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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기사의 실패담, 이토록 눈물 나는 까닭

[안 뻔한 티켓북] 당신 인생에 단 한 작품만 골라야 한다면, <맨 오브 라만차>

15.10.15 11:04최종업데이트15.11.2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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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 세르반테스를 붙잡는 죄수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지하 감옥에 갇힌 세르반테스는 "이상주의자, 엉터리 글쟁이 그리고 고지식한 인간"이라는 이유로 감옥 내에서 기소당한다. 이 재판의 변론을 위해 죄수들을 대상으로 무대를 만드는 세르반테스. 돈키호테로 분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주)오디뮤지컬컴퍼니


죄수들의 탄식만 들려오는 지하 감옥. 갑작스럽게 출입구의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죄수가 지하로 떠밀린다. 시인이자 배우, 극작가이자 세금 관리인인 하급귀족 미겔 데 세르반테스와 그의 친구는 신성모독죄로 감옥에 수감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국법에 따라, 교회에 세금을 징수하려 했다는 이유로.

종교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머무르게 된 이곳. 지하 감옥의 죄수들이 이 둘을 에워싼다. 죄수들의 리더인 도지사는, 지하감옥의 신입 죄수를 무릎 꿇린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너를 이상주의자, 엉터리 글쟁이 그리고 고지식한 인간으로 기소한다!"

공작의 외침과 함께, 본격적인 종교 재판 전 죄수들끼리의 재판이 시작된다. 그의 소지품을 하나하나 살피다 발견된 원고. 돈이 되지 않는 종이 쪼가리를 도지사가 불에 태우려고 하자, 유죄를 인정한 세르반테스는 그 원고를 지키기 위해 변론에 나선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연극'의 형태로.

"지금부터 제가 한 사람을 연기할 것입니다. 이름은 알론조 키하나. 나이가 아주 많은 시골 지주님으로, 빼빼 마르고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지만... 두 눈만은 태양을 삼킬 듯 이글이글 불타고 있지요."

▲ 돈키호테와 산초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돈키호테와 산초를 맡은 배우 류정한과 김호영. 류정한의 노래 실력과 연기야 이미 자타공인 정평이 나 있기에 굳이 평할 필요가 없다. 첫 산초를 맡은 김호영 배우의 재기발랄한 연기도 눈을 사로 잡는다. ⓒ (주)오디뮤지컬컴퍼니


돈키호테와 산초가 되어 지하감옥을 휘젓는 두 배우. 흥미롭게 이를 바라보는 죄수들 사이로, 이 난리통과 자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무관심한 사람이 있다. 감옥의 구석에서 텅 빈 눈으로 불꽃을 응시하던 여자. 극이 커지면서, 세르반테스는 추가로 배역을 맡아줄 죄수가 필요했다. 한 명 한 명에게 역할을 의뢰하던 그가 그녀에게 다가간다.

"아주 특별한 여인"이라며 손을 내미는 세르반테스. 처음에 세르반테스가 내려왔을 때 그의 목을 조르던 여자. 분노와 악만 남은 채,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외면하던 여자는 성화에 못 이겨 결국 그의 손을 붙잡는다.

그렇게 한 여인의 인생을, 죄수 모두의 꿈을, 이 극을 바라보는 관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걸작이 무대 위에 시작된다.

가난한 민중의 벗 돈키호테, 그의 날카로운 눈


올해로 국내 공연 10주년을 맞이하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가 지난 7월 30일,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개막했다. 오는 11월 1일까지 펼쳐질 이 '미친 기사의 이야기'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 필생의 역작인 <돈키호테>를 원작으로 한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씀으로서 당시 조선 사회를 비판하고 새 세상을 꿈꿨던 것처럼, 미겔 데 세르반테스 역시 <돈키호테>를 통해 스페인을 풍자했다. 이 비판 의식은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그대로 살아 있다.

"들어라, 썩을 대로 썩은 세상아. 죄악으로 가득하구나. 나 여기 깃발 높이고 일어나서 결투를 청하는 도다. 나는 나 돈키호테. 라만차의 기사. 운명이여, 내가 간다. 거친 바람이 불어와 나를 깨운다. 날 휘몰아 가는구나. 그 어느 곳이라도 영광을 향해 가자."

<맨 오브 라만차> 속 극중극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광인이다. 300년 전에 이미 폐지된 중세 기사도에 심취한 그는, 칼과 창으로 무장한 채 "정의"와 "사랑" 그리고 "영광"을 외쳐댄다. 주막을 성이라고 부르고, 면도 대야를 황금투구라고 부르는 그. 그런데 그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정말 어리석은 짓에 불과했을까.

돈키호테는 풍차를 거인이라고 외치며 달려든다. 돈키호테에게 풍차는 물리쳐야 할 대상이었다. 그저 바람이 불면 돌아가는, 곡식을 빻는 작은 건물을 살아있는 거인이라고 주장했다. 언뜻 들으면 그저 '미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 정상훈의 산초 2015 <맨 오브 라만차>에서 산초 역할을 맡은 배우 정상훈. 쉴 틈 없이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그의 애드리브는, 극 전체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산초는 다소 어리석어 보이는 인물이지만, 최소한 자신의 욕망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알고 이에 솔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돈키호테를 향한 강한 신뢰는 넘버 '좋으니까'를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마지막 순간 둘시네아와 함께 돈키호테의 죽음을 지킬 때 절정에 달한다. ⓒ (주)오디뮤지컬컴퍼니


라만차는 그렇게 풍요로운 지역이 아니었다. 극 중에서 "텅 빈 황무지"로 설명되는 것처럼, 라만차는 바람이 많이 부는 고원지대이다. 라만차가 속한 카스티야 지방은 오랫동안 이슬람 세력에 의해 지배됐으나, '레콘키스타' 정책으로 가톨릭에 기반을 둔 통일 스페인 왕국에 편입됐다. 통일 스페인 왕국은 백성에게 관대한 나라가 아니었다. 스페인 왕국 인구 상위 3%에 해당하는 귀족들은 전체 토지의 97%를 차지했다.

그래서 '풍차'는 민중 착취와 억압의 상징과도 다름없는 장소였다. 풍차에서 빻아진 곡식은 라만차 농민의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라만차의 농민은 토지와 식량을 귀족에게 빼앗긴 채 신음했다. 농민들은 도저히 세금을 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귀족과 교회는 잉여 생산물을 독점하며 배를 불렸다. 백성의 밥그릇을 뺏어 귀족에게 바치는 그 풍차가 괴물이 아니라면, 무시무시한 거인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극 중 세르반테스 역시, 이런 상황에서 국법에 따라 교회에 세금을 부과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끌려왔다.

집시무어인과 조우하여 돈키호테와 산초가 빈털터리가 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실 '집시무어인'으로 불렸지만, 집시인과 무어인은 별개의 개념이다. 집시는 유랑 생활을 하며 천시되었던 민족이고, 무어인은 이슬람교도들이다.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가장 핍박받고 무시당했던 이들. 이들의 천성이 악해서 도둑이나 강도가 된 게 아니다. 돈키호테는 이들을 '왕족'이라 칭하며,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는지 눈치챈다.

집시무어인과의 조우 장면, 무대 뒤편으로 해바라기가 만개해 있다. <맨 오브 라만차>의 상징적 이미지 중 하나인 '해바라기'에는 여러 의미가 달려 있다. 태양을 바라보고, 태양을 닮았지만 땅에 얽매여 태양에 닿을 수 없는 꽃. 정열과 이상, 영원한 사랑의 상징이기도 한 해바라기는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해 나아가는 돈키호테와 많이 닮았다.

동시에 해바라기는 아픔이기도 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으로 해바라기가 건너온 건 1510년경이다. 지금이야 스페인을 대표하는 꽃이자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았지만, 처음부터 해바라기가 고급 작물 취급을 받았던 건 아니다. 한해의 농작물을 거진 귀족에게 빼앗긴 이들은, 길가에 핀 해바라기의 씨앗으로 굶주림을 달랬다. 해바라기는 가난한 이들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기대야 했던 꽃이었다.

가장 가난하고 핍박받았던 집시무어인들 뒤에, 그들의 친구나 다름없는 해바라기가 피어있고, 그 해바라기를 닮은 돈키호테가 마주한다. 신부는 돈키호테에 대해 "그는 가장 현명한 사람이거나, 가장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름의 힘, 변화의 시작... 둘시네아가 된 알돈자

▲ 조승우의 돈키호테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 역을 맡은 배우 조승우가 '이룰 수 없는 꿈(Impossible Dream)'을 부르고 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돈키호테는, 가장 미친 건 자신이 아니라 세상임을 몸소 증명하는 인물이다. 그의 노래와 행동은 주변 사람을 감화시키고 변화를 이끌어낸다. ⓒ (주)오디뮤지컬컴퍼니


그런 돈키호테를 알돈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돈키호테 역시, 다른 남자들처럼 자신과 하룻밤 자는 것을 원하는 것일까. 그가 추구하는 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알돈자의 질문에 돈키호테는 "당신을 구원하는 것"이라며, "마지막 순간에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고 답한다. 알돈자는 돈키호테를 비웃고, 그의 실패와 패배가 예정된 것이라고 욕한다. 우리는 똥구덩이에 사는 구더기에 불과하다는 알돈자의 말에, 돈키호테는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며 답한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오.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돌아보지 않고, 멈추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이처럼 끊임없이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꿈만 꾸면 뭐든지 잘 될 것이다'는 허황된 낙관론에 의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꿈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시밭길인지 역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돈키호테 때문에 꿈을 꾸게 된 그녀. "가슴 속에 분노"만 가득찼던 그녀는 선의와 자비, 용기와 사랑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된다.

돈키호테를 따라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나가 되기 위해 원수들인 노새끌이들에게 선의를 베푸는 그녀. 그러나 그녀가 베푼 선의의 보상은 노새끌이들에게 짓밟히는 것이었다. 노새끌이에게 유린당한 후 돌아온 그녀는 돈키호테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 린돈자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알돈자 역할을 맡은 배우 린아. 전미도의 알돈자는 내면의 순수함과 꿈을 간직한, 보다 가녀린 '작은 새'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린아의 알돈자는 주막의 부엌데기로서 훨씬 억척스럽고 강인한 면모를 보인다. <지킬 앤 하이드>에 이어 착실히 필모그라피를 쌓아 가고 있는 린아는, 아이돌 출신이라는 편견을 성공적으로 깨고 있다. ⓒ (주)오디뮤지컬컴퍼니


"날 짓밟고 지나간 수많은 놈 중에, 당신이 제일 잔인해. 짓밟고 가는 건 참을 수 있으니, 꿈꾸게 좀 하지 마."

그렇다면 왜 이토록 우리는 절실하게 꿈을 좇아야 하는 것일까. 어차피 잡을 수 없는 별을 향해 팔을 뻗어봤자, 아픈 건 우리만이 아닐까.

"이상없이 살 수 있는 용기…. 난 그런 거 없소이다."

이상주의자 세르반테스를 향해 공작은 외친다. 현실을 직시하라고. 그러나 세르반테스 역시 그 현실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전쟁 와중에 죽어간 그의 동료들, 그가 목격한 수많은 굶주림, 야만, 폭력. 그가 말하는 건 현실을 미화하는 동화가 아니다. 그 똥구덩이 같은 현실이 잘못된 것이지, 그 똥구덩이에서 날아오를 날을 꿈꾸는 구더기가 잘못된 게 아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갈 때 과연 누구를 미치광이라 부를 수 있습니까? 꿈을 포기하고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게 미친 짓이겠지요.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찾는 게 미쳐보입니까? 아니오! 아닙니다! 너무 똑바른 정신을 가진 것이 미친 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한 채 꿈을 포기하는 것이라오."

그래서 이름이 중요하다. 이름은 그저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이 아니다. 그 누군가는 이름이라는 틀에 의해 규정된다. 스스로 늙고 병든 시골의 지주 알론조 키하나가 아니라, 정의와 영광을 향해 돌격하는 돈키호테라고 정의하는 것처럼. 알돈자는 몸을 파는 창녀이지만, 둘시네아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새처럼 날아오르며 달빛도 잡는" 레이디이다. 그녀의 고귀함은 처녀막의 유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가슴속에 품은 게 무엇인지가 결정한다.

과업을 완수한 돈키호테, 둘시네아와 함께 서로를 구원하다

▲ 둘시네아가 되는 알돈자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인물은 바로 알돈자이다. 돈키호테를 향해 "꿈을 꾸게 한 당신이 제일 나빠"라고 비난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의 곁을 찾아온다. 돈키호테로서의 기억을 잃은 노인을, 다시 돈키호테가 되게끔 한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는 둘시네아가 된다. ⓒ (주)오디뮤지컬컴퍼니


"현실은 진실의 적이오."

그렇다. 현실은 진실의 적이다. 거울의 기사가 돈키호테를 쓰러트린 것처럼, 우리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멀게 하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죽을 때가 되어 정신이 혼미한 알론조 키하나 앞에, 이성과 합리성·현실감각으로 무장한 닥터 카라스코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를 깨우는 것은, 뒤늦게 찾아온 산초의 용 이야기이다.

알론조 키하나는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예감하고, 자신의 유산 분배에 대한 유언장을 작성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알돈자가 그를 찾아온다. 꿈이 꺾인 알돈자는, 그녀 앞에서 돈키호테가 무너지는 걸 목도했다. 하지만 한 번 마음속에서 불타오른 꿈은, 한 번 꾸기 시작한 꿈은 버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그를 찾아와야만 했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이거 당신이 한 말인데! 싸움, 이길 수 없어도…. 기억 안 나요?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기억해봐요, 제발! 길은 험하고…. 험해도…."

돈키호테임을 기억하지 못하는 알론조 키하나에게, 알돈자는 울면서 자신을 감동하게 했던 그 노랫말을 더듬거리며 떠올린다.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노기사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다"고 서원을 바쳤던 레이디가 다시 찾아왔는데, 어떻게 기사된 몸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 모험이 그저 꿈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돈키호테가 노래를 이어받는다. 이미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순간, 그는 알돈자를 다시 한 번 "나의 레이디"라며 둘시네아라 칭한다. 잠시 후 죽을 운명이지만, 그는 당장에라도 더러운 세상을 향해 돌진할 준비가 된 것처럼 '맨 오브 라만차'를 열창한다. 라만차의 기사는 영광의 나팔 소리에 응답하지만, 끝내 그 노래를 완창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그러나 라만차의 기사는 그의 과업을 달성했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레이디인 둘시네아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그녀를 구원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둘시네아는 구원받았다. 자신을 알돈자라 부르는 산초에게 "내 이름은 둘시네아예요"라고 답하는 그녀는,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비단 구원받은 건 그녀만이 아니다. 싸움에 나설 때, 레이디 없는 기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알론조 키하나가 다시 돈키호테가 되어 마지막 전투에 임한 건 모두가 둘시네아 덕분이다.

결국, 때가 왔다. 연극은 끝났다. 종교 재판의 시작을 알리는 집행관. 하나의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재판에 회부되는 인기 있는 피고인 세르반테스는 그의 친구 가슴에 손을 대고 "용기"를 외친다. 감옥 밖으로 향한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세르반테스를 향해, 도지사가 외친다.

"세르반테스! 내 생각에….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는 형제요."

세르반테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한다.

"우리 모두가…. 라만차의 기사들입니다."

다시 발길을 옮기는 세르반테스를 향해, 둘시네아를 연기했던 여인이 뛰쳐나온다. 연극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그녀가, 더는 알돈자일 수 없는 그녀가 가장 먼저 노래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던 허황한 가사의 노래를.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다시 시작된 '이룰 수 없는 꿈'. 여인의 선창에 공작을 제외한 모든 죄수가 합류한다. 목소리와 목소리가 겹친다. 합창이 된 노랫말은 감옥 안을 가득 채우며 감옥 안의 공기를 뒤흔든다. 그 떨리는 공기가 보는 이의 심장마저 두근거리게 한다. 뒤돌아서 애써 장면을 외면하는 공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결국 커튼콜 때 세르반테스 바로 옆에서 가장 먼저 대열에 합류하는 것도 공작이다.

우리도 그렇다. 돈키호테처럼 지금 당장 무작정 꿈을 향해 돌진할 용기는 없어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현실 속에서 살 용기도 없다. 카라스코처럼 현실에 얽매여 진실을 놓치더라도, 알돈자처럼 둘시네아가 될 가능성 하나씩을 품으며 살고 있다. 우리 모두가 라만차의 기사이니까.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죄수들의 눈물 젖은 노래를 뒤로한 채, 세르반테스는 빛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 있는 길. 그를 기다리고 있는 종교 재판. 암울한 상황이지만, 그 계단이 마치 지상에서 하늘로 나 있는 층계처럼 빛난다. 그 빛이, 마치 잡을 수 없는 그 별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처럼 반짝인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가시밭길. 그러나 그 길은 곧 신념을 지키는 길이자 영광의 길이다.

"가네, 저 별을 향하여. 쉽게 닿을 수 없어도. 온 마음 다하여 나아가리. 영원히, 저 별을 향하여."

세르반테스는 미소 지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결국 한 줌의 재로 산화하는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무적의 기사, 라만차의 돈키호테니까.

▲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메인포스터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슬픈 수염의 기사'는 로시난테를 타고 창을 꼿곳이 든 채 잡을 수 없는 별을 향해 나아간다. 그는 결국 저 별에 닿지 못했다. 아무려면 어떠랴. 우리 모두가 곧장 돈키호테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알돈자는 될 수 있다. 우리 가슴속에는 저마다 둘시네아의 가능성을 품고 있으니까. 돈키호테가 알돈자를 구원하고 그녀 안의 둘시네아를 깨워냈듯이, <맨 오브 라만차>는 우리 안의 둘시네아를 끄집어 낸다. ⓒ (주)오디뮤지컬컴퍼니



맨 오브 라만차 돈키호테 조승우 류정한 오디뮤지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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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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