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속에 숨겨진 진실

공감과 해소를 요구하는 성장 영화 <할람 포>

08.04.19 17:54최종업데이트08.04.1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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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할람 포 (Hellem Foe) > 의 포스터 주인공 할람과 그가 엿보는 '엄마를 닮은' 케이트 ⓒ 오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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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일찍 여읜 10대 후반의 소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할렘 포. 그는 집 마당의 커다란 나무 위에 지어진 오두막에서 혼자 지낸다. 그곳에는 한쪽 벽을 크게 차지하는 엄마의 사진이 붙어 있고 그녀가 남긴 유품들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 할렘은 그 오두막에서 엄마가 썼던 화장품으로 얼굴을 분장하고 매우 행복해 보이는 아빠와 새엄마의 관계를 엿본다.

아빠에 대한 반발심과 새엄마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그는 새엄마가 엄마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상상하여 그것을 캐내기 위해 엿보기 시작하지만 둘이 관계하는 광경을 보며 이내 새엄마에게 성욕을 품게 된다.

이렇게 시작하는 영화 <할렘 포>는 자칫 '엄마를 잃은 불쌍한 아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휩싸인 이야기'로 쉽게 단정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전면에 내세워 말하는 것은 별로 환영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뭔가 하나 정의를 하고 나면 어른들은 이내 나쁜 습성을 내보이기 때문이다. 그 나쁜 습성이란, 편하게 정의한 것으로 결론을 간주해 버리고 다 이해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니까 이제 알았으면 됐어. 원래 그런 건데 뭐 어쩌라고.'

이런 식의 지독한 자기 편의의 벽에 갇혀 ‘공감과 해소’ 라는 당연히 갖춰야 할, 자신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그 미덕을 버리고 마는 것이다.

▲ 아빠와 새엄마를 엿보는 할람 새엄마는 할람의 일기를 훔쳐보고 그의 속마음을 알아챈다. 그녀는 그것을 기꺼이 이용하여 자신을 싫어하는 할람을 떠나 보낸다. 영화란 간접적인 매체이다. 그녀의 심리를 정확히 캐내는 것은 무척 어렵다. 단지 영화의 흐름에 따른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 오윤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라고 명명되는 편리한 도구로 단편적으로만 생각해보면 그가 아빠에게 가졌던 반발심은 엄마의 사랑을 나눠 가져야만 하는 ‘경쟁자’로서 아빠를 의식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행복하게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미움이나 증오가 아닌 그가 진정 표출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발견하게 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아빠는 경쟁자가 아닌, ‘엄마’로 그려지는 지상 최고의 대상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자유인’ 혹은 ‘특권을 부여 받은 사람’으로서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리고 새엄마는 자유로운 사랑의 대상으로서 아빠의 사랑을 받아주는 사람, 즉 자신이 부러워하는 그것에 대한 욕구를 내보일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거의 모든 남자들이 알게 모르게 경험한다는 그것이 할렘에게 있어서는 친엄마의 부재와 새엄마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이상적 행동으로 변모하긴 했지만 그의 행동을 그저 ‘관음’이라는 병적인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고, 표면적 현상만을 내세우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그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정의 자체가 결론인 것처럼 설득 당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할람의 엄마를 닮은 케이트는 주인공을 위로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서로의 열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오윤주


할렘은 집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서 방황하면서 엄마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발견하고 그녀 주위를 맴돌며 그녀를 엿보는 생활을 시작한다. 그녀와 관계가 시작되면서 ‘아, 이렇게 엄마에 대한 감정이 해소되는구나’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이 단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표출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그를 증오의 극한까지 몰고 간 새엄마를 그 역시 극한까지 내몰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괴로움의 열쇠가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엄마의 죽음으로 시작된 그의 상실감은 단지 ‘엄마’가 아닌 ‘사랑’의 상실이었던 것이다.

▲ 엄마를 그리워하고 상실에 분노하는 할람 할람은 어찌할 수 없는 분노로 궁지에 몰려 괴로워한다. ⓒ 오윤주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그 욕구를 가장 만족스럽게 채워주는 존재는 ‘엄마’이다. 신이 선물한 최고의 이름 ‘엄마’는 ‘오이디푸스’ 라는 신화 속 인물의 이상 야릇한 상황을 만들어 낼 정도로 본능 이상의 본능으로 나타나는 사랑의 화신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겉잡을 수 없는 본능적 욕구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할렘을 통해 정의나 용어에 갇혀 가리워진 더 정확한 사실, 성장기에 방향을 알 수 없이 표출되어 불타는 '사랑을 추구하는 욕구'를 솔직하면서도 베일을 걷어내듯 은밀하게 보여준다.

마치 ‘이런 게 뭐 어때서’ 라고 말하는 듯한 영국 영화 특유의 솔직함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성장기’라는 여린 그것의 토로하지 못한 한을 헤아리는 연민의 감정도 묻어 나온다.

우리는 이 연민을 함께 나누고 할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아이’로서 살아왔던 자신의 성장기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던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할람 포 성장 영화 오이디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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