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아무것도 모른 채 늙어가는 당신에게 바치는 영화

'데이빗 린치'의 숨겨진 감성 <스트레이트 스토리>

08.04.12 18:20최종업데이트08.04.1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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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 포스터 ⓒ 오윤주

앞으로 내 삶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태어나서 늙어가고 죽어야 하는 걸까. 이런 물음들은 우리 인간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신이 만든 피조물이다'라고 유신론자들은 자신 있게 말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신'이며 신의 뜻을 '겨우 인간인' 우리들은 모두 알지 못한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논해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여전히 우리는 인생에 대하여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삶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머리를 싸매고 고뇌한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늙어가야 하는 불쌍한 우리들을 위한 영화가 한편 있다.

이 영화는 미국의 한 신문에 실렸던 '앨빈 스트레이트' 라고 하는 노인의 실화를 다룬 이야기다. 그는 불화로 10년 넘게 연락을 끊고 지내던 형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형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차마 놀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지팡이를 2개나 짚고 다녀야 하는 73세의 그가 형에게 가기 위해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집의 잔디를 손질하는 잔디차였다. 그는 잔디나 손질해야 하는 그것을 타고 혼자서 6주간의 긴 여행을 한다. 오로지 형을 만나기 위해서.

앨빈은 언어장애가 있지만 착한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친구들과 딸은 그의 계획을 모두들 걱정스러워 한다. ⓒ 오윤주


이 영화는 그의 사연에 대해서 세세히 말하지 않는다. 그저 그의 세월을 말해주는 주름들이 자세한 이야기를 대신할 뿐이다. 그래도 관객은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비가 와서 기분 좋았던 어느 날에 걸려온 전화. 그의 형이 쓰러졌다는 소식. 그의 가슴은 기억과 회한으로 숨이 차오르고 그의 눈은 그리움과 조급함으로 물기를 더한다. '리차드 판스워드'의 연기는 여든의 세월만큼이나 깊고도 깊어서 마치 '인생을 응집해 놓은 듯
하다. 그것은 '노련한' 연기자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판스워드가 연기하는 앨빈 스트레이트와 잔디차는 영화 속에서 그 어떤 사진이나 그림보다도 아름다운 영상으로 그려진다. 카메라가 따라가는 시선은 어쩌면 신이라도 있는 듯, 자연과 인간의 절대적이고도 뭉클한 조화를 너무도 아름답게 잡아내었다.

그가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은 그의 여행만큼이나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스스로의 인생을 규정할 수 없는 우매함 그 자체가 감동이 되어 관객들을 이끈다. 결코 자만하지 않은 자위의 모습이면서 아무것도 아닌듯한 우리 개개인의 인생에 대한 경외가 엿보이는 모습들이다. 관객들이 이토록 겸손한 화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척 신기하고도 기쁜 일이다.

형을 만나기 위해 미시시피 강을 지나 6주 동안의 여행을 한다. ⓒ 오윤주


앨빈의 여행 도중 자신의 차에 치인 사슴을 보고 고함을 지르며 화내는 여자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7주 동안에 13마리의 사슴을 치었으며 기도도 해보고 음악을 크게 틀어 놓거나 소리 치며 운전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써봤지만 소용없다고 소리 질렀다. 그런 후 '나는 사슴을 좋아한다구요'라고 눈물지으며 말하고 휑하니 가버린다. 그녀처럼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서 야속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영화는 그렇게 잠깐, 아주 의아하게 등장하는 인물을 보여주며 우리의 야속한 '무지'를 순수함으로 정의한다.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는 그녀의 절망하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단순한 백치가 아닌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깨닫게 한다. 이러한 인간의 순수는 절대자 같은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최고의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그의 여행 도중 만나는 사람들은 기억을 나누기도 하고 기억을 남겨주기도 한다. ⓒ 오윤주


이 영화를 언급할 때면 영화의 감동과 함께 두 가지 화두가 등장한다. 하나는 감독이 '데이빗 린치'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주인공을 연기한 '리차드 판스워드'에 대한 영화 뒷이야기이다.

감독 데이빗 린치는 불편한 장면들을 연출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시선이 그의 특징이기 때문에 이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를 보고 난 사람들은 백이면 백 너무 의외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끄러운 헤비메탈 그룹이 가끔씩 애절한 서정곡을 불러 감동을 시키듯이 데이빗 린치는 그가 숨기고 있던 또 다른 감성을 이 영화를 통해 훌륭하게 보여줬다.

형을 만나러 가는 그의 모습은 자연과 함께 감동적인 조화를 이룬다. ⓒ 오윤주


특히나 카메라가 이동하는 시선은 단순히 기대 이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천천히 세상을 아우르듯 멀리서 움직이는 시선은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해준다는 God's hand를 연상시키듯 세상에 대한 경외로 가득 차 있고 그 자연 위를 유유히 지나가는 인간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가슴 벅차게 느껴진다.

데이빗 린치는 어쩌면 신을 믿는 사람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면서도 그 무엇보다 아름답게 묘사되는 인간의 모습은 그가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이, 그가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를 느끼게 한다. 그의 다른 영화 속에 묘사된 불편한 모습들은 아마도 단순한 냉소 이상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리차드 판스워드는 아쉽게도 이 영화가 그의 필모그래피의 마지막이다. 그는 오랜 스턴트맨 시절을 지낸 후에 57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이 영화는 그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랜 무명 끝에 처음으로 스포트 라이트를 받은 영화이다.

'리차드 판스워드'는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지만 그 주인공은 '케빈 스페이시'에게 돌아갔다. ⓒ 오윤주


촬영 당시 골수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었던 그는 이듬해 권총으로 자살한 채 발견된다. 아마도 투병의 고통 때문이었으리라고 사람들은 추측한다. 그의 고통은 분명 가슴 아픈 일이지만 뒤늦게 얻은 명성 직후에 죽었다고 해서 그의 죽음을 단순히 '비극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지내온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경솔한 수식 같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죽음을 슬퍼할 것이다. 스크린 속의 그는 연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영화 속에서 '삶'을 '살았다'. 이런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고통에 자살을 했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플 뿐이다. 여든에 찾아온 그의 명성은 그 자체로 감동을 전해주며 아름다움과 존경스러움 이외에 아무것도 그것을 수식하지 못한다.

긴 여행 끝에 형의 집 앞에 다다르고 조마조마하게 해후를 기다리고 있다. ⓒ 오윤주


영화 속 앨빈과 잔디 차는 단순히 노년에 대한 찬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설정이 아니라 실제 인물의 솔직한 모습 그대로이다.)

죽기 전에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그의 절박한 그리움은 오히려 길게 돌아가는 길을 택하게 했다. 알 수 없는 인생의 막바지에는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의 힘으로 꼭 이뤄야 할 것만 같았던 그 여행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살며 괴로웠던 과거의 기억들 위로 가장 소중하게 장식하고 싶은 기억을 만들기 위한 여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이 고달프게 지나왔던 인생의 막바지에 비로소 한 가지 알게 되는 소중함이 그가 잔디 차를 택하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이런 앨빈의 모습은 인간이 신과 같은 절대적 '지'에 도달하지 못함에 절망할 지라도 그것은 원죄 아닌 원죄처럼 갖고 있는 인간 본연의 순수함이며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렇듯 대자연의 자비로움과 인간의 자애심이 넘침 없이 잘 조화된 영상은 인생에 대한 최고의 존경이 담긴 시선으로 우리 각자를 바라본다.

스트레이트 스토리 데이빗 린치 리차드 판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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