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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대오: 자기무시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라

영화 <강철대오>와 온코마우스적 운명의 노동자

13.03.01 16:18최종업데이트13.03.0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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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강철대오:구국의 철가방> 스틸컷. 미문화원 점거농성 중 경찰과 대치 장면(위) 강대오가 여대생에게 삐라 뿌리는 기술을 전수하는 장면(아래) ⓒ 롯데엔터테인먼트


미문화원 점거 사건의 주동인물인 한 여대생을 사랑하게 된 철가방 강대오가 사랑 고백하러 갔다가 운동권 학생으로 오인받으며 겪게 되는 상황을 코믹하게 그리며, 80년대 운동권을 다소 웃기지만 따뜻하게 품으려 했던 영화로 나는 <강철대오>라는 작품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어제 이진경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읽다가 온코마우스(의학 실험을 목적으로 애초에 암 따위의 질병에 걸리게 유전자를 조작해 태어난 쥐로 상업적으로 거래가 되고 있음)에 관한 존재론적 성찰에 대면했을 때, <강철대오>와 칸트가 말한 '(너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고 한 말을 연결지어 생각하게 됐다. 일단 칸트의 말에 대해 그 인간에 내가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아니면 다른 모든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기 위해 기꺼이 수단이 되라는 뜻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또 강철대오의 철가방 강대오와 운동권의 전설 강범모도 떠올랐다.

강범모는 운동을 통해 지성인으로서의 대학생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나, 강대오는 여대생과의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수단으로 내어주고 철가방이던, 운동권 대학생이던 그와는 상관없는 어떤 다른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획득한다. 내가 주목하는 지점은 여기다. 

"구국의 강철대오"를 이끌며 사랑마저도 감추고 살아가는 강범모가 자신을 목적으로 삼기 위해 수단이 되기를 거부하는 행동을 보이는데(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대우받기 위해 즉 자신이 목적이 되기 위해, 대학생으로서 고등지식인 내지는 전문가로서의 지식과 기술을 익히고 이를 국가 발전을 위해 사용하는 일 즉 수단이 되기를 거부하고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음), 이는 나 자신의 권리를 지킴으로서 타인의 권리까지도 보호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즉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할 때 그 인간에 내가 포함되려면 내가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인식 아래 모두를 목적으로 대우하기 위해 나부터 목적으로 대우하는 인식의 출발 단계다.

이런 유형의 인식은 주로 노동운동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 같다. 자신이 이윤 창출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노동권에 대한 자각을 통해 자신도 사람답게 대우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목적으로 대우받는 것이 곧 타인도 목적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주춧돌이라는 인식에 이르러 기꺼이 투쟁하게 된다.

그러나 온코마우스의 사례를 통해 모든 생명을 목적으로 대우해야한다는 생각에 균열이 생기게 되는데 즉 애초에 수단으로 태어난 생명체는 목적이라고도 또 목적이 아니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상태에 주목하게 만들고, 생명이 꼭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또 거꾸로 존경받는 성인들(예수, 공자, 석가 등)의 삶은 과연 목적으로서의 삶이었나 아니면 인류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었나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강대오라는 인물을 강범모와 대비해서 생각할 수 있다. 여대생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운동권 대학생이 되려 해도, 현실적 장벽에 부딪혀 외려 비루한 '짱개'로 되돌아오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여대생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수단(그녀가 사랑하는 강범모와의 도피, 그리고 그들의 운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대신 잡혀가주는 행위를 통해 그들의 행복의 수단이 되어 주었음)이 되어줌으로써 결국 그녀의 사랑을 얻게 되고, 어쩌면 사랑을 통해 한 여자의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를 상태(마지막 장면에서 강대오는 여대생의 사랑고백을 받게 된다. 그것도 강범모가 옆에 있는 상태로)에 이르게 된다.

이 영화에서 '짱개'로 대표되는 노동자들 중 한 명인 강대오는 지식인이라 불렸던 대학생 중 하나인 강범모와 같은 곳에서 시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곳에서 출발했다.  자신의 권리를 깨닫고 타인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같은 곳에서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독재라는 현실이 주는 무게감과 지식인의 의무라는 숭고함을 자각하고 타인의 권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이며, 어떤 자신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그 상태에 이르려하고 있음으로 인해 사실은 타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는 것이며, 이는 자신을 목적으로 대우하는 것이며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다. 따라서 강범모는 자기연민에서 출발하여 자기애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외려 여대생의 사랑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강대오는 비루한 '짱개'로서의 자신의 삶에 어떤 불만도 없었고, 유쾌하기 그지 없게 살았다. 그러던 그가 여대생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계층 내지는 계급의 차이로 인해 닿을 수 없는 그녀는 현실의 벽을 알게 해주고, 이것이 강대오에게 자기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은 그렇기에 아무나(이소룡도, 운동권의 전설 강범모도, 성조기를 내려버린 골수 운동권 강대오도)가 될 수도 있고, 그래서 자신이 누구든 상관없고, 여대생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여대생이 사랑과 학생운동 인생을 계속할 수 있도록 강대오는 강범모로 위장하고 대신 잡혀가고, 경찰버스 안에서 자신의 삶을 되찾은 그녀에게서 사랑고백도 받게 된다. 즉 강대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기무시에서 출발해 여대생을 사랑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연민에 빠지게 되지만, 결국 자기무시가 잃을 것도 없다는 대담함으로 발전해 기꺼이 그녀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어주려 하고, 그녀로부터의 사랑고백이라는 구원에 이르게 했다고 본다. 

다시 칸트의 말로 돌아와서 강범모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기 위해 그 일원인 자신을 목적으로 대우했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타인으로부터의 사랑이라는 아프지만 행복한 삶의 부분을 잃었다. 거꾸로 강대오는 타인을 목적으로 대우하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버리고 기꺼이 수단이 되어줌으로써 사랑을 얻었다.

강대오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은 어쩌면 온코마우스의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 모른다. 자본가의 이윤창출의 도구로 태어나 생명으로서 대우 받을 권리를 알지 못하고 끊임 없이 착취당하고 죽는 운명 말이다. 나도 그렇게 태어난 것 같다. 그래서 슬프다. 그래서 나는 나를 연민한다. 대개의 자기연민은 추하다. 그러나 온코마우스가 스스로의 운명을 자각하고 자기연민에 빠졌다고 추하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기연민에 머물러 있어도 탓해서는 안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중에 나도 포함된다. 자기방어기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기무시는 다른 인식의 차원을 열어 줄 수 있다. 도덕경에 나오는 한 구절(天地 不仁 以萬物爲芻狗 - 천지는 인자하지 않으니 만물을 제사에서 쓰고 버리는 짚으로 만든 개 취급을 한다)처럼 인간은 수단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다. 또 사회에서도 수단으로 인식되고 대우받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당연히 자기무시에서 출발하는 것이 맞는 건지도 모른다. 자기무시를 통해 자기연민에 이르고 자기연민이 기꺼이 타인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어주는 마음으로 자란다면 타인으로부터의 사랑을 얻고 이를 통해 자존감을 얻게 되고 자신을 사랑하게도 될 것이다. 이는 도덕경의 다른 한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耶 故能成其私(성인은 그 몸을 뒤에 두어도 몸이 앞서게 되고, 그 몸(또는 이익)을 밖에 두면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이는 사심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능히 그 사심을 성취하는 것이다.)

불교의 空이 이런 것은 아닐까? 내가 별 것이 아니라는 자각(자기무시)을 통해 자기연민을 넘어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자비)에 이르게 되고, 내가 제외되어도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는 행위의 단계에 이르러 자신을 완성함으로 인해 영원한 타인으로부터의 사랑이라는 구원을 얻고 그래서 더욱 자신을 버리게 되는 순환의 반복.

노동자에게 엄혹한 계절이었다. 그러나 더한 추위와 눈보라가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요즘이다. 노동자를 온코마우스라고 연민하며 동정하는 자기애 강한 운동권도 필요하지만, 자신이 온코마우스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를 무시하고 자기를 연민하지만 이를 넘어 타인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수단이 되어주는 용기를 통해 자기를 구원하고 우리를 구원하는 온코마우스적 노동자가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한겨레 블로그에 개제했습니다.
강철대오 영화 노동자 이진경 온코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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