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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뒤에 죽는다니...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리뷰]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보고

14.03.10 17:15최종업데이트14.03.1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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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간다. '철컥' 열쇠가 돌아가고, 문이 열린다. 익숙한 냄새가 문 틈새로 쏟아져 나온다. '집이다, 내 집이다'라는 생각이 안도감을 준다. 냉장고와 티브이와 술병들은 집을 나갈 때 그대로다. 어둑한 집 안으로 들어가 평소처럼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던 곳이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다. 화가였던 어머니가 그린 꽃 그림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다. 그리고 아무것도 달라져서도 안 된다. 모든 건 그대로 있어야 한다. 뭔가 달라진다면 그건 착오다. 분명한 착오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그대로, 그대로 있어야 한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던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던가. 이런 생각이 불쑥 치밀어 오르지만, 아니다. 착오다.

나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런 내가 에이즈라고?. 이건 분명 착오다. 의사가 내게 30일 안에 죽는다고 한다. 30일이란다. 여기 비록 작고 어지럽지만 그래도 내 집에서, 이렇게 술을 마실 수 있는데, 변한 건 하나도 없는데, 나는 30일 뒤에 이 집에서 살 수 없단다. 아니, 이 집뿐만이 아니다. 이 동네에서. 이 세상에서도 살 수 없단다.

그럼, 대체 나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그럼 어디로 사라진단 말인가. 모든 건, 착오다. 착오임이 분명하다. 달력이 어디 있더라. 달력이…. 달력이 이상하다. 저 숫자는 30이다. 다른 숫자들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30. 내가 살 수 있다고 의사가 선고한 날 수. 30일. 30일 뒤에 나는 죽는단다. 나는 그럼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30일 후 죽음을 선고 받은 남자, 그의 선택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매튜 매커너히가 연기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론 우드루프는 그의 집에서 언제나처럼 술을 마시며, 스크린을 뚫고 나를 쳐다보면서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약과 술에 취해 흐릿한 눈빛이었지만 그 눈빛이 내게 외치고 있었다. 이건 아니지 않냐고, 나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나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는 살고 싶다고.

한 남자가 울었다. 한 남자가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된 울음을 울었다. 그 울음은 서럽다. 생존의 끝에서 발버둥치는 울음이다. 세상에 나올 때는 분명 혼자가 아니었을 텐데, 이제 떠날 때가 되니 혼자 남았다. 한 때 친구인 척 했던 사람들은, 그의 병을 두려워하고 '호모'였을 거란 오해 속에 그를 적대시한다.

그 홀로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신이 되어, 마지막 희망을 찾기 위해 국경을 넘고, 그는 울부짖고 내 마음은 아프다.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죽음을 선고 받았다. 멕시코에 있다는 정체불명의 의사를 찾아 국경을 건너면서 론 우드루프는 삶의 끝에 다다른 자의 눈물을 흘린다. 그래도 그는 그 의사의 주소가 적힌 종이 쪽지를 생명줄처럼 꼭 쥐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그 때를 모를 뿐이다.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어떤 날은 죽기 위해 살고 있고, 또 어떤 날은 살기 위해 산다는 것을. 그 두 선택지에 양다리를 걸쳐 놓고 왔다 갔다 한다는 걸. 우리가 두 선택지에 양다리를 걸쳐 놓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죽기 위해 산다고 해도, 또 살기 위해 산다고 해도 우리 삶은 똑같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지는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죽기 위해 사는 것과 죽지 않기 위해 사는 것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 것, 그게 우리 삶이다. 아직 시한부 선고를 받기 전까지의 삶 말이다.

그러나, 진실로 죽지 않기 위해, 즉 살기 위해 살기 위해서는(동어 반복이 되지만) 처연한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 나는 살고 싶다는, 나는 죽지 않고 제대로 살고 싶다는. 그래서 그 길가에서 홀로 울부짖던 론의 흐느낌은 새로운 태어남인지도 모른다. 가짜가 아닌 진짜로 살고 싶은, 죽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닌 살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닌, 오로지 살기 위해 살고 싶다는 울부짖음. 한 순간 한 순간 제대로 숨쉬고, 제대로 보고 진짜로 느끼고, 진심을 다해  살아보고 싶다는 그 울부짖음. 아무도 없는 그 차 속에서 론은 그렇게 지난 자신을 떠나보내고, 새롭게 태어나며 홀로 첫울음을 울었는지 모른다. 

제대로 살지 못했는데... 난 죽고 싶지 않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자레드 레토가 연기한 레이언은 병실 침대에 누어, 울면서 얘기한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라고. 그 말 속에 담긴, 처절한 의미. 나는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강렬하게 전달되어 왔다.

그는 아직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살고 싶었던 레이언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자신의 성정체성을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사회 속에선 피해야 할 혐오자처럼 인식되었다. 그 후 레이언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채 살아야 했고 그런 괴로움은 마약을 통해서나마 잠시 동안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남자로도 여자로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채, 레이언은 그렇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얼마나 아쉽고 안타까웠을까. 마지막 죽음 앞에 이르자 진짜 삶에 대한 욕망으로 결국 울음을 터트렸으리라.

두 남자가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 죽고 싶지 않아서, 살고 싶어서 눈물을 흘렸다. 오로지 살기 위해 사는 삶을 살고 싶었던 두 남자가 그렇게 스크린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 흐르는 시간을 일시 정지 시켜놓고, 그 시간들을 뒤로 되돌리고 싶은 두 남자의 눈물이 내 마음을 적셔 왔다.

론이 그의 의사였던 이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가끔 아프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가끔씩 로데오 경기를 하고.' 그러나 나는 론의 이 말속에서 그가 술을 마시고 싶다기 보다, 로데오 경기를 하고 싶다기 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또한 그런 생각이 든다. 론의 대사가 이어졌다면, 아니, 시나리오 속의 론이 아닌 실제의 론이 나타나 우리에게 이야기를 계속해 준다면 이렇게 얘기할 것 같다는.

'나는 그때가 그립지만, 물론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기도 하지만, 지금이 더 행복해. FDA(미국 식품의약국)에서 허가한 약이 얼마나 에이즈 환자들에게 치명적인지 알리고, 그리고 비록 돈을 벌기 위해서 약을 팔고 있기는 하지만, 에이즈 환자들에게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약을 찾아보고, 그 부작용에 대해서 공부하고, 그래서 조금이나마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이 더 가슴 벅차다고. 지금이 진짜 삶인 것 같다고. '

삶을 살아가는 두 가지 선택지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진짜 삶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마초 기질이 다분했던 론이, 동성애라고 하면 치를 떨었던 론이, 게이인 레이언을 사업 파트너로 받아들이고 그를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친구로 인정하는 모습은, 편견을 뛰어 넘어야만 삶의 진실에, 진짜에 그나마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미국 FDA와 제약회사간의 거래, 환자에게 해가 되지 않는 약품이더라도 허가가 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환자들이 약을 처방받지 못하는 상황, 그러한 모순들을 알리고 결국 소송까지 진행하는 론의 모습은 제대로 삶에 뛰어든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제대로 진료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정보도 얻지 못한 채 의사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반기를 들고 직접 자신의 병은 자신이 관리하겠다는 모습은 그가 자신의 삶에 얼마나 주체적이려고 하는지 보여준다.

삶을 살아가는 두 가지 선택지, 즉 '죽기 위해서' 또는 '살기 위해서' 중, '죽기 위해서'라는 하나의 선택지를 버리고, 진짜로 '살기 위해' 살겠다는 선택을 선택한 사람의 삶은 감동적이다.

레이언처럼 제대로 살지 못한 아쉬움에 울부짖기 전에, 그 아쉬움이 조금이라도 덜하도록 론은 그렇게 부산히 움직였다. 아무도 하지 않았던, 그래서 많은 에이즈 환자들이 너무 빨리 생명을 잃을 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그 삶을 선택해 많은 삶을 연장시키고 그렇게 론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렇게 제대로 살았던 한 남자의 생이 기록되어 스크린에 펼쳐졌다. 

'죽기 위해 사는 것'과 '살기 위해 사는 것'에 적당히 양다리 걸쳐놓고, 그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나의 삶에서, 오로지 살기 위해 살겠다는 선택지에만 체크를 한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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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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