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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는 신데렐라일까, 파워엘리트일까

[주장]스포츠 스타들의 가치를 상업논리에 가둔 한국사회

12.05.29 15:39최종업데이트12.05.2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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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스타 혹은 연예인이라는 공적 가치는 방송에서 왜 다뤄지는가.

어떤 스타가 스포츠 스타냐, 연예인이냐(요즘 들어서 나는 김연아 선수가 아니라 연예인 김연아라고 보아야 맞다고 생각한다). 사실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다. 스포츠 스타이면 어떻고, 연예인이면 어떤가? 그들이 방송을 타야하는 이유가 있다면 방송은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개인에 대한 비난과 비판에 앞서 사회가 스타를 만드는 구조 자체에 대해서 문제를 짚는 것이 사실 더 중요할 것이다.

여러 스포츠 스타가 있었다. 그들이 처한 배고픈 환경과 감독, 동료, 선수, 부모가 하나가 되어 큰 대회에 나가는 과정이 종종 영화, 드라마 등의 소재로 활용돼 일반에게 공개된다. 이유는 다름 아니다. (지금과 같이 경제 공황 시대를 경유하는 상황에서는 특히) 사회에 희망을 주고 사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의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소재가 되는 운동선수들은 그런 꿈에 공감하고 매진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

특히 올림픽 스타, 국외에서는 올림픽 출전자들까지 비중있게 바라보는 이유는 이들이 서로 다른 여러 역경을 딛고 4년에 한 번 있는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 나가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그 가치를 인정한다. 이것을 조명해줘야 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 스포츠 영역에 해야하는 소위 제대로 된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상품성 있는 외모와 상품성 있는 종목, 자극적 스토리와 수익성이 다분한 스타에게 이런 영광이 돌아간다. 즉, 이 사회에 어떤 긍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치 기준이 아니라 상업적 현실 논리가 방송을 압도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스포츠의 그 역동적인 장면과 감동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는 이 사회가 얼마나 살 만한 세상인지 압축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스포츠 드라마의 설정에 빈곤, 불굴의 의지, 경쟁, 정당한 대접 등 여러 요소가 섞여 있는 것도 잘 보아야 한다. 세상이 자본주의 시스템, 근대 사회가 형성되면서 경쟁이 낳는 긍정성, 창조성을 정당화 하는 이유를 짧은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세상의 자원과 부의 희소성 원리(스포츠 스타의 빈곤한 환경), 국민이면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기꺼이 노력을 감수해야 하고(감독, 가족, 본인, 동료, 스폰서나 국가 등이 하나가 돼 같이하는 스토리), 국가적 경쟁, 회사 간 경쟁 등 무한 경쟁을 하는 것이 세상이다(각종 대회를 치루는 과정). 누구나 하면 될 수 있다는 기회가 열려있다는 것이 보장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과정) 사회, 패자도 모두를 빛내준 중요한 조연으로 비춰지는 건전한 사회(강력한 라이벌이 우승자에게 와서 축하 인사를 하며 스포츠맨십을 보여주는 장면 등) 이것이 현대 사회임을 보여주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이런 스토리에 충실한 한 스포츠 스타였던 김연아는 왜 지금 비난의 대상으로 변하고 있는가? 많은 수의 사람들이 김연아를 좋아하고, 그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는 것이 금기시 되고 있었는데 어째서인가. 이전과 같은 헝그리한 과거를 가진 스타가 아니라는 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현재 그것이 비난과 비판의 초점은 아니다.

오히려 김연아는 요즘 세대에게 자신의 경제적 처지와 무관하게 자신을 투영하기 좋은 스타다. 신세대이고, 깔끔한 외모, 요즘 세대가 생각할 만한 처지와 환경적 조건(드라마에서는 우리의 환경이 중산층 혹은 그 이상이라고 허구적으로 묘사를 한다)에 있지만 헝그리 정신의 선수들 못지않게 열심히 해서 성공을 이룩한 선수. 요즘으로 치면 부족하지 않은 환경에 깔끔하고, 멋있는데다, 공부도 잘하고, 매너도 좋다. 사실상 완벽에 가까운 젊은이 상이다.

2가지 이유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1997년 이후 누적된 경제의 위기로 스포츠 스타의 이미지와 스토리를 통해서 아름답게 투영하려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와 현실사이에 괴리감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미 성공한 스타가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급속도로 천박하게 상업주의에 영합하는 방식으로 변질되어 가는지가 여과없이 보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스포츠의 공적 가치가 이러하다면 스포츠 인들의 삶은 어떠한가?

스포츠인들 일반의 삶은 어떠하고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한국처럼 운동 선수 일반을 푸대접하고, 각 종목별 다양한 명분의 국가적 상징성과 그 상업적 가치를 미끼로 선수들을 착취하고, 한때 선수였던 스포츠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눈앞의 단기적 영달과 이익을 위해 자신들이 그렇게 당했던 것처럼 매질과 구타를 동원해 혹사시키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히딩크 자서전을 보면 한국의 축구 꿈나무들이 코치에게 맞는 것을 보고 경악하는 장면이 있다).

어째서 이런 구조가 가능한 것일까. 스포츠가 적성이고,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며, 현재 어떻게 생각할 지라도 그것에 대한 순수한 꿈이 있었고, 미래에 김연아나 박태환과 같은 선수를 꿈꾸는 운동 선수들은 다양한 이상을 향해 국가적 영광, 상업적 성공 등의 부가 기대치를 안고 경쟁한다. 뽑히지 않거나 후보가 되면 받게 되는 현실적인 푸대접, 좁디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선수 생활 이후의 미래는 없다는 점 때문에 이들은 기꺼이 이것을 착취가 아니라 선수라면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할 고난으로 여기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비교적 어린 나이인 10대, 20대에 어떻게 다른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비정하게 내팽개쳐 진다. 즉, 더 이상 꿈이나 미래가 없는 상황에서 은퇴할 때까지 자신의 결정을 유예한다. 주변에 쉽게 돈 벌 기회도 있기 때문에 벌기도 하지만 미래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감이 한꺼번에 탕진하는 생활을 반복하게 한다. 생계형 운동 선수거나 점점 장래에 대한 압박을 받는 경우가 상당수이기 때문에 이들은 거래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왜 선수들이 승부 조작에 연루되는 것인지도 꿈이 아닌 비정한 현실에 무뎌진 것을 반영한다. 현재 하고 있는 선수 생활을 끝으로 보장되지 않는 남은 인생은 은퇴 전까지 인생의 2~4배나 되기 때문이다. 같은 선수 출신이었던 감독 및 스포츠 관계자들도 그런 관행에 길들여졌고 그런 미끼들이 아쉬운 사람들이다. 이들이 선수들에게 행사하는 신체적 체벌을 동반한 독재와 스포츠계의 후진적 의식이 이런 일들이 가능한 환경을 제공한다.

승부 조작에 연루되어 제명까지 되었던 최성국 등 선수들이 연루되는 과정을 잠깐 들여다 보아도 그렇다. 조직적으로 모여서 구체적으로 역할 및 배당금까지 계획적으로 모의한다. 속칭 브로커 같은 역할자도 있고, 공모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고민이나 두려움이 없다. 이만하면 스포츠 관련해서 문외한인 나도 얼마나 공공연한지 알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스포츠가 상업의 영역이 아닌 국가와 공공의 영역에서 온전하게 성장할 때만이 국민소득 2만 달러인 나라에서 또 다시 생계형 승부조작, 헝그리 정신을 연상하는 스포츠 드라마가 탄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영화는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다.

포커스를 그들의 신화에 맞춰 자랑스럽다고 인정해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대대적으로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국가다. 사태가 이지경이 되도록 국가가 이들에게 해 준 것도 없으면서 잘 되면 국가를 위해서 했다고 한다. 그 회사의 투자자도 아닌데 그 회사가 잘 되었을 때 와서 권리 행사하는 것과 똑같다. 오히려 위대한 영혼들이 인생에 한번 있는 영광스러운 순간에 숟가락 얹었던 것이 국가가 아니었는가?

국가를 위해 뛰었다고? 국가적인 영광이라고? 그렇다면 제대로 된 지원을 하고 국가적 차원의 체육 인프라를 갖추고 미래가 보장될 수 있게 했어야 그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닌가? 국가가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꿈을 위해 시작했고, 생계를 위해 뛰었으며, 앞만보고 달렸기 때문에 누가 이득을 보고 왜 바뀐 것은 없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인생이 끝난다.

부언하자면 사실 대기업이 올림픽을 통해 광고를 하여 이익을 챙기고 올림픽 위원회도 그런 자본들의 돈에 놀아나지 않는가? 재주 부리는 놈은 따로 있고, 영원한 이득은 다른 놈들이 챙기는 것이다. 운동 선수들을 착취하고 광고 대상물로 사용하는 자들이 각종 음료수, 신발, 옷 등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이윤을 창출하는 과정을 보면 역겹기 그지없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운동 선수들은 정작 불행한 삶을 사는데 말이다.

파워엘리트가 되느냐, 밑바닥이냐

스포츠 일반이 아니라 이 사회 전반에 속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공한 모델이 자신의 과거와는 다른 착취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 그리고 예를 들어 김연아 외에 성공하지 못하고 세상에 던져져야 하는 대다수 인생들의 삶은 성공한 모델과 극과 극을 달린다.

대부분은 고려대에 입학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고, 대학을 다니면서 무단결석에 가까운 일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우며, 자신의 이미지를 이용해 몇억씩 하는 광고를 찍는 것을 상상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나 성공 모델들은 자본주의의 여러 홍보 수단에 동원된다. 상업광고 모델, 무슨 유치위원회 위원, 기타 등등.

정작 자신도 국가나 스폰서로부터 지원을 받고 성장한 경우도 아니면서 어느새 그들이 주는 달콤한 명성과 대학의 학위와 돈의 유혹에 같이 놀아나 기꺼이 국가가 공인하는 인사가 되어 국가주의, 학벌주의를 재생산하고, 광고 마케팅에 기꺼이 몸을 내맡긴다. 여전히 그들이 고생했던 그 현실은 변한 것이 없는데 말이다.

물론 피겨스케이팅은 돈 들일 수 있는 형편이 아니면 하지 못하는 종목이라 김연아를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한다면 스포츠계 일반의 현실과 상관이 없으므로 비판이 비껴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제하고 내게 반박한다면 그 스타의 자본주의적 관성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일반적 지지를 받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 된다. 결국 스포츠 스타라면 그 운동 선수들의 환경과 이해와 요구를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미국의 사회학자 화이트 밀스가 이야기하는 '신흥 파워 엘리트'의 탄생인 것이다. 그들 스포츠 스타들의 역할은 화이트 밀스의 파워 엘리트라는 책의 내용과 부합한다. '상류층을 필두로 성공에 대한 맹신으로 도덕성을 상실해 버린 병든 사회의 모습'이 우리가 김연아에 비판적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과 너무나도 일치하지 않는가?

문제는 김연아 개인이 아니라 김연아 현상을 만들어 내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이미지 전략에 그 스타와 국민들이 놀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김연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스포츠, 연예계 등 스타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다. 김연아라는 걸출한 인물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를 포함해 그 이전, 그리고 지금을 사는 한국사회 스타 양산 시스템의 어두운 이면이다.

그와 달리 대다수 성공하지 못한 운동 선수들이 은퇴 이후 평생 생계에 시달리는 모습까지 비춘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떠 있는 작은 일부 모습과 달리 수면 밑에 깔려 햇빛도 보지 못하는 것이 빙산의 전체 모습이라는 진실과 부합한다고 할까?

계속 김연아의 경우를 들어서 미안하지만 나는 김연아가 금메달을 목에 걸기 전 나이키의 광고를 보면서 경악했던 적이 있다. 김연아가 쪼그려 앉아 운동화 끈을 묶으며 정면을 주시하는 장면이었던 것 같은데 문구가 놀라웠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나지 않지만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는,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업체가 한 스포츠인을 경쟁의 부담에 말려 죽이려고 작정을 했는가 싶은 내용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연아는 착취받는 스포츠 선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런 살인적인 경쟁을 뚫고 나면 더 이상 스포츠인이 아닌 국가와 자본이 동원하는 스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들이 원래 기반했던 스포츠의 현실, 국가대표 등은 명목상, 현실상 있든지 없든지 중요하지 않다. 이미 기반이 자본과 국가로 완전히 이동한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배신하고난 후에 보여지는 모습은 더 이상 스포츠맨십이나 이런 따위의 것들이 자본과 국가의 이해관계 앞에 얼마나 허구였는지 드러난다.

이런 사회 구조의 생얼이 드러나면서 실제 그 개인이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차츰 그런 사회 구조에 젖어들어가 자신이 그것에 앞장서는 인물이 돼 버린다. 피착취자가 착취자의 대변자로 올라서는 것이 스포츠인들의 꿈은 아니었을 것이지만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 스포츠의 대표적 자화상이 되었다.

스포츠 스타는 신데렐라가 돼야 하는 것일까

영화 <신데렐라 맨>을 보면 지금처럼 경제 대공황을 겪는 1930년대 좌절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권투선수 이야기를 보여준다. 실제 나는 그 제임스 브래독이 어떤 인물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하고, 그가 대공황이라는 암울한 시대에 희망이 되었으며, 2차 대전에도 참전하는 등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는 공인의 역할을 다했기 때문에 이 영화에 담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 진실이고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길이 없지만 한국의 스포츠맨들을 스타로 만드는 과정과 비교하면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브래독이라는 인물이 이래저래 포장됐는지, 그 많은 미국의 스타들 중에서 극소수의 경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교롭게도 경제위기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스타들이 보여야 할 시대의 모범을 어느 정도는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 정말로 그런 가치를 추구하든 영리하게 그런 모델을 부각해 미국식 가치를 포장했든지 간에 그 전략은 한국에 비해서 훨씬 영리하고 고도화된 모습이다. 그에 비해서 한국의 자본과 국가 등 지배자들이 양산한 스포츠인 모델들은(사실 그것을 양산하는 한국의 지배자들이 천박하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같은 경제위기 시대 미국의 제임스 브래독이 모범적인 모습을 비춰줄 때 한국의 스타들은 광고 수익 챙기기와 소비를 권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경제 위기라는 국가적인 중대사에도 모델로 키우는 스타들의 모습은 술을 권장하고, 상업주의의 대표주자이고, 개념 연예인은 찾아보기 힘들뿐더러 권력이 나서서 개념있는 연예인들을 사찰까지 하는 시대다. 그다지 시대적 인식이나 개념도 없고, 더 이상 국가 대표도 아닌데 국가와 자본이 조성하는 국가 대표, 공인의 이미지로 돈벌이를 해대는 모습이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우려로 다가오지 않겠는가.

스타들이 고도의 개념을 갖출 필요는 없다. 국민들은 스타들 모두가 <신데렐라 맨>의 브래독이나 차인표, 김제동 같은 인물들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1%만을 위한 세상, 반칙과 특권에 분노하는 현실에 선망했던 스타들 자본과 국가의 앞잡이가 된 것 마냥 표절해 가면서 박사학위 받고 무슨 위원회 위원을 하고, 무단 결석하며 명문대를 나오는 등 반칙과 특권을 닮아가는 것을 볼 때 모순을 느끼지 않겠는가.

소위 운동한다는 사람들을 학창시절에 봐서 안다. 공부는 뒷전으로 만드는 교육 구조와 야만적인 훈련 생활, 극소수만이 가능한 성공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극단적 인생 구조로 인해 그들의 비판의식과 도덕 관념이 무뎌지기 마련이다. 하기에 그들이 문제가 되는 행동이 있어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에게 쓴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 어째서 그런지에 대해서 고민을 할 여유가 없이 불행했던 선수 생활은 지났다. 타락한 사회구조에 동화되면서 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고소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며 귀를 막아버린다면 더 이상 사회적 비판이 그를 이해하지 않게 될 것이다.

조재현이 (당시)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인순이가 종편에 나오고 하는 것들이 사회적 비난의 표적이 된다. 조재현처럼 연기하고, 인순이가 여전히 노래부르는 것처럼 자기 본업 하면서 그런 (안타깝거나 의외의) 행동이 나오는 것과 달리 이미 본업을 하지 않고 자신의 기반이 전혀 달라진 사람이 여전히 국가 대표이고, 국민 동생 이미지를 유지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조재현이나 인순이가 자신의 기반에 적어도 한발 걸쳐 있는 스타라는 사실 때문에 자본과 권력에 아무리 기댄들 그 느낌이 상대적으로 덜한 반면에 이제는 본업과 완전히 분리되어 자본과 국가의 홍보 대사로 기능하는 스타는 그 노골화된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몇몇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을 하다가도 다른 연예인들보다 더욱 본말이 전도된 사실을 깨닫고 문제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내지도 않는데 편안하게 돈 잘벌고 잘 사는 사람을 예전의 그 사람으로 생각하며 지지할 필요가 있을까? 그의 성공 스토리에서 이제는 우리의 현실과 확연히 차이나는 특권적 모습을 보이는데 여전히 우리의 영원한 국가대표일까 라는 의구심. 이런 문제가 점점 탄로가 나면서 위기감에 너무 수세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이라고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현실을 올바로 돌아보자

다시 화이트 밀즈로 돌아가자. 나는 다수 대중이 비판적 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노예화 되는 듯한 어조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갈채를 받을만한 성공 신화가 주류 사회를 옹호하고 비판 의식을 무력화 하는 도구가 된다는 현실을 경고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열광해가며 더 좋은 성적을 내라고 과열 시켰던 나이키 선전처럼 김연아를, 스타들을 착취했던 것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했던 것만큼 그것에 마음을 빼앗긴 대가로 올바로 봐야할 문제를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지는 않았는지, 김연아를 비롯해 스타들을 타락시키는 스포츠 산업과 국가를 제대로 비판하지 않음으로 인해 무수한 운동 인재들과 젊은 사람들, 사랑받을 만한 스포츠 스타들을 승부조작자, 인생 패배자, 상업주의의 화신으로 방치하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덧붙이는 글 악감정은 없지만 김연아 선수 문제가 터지면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하나의 계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스포츠 스타들이 자본의 논리에 브랜드화되고, 국가의 치부를 가리는 이미지 도구로 전락하는 피해자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과 거대하게 구조화되는 스포츠 산업과 국가주의, 자본의 역겨운 장막을 제대로 걷어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글을 썼을 뿐이다.
김연아 신데렐라 맨 파워엘리트 교생실습 제임스 브래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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