 패하고 3-4위전으로 밀려났다.

베른의 기적

조별리그에서 3-8로 패한 바 있는 서독이 결승에서 다시 헝가리를 만났을 때 모든 축구팬들은 당연히 헝가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독으로서는 헝가리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8강 토너먼트에서 브라질과 우루과이를 상대하며 비록 승리를 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피해를 입은 헝가리에 비해서 체력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는 서독은 베스트 맴버를 결승전에 투입시켰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이 헝가리는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두 골을 먼저 넣으며 신화를 이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헝가리의 무패 신화는 서독의 기적에 의해서 깨지고 말았다. 2-2의 동점 상황에서 터진 란의 역전골이 결승골이 되면서 서독은 무패의 신화 헝가리를 침몰시키며 세계 축구의 정상에 오르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였다.

월드컵과 같은 축구 경기에서 절대 강자로 지목된 팀이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가끔 보게 된다. 1954년의 헝가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절대 강자였다. 절대 강자는 자신의 강함을 인정하기 위해서 어떠한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는다. 변칙으로 승리를 얻는 것은 자신들의 성취에 흠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헝가리는 강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을 피하거나 돌아가지 않고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절대 강자가 아닌 서독은 패배해도, 최후의 성공을 위해서 약간 돌아가더라도 그것이 확실하다면 택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었다. 3-8의 패배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최후의 승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순간의 패배도 감수할 수 있는 것이 서독의 우승이 가져온 귀중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야후의 개인블로그(http://kr.blog.yahoo.com/apache630_in)에도 올립니다.

2007-05-27 10:04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야후의 개인블로그(http://kr.blog.yahoo.com/apache630_in)에도 올립니다.
월드컵 축구 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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