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역사 사라진 사극…제자리 찾기가 필요하다

[주장] 역사는 없고 픽션만 가득한 요즘 사극, 역사 왜곡도 심각하다

13.06.08 10:31최종업데이트13.06.08 10:31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스타>는 스타는 물론 예능, 드라마 등 각종 프로그램에 대한 리뷰, 주장, 반론 그리고 인터뷰 등 시민기자들의 취재 기사까지도 폭넓게 싣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노크'하세요. <오마이스타>는 시민기자들에게 항상 활짝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말

한국 방송이 시작된 지난 50여 년간 사극은 시청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장르로 그 자리를 굳건히 해왔다. 요즘에도 MBC <구가의 서>,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 KBS 1TV <대왕의 꿈>, KBS 2TV <천명>, JTBC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등 여전히 다양한 사극들이 제작, 방송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최근의 사극들에는 '역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다가 무늬만 사극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스런 마음이 들 정도다.

▲ 구가의 서 최근 사극은 퓨전사극과 판타지 사극이 주를 이루고 있다. ⓒ MBC


너도 나도 '퓨전사극'...역사는 없어

과거 한국 사극은 기록을 바탕으로 정치사와 전쟁사를 다룬 정통 사극이 큰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손꼽히는 <용의 눈물>을 비롯해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한명회><장녹수><장희빈><왕과 비><태조 왕건><명성황후><여인천하><대조영><불멸의 이순신>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말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정통사극의 아성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1999년 방송된 <허준>을 시작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대거 용인되고, 현대적 기법으로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이른바 '퓨전 사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서동요><대장금><이산><추노><선덕여왕><동이><황진이><공주의 남자><뿌리 깊은 나무> 등은 정통사극의 '사실주의'에서 벗어나 픽션을 가미하고 재미를 극대화 시켜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최근에는 아예 배경만 과거인 '판타지 사극'도 유행처럼 만들어지고 있다. 실존 인물에 기반을 두고 있는 퓨전 사극과 달리 판타지 사극은 전설이나 설화에서 볼 법한 비현실적 세계관과 독특한 캐릭터를 무기로 빠르게 세를 넓혀가고 있다. <구미호-여우누이뎐><아랑사또전><전우치>에 이어 최근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구가의 서>까지 방송되면서 판타지 사극이 새로운 것을 원하는 시청자들의 구미를 만족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퓨전사극과 판타지 사극이 득세하면서 가장 기본이 돼야 하는 정통사극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극은 이름 그대로 '역사'가 담겨 있어야 한다. 민중들의 삶과 애환을 담아내는 퓨전사극도 좋고, 전설과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한 판타지 사극도 좋지만 역사의 충실한 재현과 철저한 고증을 중시하는 정통사극이 흔들려선 곤란하다. 자칫 역사는 없고 '무늬만 사극'인 작품들만 난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역사극을 장려하고 정통사극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제작비가 많이 들고 톱스타가 출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통사극 제작을 꺼리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사극을 보며 역사에 관심을 갖고, 책과 기록을 찾아 드라마와 비교해 보는 사극의 순기능과 소소한 재미들은 정통사극이 사라지는 오늘날엔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사회 전체가 이 부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전개는 역사 왜곡을 넘어 창조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 ⓒ SBS


'작가 마음대로' 역사 왜곡도 심각해

또 한 가지 문제는 사극에서 별다른 의식 없이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극을 만드는 제작진들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그것에도 어느 정도 선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요즘 방송되는 사극들을 보면 역사적 사실이나 기록은 완전히 무시한 채 작가의 편의대로 시간과 사건을 뒤죽박죽 재구성하는 일이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 말 그대로 '작가 마음대로' 쓰고 내보내는 것이다.

물론 예전에 방송됐던 사극들도 역사 왜곡 논란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세밀한 고증이나 기록에 대한 해석의 문제였지, 최근 사극들처럼 역사를 통째로 갈아엎는 수준은 아니었다. 픽션이라는 말로 회피하기에는 사극의 파급력이나 책임이 그리 가볍지 않다. 시청자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전달해도 모자라는 마당에 작가의 상상이라는 미명 하에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건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다.

최숙빈의 삶을 완전히 재구성해 판타지 사극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동이>나 보한재 신숙주 폄하논란에 휩싸였던 <공주의 남자>, 과장된 캐릭터와 사건 전개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 <인수대비>, 그리고 현재 방송 중인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와 JTBC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등은 실존 인물의 이름만 갖다 썼을 뿐 등장인물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나 당시 시대상에 대한 연구는 뒷전으로 미뤄 놓은 작품들이다.

특히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스토리는 역사 왜곡을 넘어 아예 역사 창조로 치닫고 있다. 새로운 장희빈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던 당초의 포부가 무색하게 이 드라마는 장희빈이 패션 디자이너라는 이해하기 힘든 설정이나 서인 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폄하까지는 넘어간다 치더라도 이미 죽었어야 하는 명성왕후를 자해와 협박을 서슴지 않는 사이코 시어머니로 그려내고, 백성들이 숭덕비를 세웠을 만큼 존경받았던 민유중을 희대의 권신이자 역모꾼으로 만드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장희빈을 아련하고 사연 많은 여성으로 그리려다 보니 연대에 전혀 맞지 않은 설정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장희빈의 환궁도 보지 못하고 승하한 명성왕후가 드라마 속에서는 무려 10년이나 더 살아 그녀를 괴롭히고, 원자 정호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민유중은 2년이나 더 살아 '정정하게' 역모까지 꾀한다. 심지어 20대 중반의 인현왕후는 스스로 수렴청정까지 하겠다고 나서고, 숙종은 이들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쓰러지는 연기를 할 정도다. 아무리 극적 재미가 좋다지만 이 정도면 코미디 수준이다.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와 <한명회> 등을 집필한 사극작가 신봉승은 현 세태에 대해 "지금의 역사 왜곡은 무지 수준을 넘어 무책임의 극치"라고 개탄한 바 있다. 신봉승의 말처럼 사극을 만드는 방송사와 제작진은 조금 더 책임감을 갖고 드라마 제작에 나서야 한다. 역사가 사라진 사극, 작가의 상상력만 난무하는 사극은 사극의 가치를 잃어버린 일회용품에 불과하다. 그 어느 때보다 역사 문제가 대두되는 이 시대, 문화 콘텐츠로 주목 받는 사극의 제자리 찾기가 무엇보다 절실해 보인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 정통사극 구가의 서 퓨전사극 판타지 사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