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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최악의 기억 IMF, 지금은 삶의 힘"

[나의 마라톤, 나의 인생①] 늦깎이 조리사 김상엽씨

08.04.06 19:43최종업데이트08.04.06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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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오마이뉴스 주최로 6일 강화도에서 열린 바다사랑 마라톤대회 참가자들이 강화 해협을 타고 흐르는 해안도로를 향해 힘차게 달리고 있다. 맨 앞에 붉은 색 옷 입은 이가 김상엽씨. ⓒ 남소연

영화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통해 '내생순'과 만났습니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따져보게 됐으니 말입니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따져볼 때, 하필 내 생애 최악의 순간도 끼어들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답니다. 내 인생을 돌아보기조차 쉽지 않은, 죽어라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팍팍한 세상이니 말입니다.

 

마라톤 또한 그렇습니다. 죽어라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팍팍하기 그지없는 운동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당장 그만 달리고 싶은 유혹'과 골백번도 넘게 싸우기도 바쁠 텐데, 그 와중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고 하니 말입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네요. "과거의 많은 잘못했던 과오들이 하나씩 생각이 난다"는 마라톤대회 참가 후기가 눈에 띄고, "가정의 행복과 부모님 건강과 그리고 지금까지 인생 경로를 반추해보면서 달린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라톤대회, 말 그대로 '나만의 뉴스'들이 한꺼번에 격동하는 현장이 되는 셈입니다.

 

오늘(6일) 열린 '2008 강화바다사랑 마라톤대회'도 마찬가지겠지요. 대회 참가자 3천여명 중 굳이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IMF로 인한 실직을 오히려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삼은 이야기를 그리고 마라톤대회 때마다 머릿속에 '내생순'을 떠올린다는 이 사람.

 

[오전 6시 30분] '싱싱한' 서울역 앞 광장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잠에 빠져 있을 달콤한 시간. 하지만 이미 강화도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직 승차하지 않은 대회 참가자들 마음도 사뭇 급한 모양이다. 어떤 이는 지하철 입구를 빠져나오자마자 몸을 풀기 시작한다.

 

김상엽(40)씨도 허겁지겁 버스에 올라탔다. 사실 주말에 더 바쁜 그는 63빌딩 뷔페 조리사다. 금요일과 '월화수' 중 하루를 택해 쉬는 경우가 더 잦은 이유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한 케이스"라며 씩 웃는 모양새가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요리사 복장에서 '정숙함'이 묻어났다면, 오늘은 '퍼덕퍼덕' 싱싱하기 그지없다.

 

"익숙함보다 새로움이 더 좋잖아요. 재미도 있고. 강화도는 처음이라,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역대회는 더 참석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대회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기도 해요.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는 재미가 아주 그만이거든요."

 

[오전 7시 40분] 강화도로 가는 버스 "하프가 나에겐 최적의 코스"

 

김씨가 마라톤을 시작한 것은 2003년. 물론 '자극'은 있었다. '달리기로 위암 말기를 이겨낸 사나이'가 직장 '선배'였기 때문이다. 2005년 <오마이뉴스>를 통해서도 소개된 바 있는 오상효 조리장 덕분에 "단순함이 주는 재미"에 눈을 떴다고 한다. 1년에 6∼7번은 대회에 꼬박꼬박 참가한다는 김씨, 허나 이제까지 풀코스를 뛴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63빌딩 뷔페 김상엽 조리사 ⓒ 이정환

 

"배도 나왔고 제 몸매가 마라톤용은 아니예요(웃음). 하프로도 충분히 즐겁습니다. 나에게 딱 맞는 최적화된 코스라고 할까. 또 영화를 망칠까 두렵기도 해요. 대회 때마다 머릿속에서 흐르는 영화,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의 어느 장면이 갑자기 툭툭 떠올라요. 노컷이라고 할까. 내가 끄집어내는 게 아니고, 그냥 저절로 틀어져요. 종잡을 수 없는 재미, 하프가 저한테는 '딱'인 것 같아요."

 

나아가 '노컷 장면'이 신체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는 설명에서는 '글쎄'란 꼬리표가 당장 따라붙는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일단 5㎞ 정도까지는 다른 생각이 껴들 틈이 없다고 한다. 오직 달리기 '구상'뿐이다. 5㎞ 지점을 넘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슬슬 '내생순'이 떠오른단다.

 

반환점을 돌기 전까지는 '작은 성취'의 즐거운 기억이 등장하고, 체력이 떨어지면서는 힘들었던 순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특히 "당장이라도 그만 뛰고 싶어지는 15∼18㎞ 지점에 떠오르는 것은 내 인생의 최악의 순간"이란 설명이다. 그럼 결승점에 가까워졌을 때는? "다음 주에 무엇을 해야겠다는 다짐"이 구체화된다고 하니, 이쯤 되면 완벽한 '기승전결' 구조 아닌가.

 

[오전 9시 25분] 드디어 스타트! "총성아, 빨리 울려라"

 

버스 안에서 김씨는 출발 직전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전율 같은 게 느껴진다"고. 특히 준비를 잘 했을 때는 "올 테면 와 보라"는, "어서 총성아, 빨리 울려라"는 심정이라고 말이다. 김씨의 말 그대로였다. 참가자들이 제자리 뛰기를 시작한다. 하늘을 향해 활짝 기지개도 펼친다.

 

마라톤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참가자들 모두 "파이팅"을 외쳤다. 그리고 시작된 카운트 다운. 아홉! 여덟! 일곱! 여섯!… 내 가슴까지 다 둥둥거린다. 군악대 연주 때문이 아니다. 봄이다. 정말 봄이다. 이렇게 사람들 때문에 만물이 역동하는 계절을 느끼긴 처음이다. 이윽고 "하나!"에 "야!"라는 함성과 함께 일제히 땅을 박차는 다리들. 아지랑이를 밟고 '둥둥'거리는 저 튼튼한 몸짓들.

 

그들은 뛰고 나는 걸었다. 그래도 그들의 호흡을 생생하게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거친 숨소리와 아스팔트를 내닫는 발자국 소리가 기막히게 어울린다. 옆을 지나치는 어린 참가자들의 발랄함에도 귀가 열린다. "겁나 빨라, 못 따라가겠어"라고 실력차를 토로하기도 하고, "물병 버리는 폼 하나는 프로네"라는 '농'에 깔깔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리고 김상엽씨가 순식간에 옆을 지나쳤다. 그는 자신의 하프코스 최고기록을 1시간 50분, 최저기록을 2시간 40분이라고 했다.

 

출발 직전 모습. 가운데가 김상엽씨 ⓒ 조경국

 

[오전 10시 56분] 당장이라도 그만 뛰고 싶은 오르막, 내 생애 최악의 순간은?

 

김씨가 "당장이라도 그만 뛰고 싶어진다"는 곳에 도착했다. 4㎞ 지점, 하프코스로는 17㎞에 해당하는 장소다. 게다가 오르막이다. 엄마 참가자가 자신의 아이를 잠깐 경찰에게 맡겨 놓고 반환점을 향할 만큼 난코스다.

 

어떤 참가자는 "차라리 깎아 놓고 뛰라고 하지"라는 푸념을 남기고 지나친다. 한 여성 달림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거친 호흡이 아니라 차라리 신음 소리다. 함께 출전한 남성의 "뛰어! 뛰어!"란 독려가 매정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김씨의 모습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벌써 20분이 지났다. 슬슬 조급함이 치민다. 어디쯤 왔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에 손이 갔다. (개념 좀 탑재하자. 휴대폰을 가져갔을 리 없다.)

 

김상엽씨의 '질주' ⓒ 조경국

 

비로소 "마라톤은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김씨의 말이 실감이 난다. 하지만 꼭 '고통'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지금 그는, 달림이들은 세상의 어떤 방해로부터도 해방된, 오롯이 자기만의 세계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김씨가 모습을 나타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 버스 안에서 김씨에게 물어봤었다.

 

- 혹시 대회 때마다 반복해서 떠오르는 '내 생애 최악의 순간'이 있나요.

"있죠. 역시 IMF, 나에게는 거대한 산맥이자 파도였어요. 직장이 무너졌고, 결혼이 무산됐죠. 독산역이었어요. 아침마다 지하철역에 서서 출근하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모습, 보라매공원에서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던 장면들이 떠올라요. 1998년 봄, 그 때 참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미래가 잘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끊임없이 저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이 있어요. 네가 좋아하는 게 뭐냐. 네가 뭐할 수 있지? 그때마다 답은 똑같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자."

 

내가 좋아하는 일에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직되고 얼마 후 그는 조리사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나이 서른 하나에 아르바이트 요리사로 일을 시작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조리사 시험에 통과하기까지 '3전 4기'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지금, 그는 당당한 63빌딩 뷔페 조리사다. 그는 "즐겁게 일한다"고 했다. 결국 IMF는 그의 인생에 절묘한 '터닝 포인트'로 작동한 셈이다.

 

[오전 11시 50분] 이제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 나머지 하나

 

오마이뉴스 주최로 6일 강화도에서 열린 바다사랑 마라톤대회 참가자 김상엽씨. 하프코스에 도전한 김씨가 출발 전 몸을 풀고 있다. ⓒ 남소연

- 1년에 6∼7번 대회 출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때마다 내 인생 최악의 순간과 마주치는 셈인데요. 지금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나요?

"물론이죠. 그것도 헤쳐 나왔는데, 두려울 것이 뭐냐. 보통 우리 모두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는 있죠. 다만 교통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마라톤을 하다보면 문제가 명확해져요. 여러 문제 중에 중요한 문제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리겠다는 마음이 싹틉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목표나 비전들이 좀 더 선명해져요. 각인된다고 할까요."

 

다시 결승점에 돌아왔다. 결승선을 향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다양하다. 시계를 보며 들어오는 사람, 혓바닥을 내밀기도 하고 브이자를 그리며 만세를 외치기도 한다.

 

역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활짝 쳐들며 기쁨을 표현하는 모습이 그중 가장 많다. 다만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기쁨을 '환희'같은 단어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김상엽씨가 결승선을 통과했다. 2시간 11분. 이제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단 하나가 남아 있었다. 당장 다음 주에 무엇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들어왔는가. 그는 "휴학중인 방송통신대 복학을 다음 주에 신청하기로 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강원도가 고향이거든요. 어렸을 때 산동네에 살았는데, 항상 저 산 너머가 궁금했어요. 마라톤과 같아요. 저 고개를 넘으면 어떤 코스가 펼쳐질까. 또 다른 고개가 있게 마련이죠. 이제 다음 대회 준비를 시작해야죠. 춘천 지역에서 열리는 산악마라톤에 출전할 계획이거든요."

 

- 혹시 또 다른 계획이 있다면?

"제가 퀴즈 프로그램 너무 좋아하거든요? 올해는 꼭 <퀴즈 대한민국>에 출전하고 싶어요."

 

- 결혼 이야기는 없네요.

"꼭 결혼을 해야겠다,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초조하지도 않구요. 뭐 언젠가 인연이 있으면 나타나겠지요(웃음)."

2008.04.06 19:43 ⓒ 2008 OhmyNews
마라톤 김상엽 늦깎이 조리사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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